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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담 Sep 29. 2016

킹덤 오브 헤븐

영화와 실제 역사의 비교

인하대 김원중 교수님의 '봉건사회와 중세도시' 수업에서 보게 된 장편 영화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2005)'. 레골라스로 유명한 올랜도 블룸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감독판이 추가되어 보게 되었다. 오프닝부터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나오고, 중간에 쉬어갈 수 있는 삽입부를 넣을 정도로 장편 영화다. 중세 배경을 매우 디테일하게 잘 살려 미장센이 돋보이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임에도 당시 십자군 전쟁을 서양인의 관점만이 아닌 이슬람과의 중립을 잘 지켰고 내용도 탄탄하다. 교수님의 과제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십자군 전쟁에 깊은 관심이 생겨 만화작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4>를 도서관에서 빌려 하루 만에 다 읽고 그동안 이슬람에 대한 너무나 협소한 지식과, 십자군 전쟁의 문제에 대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직접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이미 영화를 접했을 이들과 앞으로 또 보게 될 이들, 나 자신을 위해 다시 정리해보기로 한다. 상업적인, 자유로운 창작물인 영화에서 역사 왜곡을 논하며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실제 역사를 알고 그것이 어떻게 재생산되었는가를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공부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가급적 영화 '킹덤 오브 헤븐'과 간단한 십자군 전쟁 관련 도서를 읽고 보았으면 한다.) 서두에 미리 참고문헌을 밝힌다. 시중에 수많은 십자군 전쟁 관련 도서가 있지만, 전체 유럽사에서 일부분 쓴 것이 대부분이고, 심도 있게 다룬 것 중에 영화에서 다루는 기간만 찾아 인용했다. 전문가의 비평을 읽고 싶은 분은 <영화는 세상의 암호 2>(박태식 저, 늘봄)를 추천한다.


토머스 매든, <십자군>, 권영중 역, 루비박스, 2005

아만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김미선 역, 아침이슬, 2003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송태욱 역. 문학동네, 2012

시오노 나나미,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문학동네. 2012


영화의 시작은 1184년의 프랑스에서 시작한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프랑크인들을 연상하기 위해서인지 프랑스로 설정이 되어있는데, 정작 등장인물들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해서 몰입이 되지 않는다. 최근 레미제라블 역시 배경은 프랑스인데 영어로 노래하는데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자본에 의해 국적을 초월하여 문화가 재생산되고 있다. 대중들 역시 그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면 서양의 북미와 유럽의 뿌리가 일맥상통하기에 거부감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우리나라 독립운동 관련 역사물을 몽골인들이 자기들 말로 영화화한다면 매우 어색할 텐데. 우리나라의 민족주의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일까. 자칫 모든 서양 역사를 영미의 역사로 기억하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생긴다. 문화의 무서움이다. 십자군 전쟁 역시 당시의 프랑크인들과 이슬람인들의 역사지만, 종교적 성격으로 인하여 서구 크리스트교 문명 전체의 역사로 확대된 것 같다. 서두부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다.


(역사 기록의 시간 순서와 영화의 시간 순서가 일치하기 않기 때문에 다소 두서없이 글을 기록하게 된다.) 십자가에 빛이 집중되고, 왼편에서 고프리(리암 니슨)의 기사단이 이동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1184년은 보두앵 4세(1174~1185)의 나병 말기로 거의 죽기 직전이며, 1174년 5월 14일에 이슬람에는 누레딘이 사망하고, 살라딘이 다마스쿠스를 장악하며 이슬람을 통합하는 시기이다. 영화 전반과 실제 역사의 흐름과 거의 일치하기에 적절하나, 프랑스라는 설정과 고프리는 모두 픽션이다. 뒤에 덧붙이겠지만, 고프리는 가상의 인물(내가 읽은 문헌엔 등장하지 않았다)이고 발리앙 역시 이탈리아인이다.

영화는 영어로 되어있어 등장인물이 영문이고, 문헌마다 이름이 달라 실수로 혼용할 수 있어 미리 언급한다.


발리앙 이벨린 = 발리안 이블린

보두앵 4세 = 볼드윈 4세

시빌 공주 = 시빌라 공주

트리폴리의 백작 레몽 3세 = 트리폴리스 백작 레몽 = 티베리아스(영화)

레이놀드 = 르노 드 샤티용 = 레이날드 = 샤티용의 레날 = 아르나트

기드루지앵 = 기 드 뤼지냥 = 기

살라딘 = 살라흐 아 딘

마을의 사제이자 발리앙의 동생은 발리앙의 아내, 곧 자신의 형수를 십자가 앞에서 매장한다. 영화에서 십자가가 자주 등장하는데, 당연히 십자군 전쟁이 종교를 명목으로 했기에 병사들의 갑옷이며 장식, 장면 곳곳에 배치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여기에 감독의 의도는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끔찍하고 무자비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서양의 몰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발리앙의 동생과 매장꾼의 대화를 통해 발리앙의 아내도 무언가 억울하게 마녀 사냥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가톨릭은 죄 없는 여성들을 마녀의 누명을 씌워 학대하고 끔찍하게 학살했다. 십자가 아래서 도끼로 시체의 목을 자르는 장면은, 원래 처형 도구로서의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고프리가 실존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영화에서처럼 발리앙의 아버지면서 이벨린의 영주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당연히 이렇게 기사 작위를 내려주는 장면도 후반부에 발리앙이 다시 기사 수여하는 장면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고프리와 시빌라가 영화화되면서 가장 왜곡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 하지만 이런 왜곡이 없으면 영화의 분량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다른 참고문헌엔 간략하게 발리앙 이벨린을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는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내가 읽은 책들에서는 고프리는 등장하지도 않았다.


