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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담 Nov 06. 2018

일본 워킹홀리데이 후기

체험수기 덕에 기록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도 이제 만으로도 어쩔 수 없는 30대, 서른 하고도 둘이 되었네요.

 지금 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가는 열차 안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출국 전에 우연히 <워킹홀리데이 체험수기 공모전>이 있기에 제 경험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싶어 노트북을 챙겼습니다. 일본어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는데 기업 제휴를 위한 출장을 왔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3년 전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학비 마련을 위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무려 8년이 걸려 대학을 겨우 졸업했습니다. 밤낮 아르바이트로 흔한 MT와 대외활동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울며 겨자먹기로 졸업을 위한 학교 생활을 하다보니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들처럼 그냥 졸업해서, 또 돈을 벌기 위한 취업으로 연결되는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후회하지 않을까, 내가 진짜 해보고 싶었던 게 뭘까 하는 고민을 스물아홉이 되어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졸업식을 하고 내린 결정은 전부터 짧게 관광만 해봤던 일본에서 한 번 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콘텐츠 전공을 했기에 캐릭터, 게임 등 분야에서 전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일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냥 관광지만 둘러보고 오는 여행이 아니라, 현지에서 직접 살면서 돈도 벌어보고 실제 일본인들과 같이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제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 할 것이라고 느겼습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결정하고 행동하는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준비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우려와 걱정어린 반대 뿐이었습니다. 안정적으로 취업을 해도 모자란, 빠른 친구는 부모가 된 29살이라는 나이 때문이었지요. 게다가 당시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인하여 방사능에 대한 뉴스가 한창일 때라 한 사람도 동의해주지 않았습니다.

 성인이라면 자기 인생은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지요. 모아둔 돈도 딱히 없어서 오랜시간 들어두었던 주택청약을 깨뜨려 출국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고향이 대구였기에, 경상도와 성향이 비슷하면서 나름 안전을 생각한다고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는 오사카를 목표로 정했습니다. 부산을 오가며 비자를 준비하고, 만약을 대비하여 초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조금 해보고, 1년짜리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그렇게 2015년 1월 11일 새해에서 열흘이 지나 정리를 마치고 말도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준비가 부족하면 내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더 노력할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었을까요. 가자마자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유일하게 출국 전에 준비한 것이 한 달 동안 머물 게스트하우스 숙소였는데 예약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기재된 주소로 찾아갔는데 방이 전혀 없었습니다. 앞이 깜깜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에 일단 우리나라 2호선 같은 오사카 전철 순환선을 탔습니다. 피로가 누적된 탓에 깊이 잠이 들었는데, 한바퀴를 그냥 돌아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내린 곳은 ‘신이마미야新今宮’라는 역이었습니다. 역을 나서니 하루 숙박료가 겨우 만원 밖에 안하는 호텔들이 즐비했습니다. 가격에 딱 맞는 우리나라 고시원보다 더 좁은 방이었지만 일단 씻고 잠만 잘 수 있으면 되었기에 하루를 잘 넘기고, 이 주변이 물가가 저렴하다고 판단해서 집을 알아보러 동네를 계속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캐리어를 끌고 두리번 거리는 제가 안쓰러웠을까요, 어디선가 “한국 분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나 반가워 고개를 돌렸더니, 호텔 입구에서 안경을 쓰신 한국분이 웃으며 서 계셨습니다.