[발리앙 이벨린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제1차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예루살렘 지역에 정착한 사람의 후예다, 이벨린이라 명명한 야파 근처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영주이며, 중근동에서 나고 자란 프랑크인이다. 이탈리아 출신이 흔히 그렇듯 현지 적응력이 뛰어나, 고급 아라비아어를 구사할 줄 알고 이슬람 사회의 현 정세에도 밝은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인의 후손이므로 오프닝의 프랑스에 사는 대장장이라는 설정도 틀렸으며, 예루살렘에 들어오기까지 영화 중반부의 모든 과정은 꾸며낸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사실을 가공함으로써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벨린 가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그는 보두앵 4세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전쟁에 나가는 왕과 항상 동행한 것은 이벨린이었다. 트리폴리 백작은 자기 영지가 있었으므로 항상 동행할 수는 없었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는 이 이벨린을, 아버지 아모리가 죽은 후 미망인이 된 비잔틴제국의 황녀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시킨다. 아직 가문의 후계자도 아닌 이벨린에게는 파격적인 후대였는데, 자신의 여명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앞날에 이벨린 같은 남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본인 소유의 영지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나블루스에 있는 영지까지 하사한다. 발리앙 이벨른이 서른일곱 살이던 해의 일이다]


[발리앙 이벨린은 이벨린 가의 장남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영주 일가의 일원에 불과했다. 예루살렘 왕국 내의 분쟁에 염증이 난 큰형이 안티오키아로 물러가는 바람에 이벨린 가의 주인 자리가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해 발리앙 이벨린은 이미 마흔여섯 살이었다.]


이미 보두앵 4세의 충직한 신하였고, 나이도 37~46세니까 실제로 영화 속의 고프리가 발리앙 이벨린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로 이미 대형 스케일의 전쟁 신을 촬영한 경험이 있는 올랜도 블룸이 어울리는 배역이었으리라. 좀 더 젊고 잘생긴 주인공이어야 관객들이 영화를 볼 테니 적절한 선택이었다. 실제 역사도 재미있고, 영화도 재미있고, 둘을 대조했을 때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도 재미있다.

아버지의 아내와 결혼까지 시켰으니 왕의 심복인데, 뒤늦게 알게 된다는 설정을 만든 작가도 대단하다. 분명히 여러 문헌을 참고하고,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텐데.

영화를 위한 왜곡도 많지만 중간중간에 역사적 진실들을 언급해주는 장면도 많다. 고프리 기사단이 프랑스 마을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살라딘의 성장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화 중에 살라딘의 이집트와 중동지역 통일 과정을 말한다. 살라딘에 관한 기록물은 매우 방대하여 다루기 어려우므로 영화에 나오는 부분만 서술할 것이다. 가급적 직접 책을 읽기를 권하고, 힘든 사람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만화면서 깊이가 있어 추천한다. 4권 후반부에 살라딘이 등장하는데, 앞으로 출간될 5권에 킹덤 오브 헤븐과 동시대의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자막이 없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무슨 장면인지 바로 알 것이다) 십자군이 십자군을 공격하는 장면이나, 예루살렘이 어딘지도 모른 채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렬 장면은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 애초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전쟁 목적도 자신의 권력 확보와 비잔틴의 그리스 정교를 산하로 통일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참여한 십자군 기사들도 종교적 신념보다 한몫 챙기려는 의도가 더 강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원정이었다. 어떠한 전쟁이든 합리화될 수는 없지만, 십자군 전쟁은 원인도 과정도 어처구니없는, 서유럽이 얼마나 어리석었고 종교적으로 타락했었는지를 알려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부시 정권 때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당시 시대의 십자군의 복장과 성채 등 그림 자료들은 풍부했다. 그러한 자료를 참고하여 소품과 연출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그래픽을 동원하여 만든 성채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놀랍도록 잘 만들어졌다. 그중 전투씬의 가장 핵심인, 다빈치 코드에도 등장하는 템플 기사단(성전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성 요한 기사단)의 색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실제로는 유사한 성격으로 구성만 다른 기사단이었는데 영화에서는 대립 구도로 만들었다. 자세하게 두 기사단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인용한다.


[성 요한 기사단은 검은 옷의 가슴에 흰 십자 모양만 남기고 나머지를 붉은색으로 염색한 천을 붙이거나, 검은 옷 위에 흰색 십자를 붙여 제복으로 삼았다. 전투를 나갈 때는 흉갑을 착용하였는데, 템플 기사단이 그 위에 흰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를 붙인 옷을 걸쳤다면 붉은색 바탕에 흰색 십자는 성 요한 기사단 기사들의 표시였다. 또한 시내를 걸을 때, 즉 일하지 않을 때에도 템플 기사단의 기사들은 가슴에 커다란 붉은색 십자가 있는 흰색 제복을 입고 기세 등등하게 가슴을 펴고 걸었다. ‘템플 기사단’의 기사들은 유니폼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런데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은 검은색이나 갈색의 평범한 수도복을 걸칠 뿐이어서, 가슴 부분에 조그맣게 수놓은 흰색 십자로 간신히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템플 기사단은 창설 때부터 이교도 이슬람의 괴멸을 전면에 내세웠던, 오로지 전투만을 위한 집단이었다. 본부를 둔 곳은 예루살렘 안에서도 기원전 유대 시대에 유대교 신전과 솔로몬의 왕궁이 있었던 장소로, ‘템플(성전)’ 기사단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수도복은 흰옷의 가슴에 붉은 십자를 붙인 유니폼이 다였다. 가난을 감수하고 신에게 절대복종을 서약하며 평생 독신을 지킨다는 수도사의 3대 서약은 다른 수도사들과 다르지 않지만, 템플 기사단의 단원들에게는 여기에 ‘이교도 박멸’이 더해진다.]


[속세에 있던 시절의 사회적 지위를 보면, 템플 기사단의 단원들 대부분은 봉건제도가 지배하던 유럽사회의 하층에 속한 남자들이었다.]

[성 요한 기사단이 창설된 시기는 템플 기사단보다 반세기 이상 이르다. 아직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 서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오는 그리스도교도를 위해,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국가 중 첫 번째 주자였던 아말피의 상인들이 의료를 베푸는 병원을 건설한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러다가 템플 기사단이 창설된 1118년, 즉 중근동의 십자군 세력이 수세로 돌아선 시기부터는 의료에 더해 이교도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내세운 기사 집단으로 이행한다.]


[템플 기사단과 다른 점은 기사를 지원하는 자 중 귀족 출신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봉건 제후의 차남이나 삼남, 또는 그 일족에 해당하는 중세 유럽사회의 상층부에 속하는 남자들로 한정한 것이다.

사회 상층부인 귀족으로 태어난 그들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교양은 흔히 균형감각으로 이어졌다. 자기 통제에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이 종종 폭도 같은 모습을 보이던 템플 기사단과 이들을 구별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면서 보면 왜 선역인 티베리아스 수하로 성 요한 기사단이, 호전적인 레이날드와 기드 뤼지냥의 수하에 템플 기사단이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공격적/수비적, 하층민 기사/상층부 기사로 구분이 된다. 단순무식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템플 기사단은 영화 속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템플 기사단은 거의 모든 단원이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런데 병원 기사단은 모두 유럽인, 즉 이슬람교도들의 호칭으로 프랑크인인 건 공통적이었지만, 출신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렇지만 십자군의 성격으로 보아 역시 프랑스 태생이 많았다. 그래서 프랑스 태생이 태반이었던 템플 기사단의 경우는 기사들 사이에서 독일어나 이탈리어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아주 자연스럽게 공용어와 일상어 모두 프랑스어가 되었을 것이다.]

오프닝을 프랑스로 한 것이 십자군 구성원 전반의 성격 때문이라는 근거다.

영화에서 보두앵 4세의 심복 티베리아스 역으로 나오는 제러미 아이언스는, 극 중 이름이 잘못되었다. 실제 이름은 레몽 3세로, 트리폴리의 백작이었다. 티베리아스는 그가 다스렸던 영지의 이름이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매부리코, 아랍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데다 이슬람의 경전까지 열심히 읽었다.]


아랍의 이븐 알 시르는 기록에서, 
[그 시기 프랑크인들 가운데 그처럼 담대하고 학식 깊은 인물은 없었다. 그는 바로 생 질의 후손이자 트리폴리스의 지배자 레몽 이븐 레몽 알 산지리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야심이 너무 컸고 왕이 되고 싶은 욕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섭정을 다졌으나 곧 권력에서 밀려났다. 그 일이 얼마나 원통했는지 그는 살라흐 알 딘에게 친서를 보내 자신의 편에 서서 그가 프랑크인들의 왕이 되게 도와달라고 했다. 살라흐 알 딘은 그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어 무슬림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트리폴리스 기병들을 즉시 석방하였다.]


보두앵 4세의 충직한 신하는 맞았으나 사후, 권력욕이 너무 강해서 왕이 되기 위해 살라딘과 친하게 지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내의 반목을 예의 주시하면서 레몽이 승기를 잡자 전폭적인 지지를 한다.

후에 살라딘과 제휴를 맺다가, 다시 전쟁 이후에는 십자군에 합류하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이 점 때문에 영화에서도 발리앙에게 떠넘기고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책임감이 결여된 인물로 만든 것 같다.

영화에서 잔인한 악역이자 무능한 왕이 되는 기 드 뤼지냥(마톤 소카즈)과 시빌라 공주(에바 그린)는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 캐릭터이다. 남자들만 즐비한 대부분의 과거 역사를 그대로 만들면 너무나 무료하기에, 항상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소설과 팩션 영상물에는 주인공과 관계되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주인공과 대립되는 악역,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해야 흥미 있는 전개가 가능하다. 그 때문에 가공된 두 인물인데, 생각해보니 마땅히 실제 역사 내에서 바꿀 만한 인물이 없다. 동양적 아름다움을 겸비한 에바 그린은 딱 맞는 캐스팅으로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는 이미 마음이 완전히 떠난 남보다 못한 부부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 속의 두 사람 관계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시빌라는 아직 상중인데도 재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상대는 푸아티에 태생의 프랑인으로 얼마 전부터 야파에 영지를 갖게 된 스물일곱의 기 드 뤼지냥이었다. 대단한 미남 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볼 게 없는 남자라는 것이 예루살렘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보두앵 4세는 한 살 위의 누이에게 이 결혼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전한다. 하지만 열 살 위에 미남에게 반해버린 시빌라는 나더러 수녀가 되라는 거냐고 끝까지 우기며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2년 후 동생은 뜻을 굽히고,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 결혼식이 거행된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에게는 안팎으로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재미있다. 이슬람 쪽에서도 기록이 있는데 이븐 알시르,

[어린 왕의 모친은 서유럽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기라는 프랑크인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왕의 모친은 왕이 죽자마자 기와 결혼식을 올리더니 남편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녀는 총대주교와 사제, 수도사, 성전 기사단과 제후들을 불러 모아놓고 자신은 기에게 권좌를 넘겨주기로 했으니 그에게 복종을 서약하라고 말했다. 레몽은 이를 거부하고 살라흐 알 딘과 손을 잡기로 했다.]