 오래 전에 일본에 오셔서 결혼 후 정착하고 계신 ‘라이잔来山’ 호텔의 사원분이셨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방을 찾고 있다니까 그럼 여기서 머물라고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일본은 비즈니스 호텔이라고 하여 출장이나 여행자가 매우 저렴한 가격에 비용을 아끼기 위해 이용하는 호텔이 잘 되어있다고 그 중에 시설 면에서 가성비로는 괜찮은 편이라 추천을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한 달 월 계약을 하면 할인이 되어, 원래 머물려고 했던 게스트하우스보다 저렴하면서 목욕탕에 모든 생활용품이 구비된 곳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새옹지마. 다행히 일본이 저를 마음에 들어했는지 운명처럼 역에 내려서 한 해를 머물 숙소가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집이 해결되니 다음엔 통신사와 은행계좌였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려면 연락처와 급여를 받은 통장이 있어야하니까요. 문제는 일본의 너무나 엄격한 법률로 인하여 외국인에 대한 개설 조건이 까다로웠습니다. 과거에 일본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이 비용을 체납하고 도주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지금의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을 벗어나는 순간 모두가 외교관, 절대 조국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구청과 우체국을 수차례 왔다갔다하여 은행 카드와 전화를 만드는데 무려 2주나 걸렸습니다. 그동안 호텔의 직원들과 한,중,일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오는 일본 관광객들과 친해져 같이 식사도 하고 근교로 놀러도 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계좌가 개설되서 마냥 쉬기만 할 수 없어 바로 일을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외국인을 당연히 받아줄 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일단 처음에는 몸이 고생하자는 각오였습니다. 소위 막노동이라고 하는 건설현장에 가면 숙소도 제공해주고, 급여도 높은 편이니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생활을 두어달 정도만 하면 충분히 생활비도 모으고 어느 정도 언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사전을 동원해서 어설픈 일본어로 면접 약속을 잡고 현장을 찾아갔는데, 한국과는 다르게 급여는 너무 박하고 숙소 비용을 따로 더 내야했는데 호텔보다 더 비쌌습니다.

 준비 부족에 저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다시 호텔로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호텔 매니저분께서 호텔에서 일하는 건 어떠냐는 제의를 주셨습니다. 일단 말을 못하니까 빨래부터 청소까지 허드렛일을 하는 아르바이트고 급여 대신 방세를 면제해주는 조건이었지만, 방세 말고 돈을 쓸 일이 없어서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우연의 연속이지만 집과 일이 같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호텔 일을 하고 남는 시간 동안은 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일부러 일본인 관광객이나 외국 손님들과 소통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심야 시간에 한국인 손님에 문제가 생기면 제가 처리할 수 있었고, 턱없이 부족하지만 영어 발음도 일본인보다 좋아서 외국인 손님 전담이 되면서 호텔 직원분들도 인정을 해주고 하는 일의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기초적인 일들이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고, 그것을 조금씩 습득하면서 나아지는 것이 마치 학년이 올라가는 것 같은 설렘이 되어 매일이 행복했습니다.

 저처럼 저렴한 방값을 이유로 워킹홀리데이로 온 호주인 제임스와, 독일인 하네스가 있어 서로 의지하고 도와줬습니다. 홋카이도, 나고야, 도쿄에서 오신 손님들과 말레이시아, 태국, 네덜란드, 프랑스, 중국인 친구도 생겨 나중에는 저를 보러 멀리서 일부러 와주시고 선물까지 챙겨주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일본만 생각하고 왔는데 전세계의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 시야가 넓어지고 제가 그동안 얼마나 좁은 우물 안에 갇혀있었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첫 한달을 보내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예상보다 빨리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면서 일을 하나 더 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한국에서 온 60대 할머니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 본인은 과거에 한일 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대통령에게도 표창을 받았다고 소개하면서, 지금은 은퇴하고 소호 무역을 하고 있다 했습니다. 제가 타지에서 고생한다고 음식 등을 챙겨주었습니다. 어르신이고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하여 보답을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 틈나는 시간 일도 거들고, 얼마 없는 돈까지 빌려주었는데 놀랍게도 전과가 있는 사기꾼이었습니다. 잃은 비용보다 타국에서 같은 한국 사람한테 피해를 당했다는 게 너무나 화가 나고 우울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만 조심하면 된다는 손님들의 말을 받아들이기 싫었는데, 현실이 되니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사기꾼은 귀국 후에도 소송을 걸어 괴롭게 했는데,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 때문에 더 얻은 게 많다고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저처럼 같이 사기를 당한 오사카 한인타운에 계시는 진해물산의 사장님 부부를 알게 되어 또 도움을 받고, 대만인 동생도 생겼습니다.