영화에서는 시빌라가 동생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한 살 많은 누이로 상당히 철없는 인물로 보인다. 그 전 남편인 몬페라토 후작이 죽고 상 중에 단지 잘생겼다는 이유로 기에 반해 결혼하려고 조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재미있다. 십자군 전쟁 당시 모습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면 아마 블랙 코미디 장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에서 한심한 악역이지만 나름의 카리스마가 있던 기 드 뤼지냥은 실제로는 한심하기만 한 인물이었다.


[누이 시빌라와 결혼한 기 드 뤼지냥이 잘생긴 외모 외에는 장점이 없는 남자라는 것은 날이 지남에 따라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시빌라는 왕 사후 남편을 자신과 함께 공동 통치자로 임명해달라고 남동생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보두앵도 어쩔 수 없이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체재 중인 성채가 적에 포위된 것을 알고 달려온 보두앵의 도움을 받고도, 함께 적군을 추격하자는 보두앵의 말에 기 드 뤼지냥은 성채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하지 못했다.]


외모는 반반했으나 무능력하기 짝이 없고,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능력이 전무한 인물이라고 언급한다. 강경파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로 샤티용과 같이 이슬람 상인을 공격하는 장면은 거짓이고, 그냥 이용당한 인물이라 해야 옳다.

남편이 죽자마자 다른 남자한테 반한 철부지 같은 모습을 변형하여 불륜에도 전혀 망설임이 없는 여장부 캐릭터로 만들어낸 듯하다. 그러고 보면 과거 중세시대 때 재혼이 활발한 것이 남녀 간의 만남에 상당히 관대한 것 같다. 가톨릭의 교리가 존재했음에도 어떻게 가능했을까. 유교적 사고로는 한 사람에게 순정을 다 바쳐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서구는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관대한 듯 생각된다.

아무튼 시빌라 공주는 실제로는 발리앙과 크게 연관이 없다.

실제로는 이 장면이 영화 끝날 때까지 이어져야 정상인 것이다.


[보두앵은 누이와 이 남자의 결혼을 무효로 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파의 영지에 틀어박힌 시빌라와 그녀의 남편은 대주교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이 커플을 왕이 얼마나 못마땅해했는지 알 수 있다. 보두앵이 나병으로 시력을 잃자 기 드 뤼지냥이 섭정을 했는데, 1183년 9월에 살라딘이 대병력을 이끌고 베트셰안을 약탈했다. 살라딘이 도발했으나, 기 드 뤼지냥은 병력을 갖고도 거리를 유지하고 방어만 했다. 결국 살라딘은 퇴각했지만, 보두앵은 기를 겁쟁이라고 비난하고 섭정 지위를 박탈했다. 그리고 시빌라와 이혼을 추진했는데 이때부터 기 드 뤼지냥은 노골적으로 보두앵에게 불복종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말 안 듣는 영화 속의 이미지와는 일치한다.

영화에서 가장 멋있었던, 실제 역사에서도 멋진 보두앵 4세. 처음에 이 영화가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것인지 모르고 봤을 때는 작가의 상상력을 감탄했는데, 사실이어서 더 충격을 받았다. 때로는 역사가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나병이 차츰 외모까지 무너뜨리기 시작하자 보두앵 4세는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은가면을 쓰게 되었다.]

은가면을 쓴 것도 실제로 기록에 존재한다. 당시 정세와 문둥병을 앓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재위 기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통치했다.


[딸 시빌라가 있었지만 보두앵보다 겨우 한 살 위였기 때문에, 사위를 맞이해 유사시를 대비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게다가 보두앵은 아직 소년임에도 수세로 돌아선 십자군 국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총명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감수성도 풍부한 젊은이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명쾌하게 이야기하고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행동하며 판단을 내려야 할 때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분명히 말하는 왕자를, 중근동에 사는 그리스도교들은 오랜만에 나타난 이상적인 지도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보두앵 4세는 죽기 전까지 11년간의 치세 기간 내내 병 때문에 왕궁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의 대군을 적으로 돌려 정면충돌하는 것을 될수록 피한다는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에도 방어의 기개와 그에 투입할 힘이 있다는 것을 적에게 보여주기 위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적이 경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세야말로 억지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마스쿠스 근처까지 군대를 이끌고 간 적도 있고, 이집트까지 진격한 적도 있었다. 거의 매년 예루살렘을 떠나 출격한 셈이다.]

[전장에서는 항상 말을 타고 최전선에 섰고, 적이 공격해와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는 안장에 자기 몸을 묶어서라도 지휘를 했다.]


[적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왕을 선두로 한 580명의 기병이 한꺼번에 살라딘의 군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 지나친 만용에 살라딘의 친위대인 쿠르드 기병대까지 도망치기 시작했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살라딘군도 도망쳐, 하마터면 술탄이 포로로 될 뻔한 참상을 남기고서 이 몽기사르 전투는 끝이 났다. 군대를 물린 일은 있어도 도망친 적은 없었던 살라딘이 서른아홉 살에 처음으로 맛본 패전이었다.]