 워홀과 별개지만 이 사기 건으로 피해자들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사람들 만나면서 서로 위안이 되고, 변호사처럼 증거를 모으고 재판을 참여하면서 당시는 괴로웠지만 또 지나고 나니 소중한 경험이었어서 매사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이 도와서 모든게 전화위복이 되어 좋은 결과가 된 워홀의 시작이었습니다. 생활비의 문제가 생기게 되자 더 성실하게 되었습니다. 전부터 한국의 1인 가구가 증가함에 따라 편의점 및 도시락 분야가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그 분야에서 전국적인 체인을 갖고 있는 ‘오리진 벤또origin ’라는 오사카 매장에 이력서를 넣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오사카도 고령화 현상이 심해 젊은 사람들이 요식업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 종업원 대부분이 유학생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말과 일본어는 문법 체계가 거의 동일하므로 중국, 베트남인들보다 언어 배우는 속도가 배로 빨라서 정식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보다 훨씬 능숙했습니다. 습득이 빠르고 일 하기도 편해서 사람이 필요할 때 더 자주 불렸습니다. 호텔일을 하면서 도시락 매장까지 투잡의 연속이었지만, 힘든 줄 모르고 마냥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돈을 주고 받는데까지 프로그램이 정해져있고, 단순한 아르바이트에도 이틀간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는 시스템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시켜 외국인이라도 문제없이 똑같은 서비스가 제공되니 체인 사업이 탄탄하고 어디를 가나 별 차이 없는 상품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1년이라는 워홀 기간이 너무 짧게 느껴져서, 더 배우고자 하는 욕심에 무리 해서 비는 시간에 일을 또 구했습니다.

 한국에도 진출하여 ‘도지마롤’로 유명한 ‘몽쉘’ 본사 공장에도 들어가서 해본 적 없는 공장일도 해봤습니다. 대표가 재일교포에 공장 견학에 한국 기업 관계자분들이 단체로 오셔서 따로 인사도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반복적이고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제 교만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려 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빵이라고 얕보았다가 일하는 직원들의 장인정신과 누가 보지 않아도 철저히 규율을 지키고 허투루 하지 않는 것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는 너무나 보편화 되어있는 소고기덮밥(규동) 체인점 ‘마츠야松屋’에서도 심야시간에 일을 했습니다. 햄버거가 아닌 한끼 식사를 빠른 속도로 내면서 혼자서 충분히 10명을 상대할 수 있는 매장 구조와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일본인을 무서워하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반적인 청년 품귀 현상으로 하는 일마다 사람이 부족하여 추가 근무를 하게 되었으나, 일본에서도  ‘블랙바이트’라고 하여 제대로 급여를 챙겨주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리한 탓에 피로가 누적되어 쉬는 시간에 공부보다 잠자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서 워킹은 줄이고, 홀리데이에 좀 더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정도 일본어에 자신이 붙어서, 호텔에 단순 허드렛일이 아닌 정식 프론트 리셉션 업무를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가족처럼 가까워진 직원들도 동의를 해주어 정식 급여를 받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일하는 시간도 줄고, 또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뻤습니다.

 천운이 따른 것도 있지만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을 했기에 인정 받을 수 있었고,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시간에 일하면서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오사카를 기점으로 간사이 지방 전체를 여행 다녔습니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교토, 지진의 아픔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야경을 뽐내는 효고현의 고베, 하얀 자태를 뽐내는 성의 도시 히메지, 일본의 영웅들이 묻혀있는 와카야마의 고야산, 호수의 도시 시가, 사슴과 절이 가득한 나라까지. 틈날 때마다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주변 곳곳을 눈과 머리에 집어넣었습니다. 전국 어딜가나 하회탈이 있는 우리나라 관광상품과는 다르게 그 지역의 문화재와 특산물을 살려 그곳에서 밖에 구할 수 없는 탐나는 상품들이 즐비한, 그런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능력을 부러워하면서 언젠가 내가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끊임없이 벤치마킹했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축구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 과거 유명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도 많이 뛰었던 ‘세레소 오사카’의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여 경기가 열릴 때마다 관람하러 갔습니다. 운좋게 인터뷰에 선정되어 개선할 만한 것들을 조언해주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 선수의 싸인 유니폼도 선물 받았습니다.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서 또 친구를 만들고, 원래의 외국 친구들도 데려가서 지금 떠올려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출국 전에 제가 꿈꾸었던, 그 나라에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열심히 여행을 다니며 워킹과 홀리데이의 밸런스를 적절히 유지하는 1년간의 삶을 멋지게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가 막히게 운이 따라주어 잘 풀렸지만, 어찌보면 미리 철저히 준비를 했으면 안해도 되는 실수였으니 워홀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가려고 하는 나라에 대해서 조사만큼은 탄탄하게 했으면 합니다.