영화에서는 아파서 계속 누워있는 병약한 군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픈 몸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할 정도로 용맹한 군주였다. 영화 중반부에 레이놀드 샤티용의 영토로 살라딘이 공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몽기사르 전투'의 장면을 따온 것 같다. 영화에선 발리앙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보두앵이 살라딘과의 대화로 끝나지만, 실제는 보두앵이 매우 적은 수의 병사로 살라딘을 대패시킨 전투다. 실제로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이 만나서 이야기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장면에서 보두앵과, 당시 예루살렘과 살라딘의 전반적인 성격을 아울러 표현한 것 같다.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의 이슬람 대책은 일관되게 가능한 한 전면적인 대결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누레딘의 지배에 마지못해 복종해온 이슬람 측 영주(아미르)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십자군 국가와의 경계에 영지를 갖고 있다. 즉 그들은 십자군 측 상인과의 교역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이슬람 측 영주들은 십자군 측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바라지 않았다.]


안달루시아의 여행자 이븐 주바이르는 전시 상황에 대상들이 프랑크인들의 영토를 지나 카이로와 다마스쿠스를 자유로이 왕래하는 모습에 놀라워했다.


[그리스도 교도들은 지나치지 않은 세금을 무슬림들에게 부과. 그리스도 교도 상인들도 무슬림 영토를 지날 때에는 그 대가를 지불. 이들 사이의 협정은 완벽. 전쟁 당사자들은 전투, 민간인들은 평화”]


실제로 보두앵 4세 통치 당시에는 서로 평화 협정이 잘 유지되었다. 세금만 납부하면 본래의 신앙을 인정해주는 것은 이슬람의 방식이다. 오늘날 언론 보도로 인하여 중동의 아랍 국가는 늘 테러만 일삼고, 전쟁을 터뜨리는 분쟁 지역으로만 인식되어있지만 유일신인 알라를 믿으며, 약한 이를 보살피라는 꾸란(코란)의 교리는 크리스트교와 별 차이가 없다. 영화에서도 대화를 통해 차이가 없음을 인정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던 것은 이 시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쟁 중 평화가 있었던 시기. 서로 이해하고 타협했기에 가능한 평화.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은 그래서 위대하다.

[막 열 살이 된 소년이 이 난치병에 걸렸음이 밝혀진 것은 왕자가 또래 소년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였다. 깃털 펜촉으로 손이나 발을 찔러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를 겨루는 놀이였는데, 왕자 보두앵은 아무리 날카로운 펜촉으로 찔러도 전혀 아파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발라 공주의 아들 보두앵 5세도 문둥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인데, 문헌 상에는 보두앵 5세가 나병은 아니었다. 이 장면도 실제 보두앵 4세의 이야기를 더 극화시키기 위해 보두앵 5세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관객들이 잘 못 알아볼까 봐 걱정했는지 보두앵 5세의 나병 암시 장면은 세 번이나 나오는데, 불에 손을 갖다 대어 그을리는 첫 번째 장면, 그리고 도장 잉크가 손에 닿는 장면, 마지막으로 확인차 바늘로 발을 찌르는 장면이 나온다.

보두앵 5세의 모습으로 보두앵 4세의 어릴 때 어땠는지 짐작하면 되겠다.


[보두앵 4세는 낙담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몬페라토가 세상을 떠난 후 태어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열여섯 살이 된 예루살렘 왕은 누이 시빌라가 이 아이를 키우는데 전념해주기를 염원하면서, 아이에게 자기와 같은 보두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래지 않아 왕위에 오르게 될 이 소년의 섭정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와 발리앙 이벨린에게 맡기기로 했다.]

[1183년 11월 20일,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는 보두앵 5세라는 이름으로 공동 통치자에 임명된 여섯 살 소년을 맞이하는 대관식이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다.]


[1185년 3월 16일,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이미 공동 통치자 자리에 있던 여덟 살의 보두앵 5세가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이 소년 왕은 어머니가 양육에 불성실했던 탓인지 병약하여 1년 후인 1186년에 죽고 말았다.]

기록에 보면 보두앵 5세는, 보두앵 4세가 죽기 전에 이미 대관식을 치렀다고 하니 영화와 다르다. 일찍 죽은 것은 맞지만 시빌라가 직접 귀에 독을 넣어 안락사시키지도 않았다. 무책임하게 자식을 방치했던 것 맞는 것 같다. 시빌라는 남편 기 드 뤼지냥을 왕위에 올릴 욕심만 강했던 듯하다. 또 다른 기록에는 1186년 8월에 보두앵 5세가 계승했다고 돼있는데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처음에는 기 드 뤼지냥이 섭정을 하다가 보두앵 4세가 레몽 3세로 바꾼 것은 일치한다.

보두앵 5세도 죽고, 예루살렘에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는데 시빌라가 여왕에 오른 후, 대부분 신료들이 기 드 뤼지냥을 반대하여 시빌라는 이혼하라는 권고를 받아들인다. 대관식이 끝난 후에 곧바로 다시 재혼을 해서, 신료들이 막을 틈도 없이 결국 기 드 뤼지냥이 왕에 오른다. 시빌라와 기 드 뤼지냥을 주인공으로 별도의 코미디 속편 영화를 만들어도 재미있을 듯하다.

보두앵 5세 사후, 레몽 3세는 살라딘과 독자적으로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은 크게 두 세력으로 양분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라딘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게 된다.

가장 악랄한 역할로 살라딘에 손해 무참히 처형되는 샤티용의 레날은 실제 한 행실에 비해 영화에서는 극히 일부만 보여준 것이었다. 살라딘을 제외하고 가장 기록이 많았는데, 이슬람 측에서도 가장 경멸했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르노 드 샤티용은 1125년 전후 프랑스 북부 샹파뉴 지방의 소영주 가문에서 분가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1147년 제2차 십자군 때,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군대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십자군이 실패하고 유럽으로 돌아간 후에도 중근동에 남는다.]