 워킹홀리데이 1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고 의미있는 한 해였습니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오히려 반대했기에 오기가 생겨 더 잘하려고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취업을 걱정했지만, 귀국 후 조금의 문제도 없이 일을 구했습니다. 일본을 가보니 또 다른 세계가 궁금하여 스웨덴 워킹홀리데이를 목표로 했습니다만, 서양의 경우는 실수했을 때 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준비하고자 스웨덴 기업이었던 ‘이케아’를 들어갔습니다. 근무하면 스웨덴으로 파견해준다는 조건 때문이었는데, 근무 중에 제가 일본어를 한다는 것을 아신 대학 은사님께서 부동산 기업에 저를 추천해주셔서 이직하게 되었고 전혀 전공을 하거나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 거주하면서 보고 들은 경험으로 벤치마킹하여 새로운 사업에 적용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오사카에 출장도 가게 되었고요.

 그리고 또 좋은 기회가 생겨 IT 기업으로 이직하였고, 지금 근무하는 회사와 제휴 접점이 있어 직접 주도하여 미팅을 위해 도쿄로 향하고 있습니다. 제가 졸업 후 단순 성적에만 맞춰서 되는대로 아무 회사나 막 지원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취업난에 허덕인다고 하지만 여러 경험 덕분에 걱정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 “남들 다 영어할 때, 너는 아프리카어를 배워라”라는 말씀이 여전히 뇌리에 깊숙이 남아있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가면, 더 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이아몬드가 희소해서 값비싼 것처럼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무기로 만드는 것이 더 쉬우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워킹홀리데이를 간 것이 대해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만,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더 다양한 나라를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만 30세 제한이 있다는 것을 1년만 빨리 알았더라도 2개 이상 국가에서 살아볼 수 있었는데 무지가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20대의 후배들을 만나면 저는 항상 같은 조언을 해줍니다. 국내에서 뚜렷한 계획이나 목표가 없으면 일단 무작정 외국에서 살아보라고. 요즘 청년의 문제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본인이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본인의 노력 여부에 따라 새로운 언어 스킬과 국내에서 일할 때보다 더 많은 급여, 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준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저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는데 더 똑똑하고 IT기기에 능숙한 후배들은 더 많이 배우고 올 것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3년 전의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지금도 계속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놀러와서 연락해 만나면 얼마나 고맙고도 반가운지 모릅니다. 저 역시 출장 겸 여행으로 그 뒤로도 일본을 4번 더 갔습니다. 해외에 제2의 고향이 있다는 느낌, 누군가 나를 반겨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헤어짐이 아쉬워 눈시울을 붉혀주는 사람이 바다 건너 있다는 행복을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에서 살아보려면 그 나라의 기업에 정식 취업을 하여 비자를 받거나, 대학 유학, 이민 또는 현지인과 결혼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조건이 까다롭고 많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워킹홀리데이는 20대라면 누구나 1년을 살아볼 수 있게 하는 기회이자 정부의 혜택입니다.

 이전에 다녀온 선배들의 경험치와 데이터가 쌓여 더 안전하고 편리한 워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청춘, 의미있는 해외 경험을 통해 더 행복한 인생을 만들기 위한 도전을 추천하고 응원합니다.

 글 쓰는 동안 또 지난 추억이 떠올라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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