[키프로스를 함락하고 시리아 북부 지방에서 약탈을 자행하다가 르노 드 샤티용은 누르 알 딘의 아들이 1175년에 풀어줄 때까지 16년간을 알레포에서 옥살이했다. 전보다 훨씬 광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잔인해진 아르나트가 혼자 저지른 일이 수십 년 전투와 학살보다 더 큰 증오를 아랍, 프랑크인들 사이에 심어 주었다.]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로 통하던 안티오키아 공작령의 여 상속인이었다. 스물네 살의 샤티용은 자기보다 꽤 나이가 많은 이 여자에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결혼까지 한다.]

[위인 보에몽 3세가 통치하는 안티오케이아의 국정을 장악할 수 없어서 예루살렘 왕국에 자리잡음. 강력한 요새 카라크, 샤우바크가 포함된 요단 동쪽 지역을 지참금으로 가져오는 젊은 과부와 결혼했다. 성전 기사단뿐만 아니라 새로 동방으로 진출한 여러 기사와 결탁했다.]


[살라딘에게 유일하게 패배를 맛보게 한 몽기사르 전투에서도, 쉰두 살의 샤티용은 열 여섯 살의 문둥이 왕을 선두로 삼아 1만 3천 명의 살라딘 군대에 돌격한 580명의 기병 중 한 명이었다.

이런 대승에도 보두앵 4세는 평상심을 잃지 않았지만, 샤티용은 그만 우쭐해지고 말았다. 이슬람교도를 상대로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1180년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사이에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협정을 맺었다. 메카로 향하던 어떤 부유한 아랍인 대상이 시리아 사막을 건너다가 르노의 공격으로 물자를 빼앗겼다. 살라딘은 보두앵 4세에 항의했으나, 왕은 제후를 감히 제재하지 못했다.]


[1182년 가을, 르노가 메카를 약탈할 결심을 했다. 엘라트에 해적들을 앞세우고 약탈했다. 라비그가 프랑크 원정대에게 습격당했다. 르노의 부하들이 지다로 향하던 무슬림 순례자 배를 침몰시켰다.]


이븐 알 아시르,

[모두가 경악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이제껏 프랑크인 상인이나 전사들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르노는 자신의 영토로 귀환했으나, 부하들은 살라딘 동생 알 아딜에게 섬멸당했다. 일부는 메카에서 참수당했다.]


[살라딘과 보두앵 4세 사이에는 자주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를 평화로 이어지는 강화가 아니라 일시적은 휴적으로 생각한 건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필요가 없어지면 둘 다 아주 간단하게 조약을 파기해버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살라딘과 보두앵 둘 다 존중하며 계속 유지해온 협정이 있었다. 그것은 서로 상대측 순례자 일행은 손을 대지 않는다는 협정이었다.

그것을 샤티용이 깨버렸다. 샤티용은 도적 두목으로 일변한다. 강도 행위는 처음에는 소규모였지만, 눈 깜작할 사이에 도적단의 규모가 커지고 순례단을 습격하는 횟수도 많아졌다. 한 번 해보니 이것만큼 돌아오는 것이 많은 군사행동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보두앵 4세는 이를 묵과할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차례 불러서 엄중하게 질책을 했는데, 이 왕을 보좌하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와 발리앙 이벨린도 샤티용을 휘어잡을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이런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도 행위를 계속했고, 1181년 다마스쿠스에서 남하하는 순례단을 습격하여 약탈했을 때는 정도가 너무 심해서, 살라딘이 엄중한 항의의 뜻을 보내왔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왕과 맺고 있던 휴전조약을 파기하겠다는 뜻까지 전해왔다.]


[그러나 2년 후 샤티용은 육상의 강도 행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카바에서 선대를 편성해 홍해로 나아가 해적 행위까지 강행한다. 1186년, 샤티용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뤼지냥의 대관식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그런 것에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살라딘은 곧바로 막 왕에 취임한 뤼지냥에게 엄중한 항의의 뜻을 표명했다. 샤티용이 약탈한 사람과 짐을 돌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온 것이다.

살라딘은 이때만큼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코란에 맹세하건대, 그 개를 붙잡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겠다!”]


인용만으로 설명이 넘친다. 인자한 살라딘마저 폭발시킨 그를 사람들은 "고삐 풀린 개"라고 불렀단다. 레이날드의 분량만큼은 기와 함께 다닌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사실이고, 더 부풀리거나 과장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영화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는데, 감독 스스로도 이 레이날드를 경멸했기에 가급적 죽는 부분은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깨뜨린 장본인이었고, 크게 봐서는 십자군 전쟁의 주범, 오늘날 전쟁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족속들을 대신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살라딘은 찬물을 가져오게 해 먼저 왕인 뤼지냥에게 권했다. 그러나 뤼지냥은 마시지 않고 옆에 서 있던 샤티용에게 잔을 건넸다.

이를 본 살라딘은 버럭 화를 냈다. 너 같은 놈에게 줄 물은 없다고 외치며, 살라딘은 샤티용을 포로 대열에서 끌어내 칼로 베어버렸다. 곧바로 달려온 술탄의 근위병이 샤티용의 머리를 잘랐다.]


실제로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하는 이마드 알 딘 알 아스파하니의 기록,

[살라흐 알 딘은 프랑크 왕을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했다. 아르나트(레이날드)들어오자 술탄은 그를 프랑크 왕 곁에 앉힌 다음 그가 저지른 짓을 조목조목 따졌다. "걸핏 하면 어길 맹세를 한 것이 대체 몇 번이었소? 지키지도 않을 조약에 서명은 또 몇 번이나 했소?"르나트는 통역을 통해 대답했다. " 그리 행동하는 게 왕들 아니오? 나도 그렇게 했을 뿐이오!"그때 기 왕이 목이 마른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꼭 술에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었으나 그의 표정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살라흐 알 딘은 그를 따뜻한 말로 안심시키고 시원한 물을 가져오게 하여 그에게 주었다. 왕이 물을 받아 마시고 남은 물을 아르나트에게 주자 그도 목을 축였다. 이 모습을 본 술탄이 기 왕에게 말했다. "당신은 저 자에게 물을 나눠주어도 되는지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았소. 그러고 보면 내 그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아도 되겠구려."]


아랍 전통에 따르면 포로에게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그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의미했다.


이마드 알 딘,

[이 말을 한 직후 술탄은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그곳을 떴다. 포로들만 두려움 속에 남겨졌다. 술탄은 부대가 귀환하는 것을 살펴본 뒤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술탄은 그곳으로 아르나트를 데려오게 한 뒤 몸소 칼을 뽑아 들고 아르나트에게 다가가서 그의 목과 견갑골 사이를 내려쳤다. 아르나트가 바닥에 쓰러지자 우리는 그의 목을 벴다. 시신을 프랑크 왕 발치로 끌고 가니 그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왕이 그처럼 떠는 것을 본 술탄은 자상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이 자는 자기가 저지른 만행과 배신 때문에 죽은 것이오!"]


실제로 왕과 나머지 포로들은 무사했다. 다만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르노 드 샤티용과 운명을 함께 했다.

살라딘이 끝까지 평화를 유지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슬람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는 메카이며, 그다음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장소인 메디나, 마지막이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모셔져 있는 예루살렘이다. (한편 그리스도교에게 중요한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으며 죽었다가 부활한 예루살렘이 첫 번째이고, 그다음이 예수가 후계자로 지명한 성 베드로가 순교한 땅인 로마다. 그리고 세 번재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십자군 측에 가장 큰 심리적 타격을 주려면 그들 최고의 성도인 예루살렘을 노려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영화에서는 매우 관대하게 나오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정복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본래 있던 곳으로 쫓아 보내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 했다.


[그렇게 내(바하 앗 딘)가 서 있는데, 살라딘이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신의 가호로 팔레스티나의 나머지 전부 차지하게 되면, 영토를 분할하고 나의 뜻을 전하는 유언장을 만든 다음 머나먼 프랑크족의 나라까지 배를 타고 그들을 추격할 생각이다. 그래서 나의 목숨을 걸고 이 지상에서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전부 제거하겠다.]


관대할 때도 있었지만 무자비할 때는 과감했던 성격이었다. 협정을 맺고, 추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프랑크인들을 순순히 해방시켜주는 것도 훗날을 기약하는 치밀한 계획인지, 본래의 천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단력 있고 대담한 성격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영화에서 레이날드의 영토를 공격하는 것은 실제로 있었다. 1183년 11월에 카라크 성채 주위에 투석기를 설치해서 공격했다. 이때 레이날드의 의붓딸이 결혼식을 했는데 미리 살라딘은 신혼부부가 머물 거처를 파악하여 그곳은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1186년 9월 샤티용의 레날이 시리아에서 이집트로 향하는(또는 메카로 향하는) 무역상을 공격했고, 기 드 뤼지냥이 약탈품을 살라딘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지만 무시하였다. 살라딘은 먼저 레이날드에게 사절을 파견하지만 만남 자체가 거부당하고, 다시 기 왕에게 파견하지만 기는 발뺌한다. 영화에서 사신을 처형하는 장면은 가공한 듯 보인다.


분노한 살라딘이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이때 레이날드는 직접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한다). 그전까지 이슬람은 혼란한 상황이었고, 상대적으로 십자군은 단결되어 있었으나 상황이 뒤바뀌어 살라딘을 중심으로 이슬람은 결집하고 예루살렘은 레몽 3세와 기 드 뤼지냥 세력으로 양분되어 역 십자군 전쟁의 상황이 되었다.

당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 드 뤼지냥은 레몽 3세를 제거할 기회로 생각하여 당시 레몽의 아내가 지키고 있던 티베리아스를 공격할 준비를 한다. 이에 레몽은 살라딘에게 동맹을 제의하는데, 살라딘은 동의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할 호기로 보고 군대를 움직인다.


그 후 1187년 5월 1일, 살라딘 부관이 지휘하는 7천 명 기병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십자군 기사단 수백 명을 몇 분만에 몰살시킨다.


이븐 알 아시르,

[이 패배 소식을 접하고 경악한 프랑크인들은 그들의 총대주교와 사제, 수도사를 비롯하여 많은 기사들을 레몽에게 보내 살라흐 알 딘 과의 동맹을 신랄히 비난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셨나 보오. 그렇지 않다면 작금에 벌어진 사태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오. 무슬림들이 당신의 영토를 지나도록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소. 그들은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기사들을 학살했으며 포로로 끌고 가지 않았소. 그런데도 당신은 그에 항의조차 않는구려."

트리폴리스와 티베리아스의 백작 개인의 병사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또 총대주교는 그를 파문하고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겠다고 협박했다. 레몽은 왈칵 겁이 들었다. 그는 무조건 용서를 빌었고 자신의 처사를 회개했다. 그러자 그들은 레몽을 용서했고 그와 화해한 뒤 레몽에게 군사들을 왕의 휘하에 넣어서 무슬림과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백작은 그들과 함께 떠났다. 프랑크인들은 그때부터 군사들을 모았다. 아크레 근처에 모인 기병들과 보병들은 사푸리야 마을을 향해 진군했다.]


[살라흐 알 딘이 티베리아스를 점령하고 불은 지른 것을 안 프랑크인들은 회의를 소집했다. 당장이라도 그리 달려가서 무슬림들과 싸워 그들이 성채를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들 주장했다. 그때 레몽이 나섰다. "티베리아스는 내 영토요." 그가 말했다. "바로 내 아내가 지금 포위되어 있소. 허나 살라딘의 공격이 거기서 그친다면 나는 그 성채가 함락되거나 아내가 사로잡히는 것도 받아들인 참이오. 왜냐하면 이제껏 내가 무수히 보아 왔던 어떤 무슬림 군대도 지금 살라딘이 모은 것처럼 많지도 강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니 지금은 그와 겨루는 일을 피합시다. 티베리아스의 탈환은 후일을 기약하고 포로들을 위해 몸값을 지불합시다." 그러자 카라크의 영주인 아르나트 왕이 대답했다. "지금 당신은 무슬림 군대의 위력을 얘기해서 겁을 줄 심산이군. 당신이 그자들을 좋아하고 그자들과의 우정에 더 쏠려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니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있겠소? 그들 수가 많다고 했는데 이렇게 묻고 싶소. 불이 타는 데 나무의 양이 무슨 상관인가. 나무가 많다고 불이 타지 못하는가." 그러자 레몽 백작은 말했다. "난 당신들 편이오. 당신들의 원하는 대로 당신들 편에서 싸울 것이오. 허나 당신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게 될 것이오."]


상황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레몽 3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십자군, 예루살렘 안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무능한 인물들이었다. 보두앵 4세의 심복이었기에 영화에서는 무난하게 처리해준 듯하다. 레몽 3세의 아내 에시바는 발리앙 이벨린의 누이였다.

6월,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 1만 2천 명의 기병을 포함한 4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킨다. 영화에서는 40만 명이라고 언급하지만 과장된 것이다.

6월 26일, 다마스쿠스 수비를 장남에게 맡긴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를 떠나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7월 3일에는 1만 2천 명 프랑크 군대가 이동한다.

[말을 타고 가는 뤼지냥 옆에는 아코 주교가 받쳐 든 성십자가가 있었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해방했을 때 발견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책형을 당한 십자가로 여겨져 중요한 전투에 늘 동행했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싸우는 십자군 병사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전장의 후방에 있는 성십자가를 안치해둔 붉은색 천막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루살렘 왕인 뤼지냥 이하 막료들이 있었다.]

실제 예수가 처형당했다는 십자가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천 년이 지난 나무판이 그대로 보존될 가능성이 희박하니 가공된 것이라 판단한다. 영화에서도 전쟁 씬에 십자가가 등장한다. 만약 존재했다면 저렇게 화려하지 않고 단순한 나무 십자가였을 것이다. 십자군에게는 정신적 지주로 상당한 힘을 발휘했으리라.

살라딘의 군대는 과실수가 즐비하고 티베리아스 호수가 있는 곳에 진을 쳤다. 그 북쪽에 봉우리 두 개가 삐죽하게 튀어나와있었고 현지 명칭으로 '히틴의 뿔'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을 따서 후에 전투의 이름도 '히틴(하틴) 전투'가 되었다.


[맨 뒤에는 발리앙 이벨린의 부대와 템플 기사단을 주체로 한 종교 기사단의 기병 집단이 진군했다.

살라딘의 생각은 적군 병사가 물을 입에 넣기 전에, 즉 물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사방에서 포위해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7월 3일 밤 서둘러 후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인데, 이때는 이벨린과 종교 기사단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성공하지 못했다. ]

정확하게 언급하진 않지만 심한 갈증을 느끼고 지친 모습으로 행군하는 모습에서 하틴(히틴) 전투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살라딘과 십자군 전쟁에서의 하이라이트는 이 장면인데, 영화는 예루살렘 공성전에 더 비중을 두었다.


한 여름에 팔레스타인 땅은 용광로처럼 뜨거웠고 연못이나 우물도 없는 데다가 작은 물길마저 모두 말랐다. 7월 4일에 포위된 프랑크 병사들은 갈증을 참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호수로 가려고 시도했으나 살라딘의 공격에 꼼짝없이 당했다.

도망에 성공한 병사들은 3천 명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레몽 3세와 발리앙 이벨린은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레이날드가 참수당한다.


이븐 알 아시르,


[백작이 탈출하자 프랑크인들은 포로로 잡혔다. 무슬림들은 마른 풀밭에 불을 놓았고 바람에 날리는 연기가 기사들의 눈에 들어갔다. 뙤약볕 아래서 목은 타고 불꽃과 연기에, 거기다가 전쟁의 불길까지 가세하다 보니 프랑크인들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길이 목숨을 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어찌나 필사적으로 버티는지 무슬림들도 그 기세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하틴 전투에서의 살라딘의 전략, 전술은 21세기 미국 펜타곤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1. 누레딘의 유산인 시리아와 이라크뿐 아니라 이집트까지 통합해 십자군 세력을 북, 남, 동으로 에워싼 다음 결정타를 날린 것.

2. 안티오키아 공작령을 중립 상태로 만들어 중근동의 십자군 세력을 분리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전투에 예루살렘 왕국 한 나라만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 것.

3. 적군이 예루살렘을 노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당황한 십자군 측이, 비교적 유리하게 이슬람 군과 싸울 수 있는 성채도시에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평원으로 몰려나와 전투를 벌이도록 유도한 것.

4. 대군을 투입함으로써, 중근동의 십자군 영토에 수없이 세워져 있던 십자군 측 방어 거점인 성채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것.

5. 적을 물 부족 상태로 만든다는 기본 전략 아래, 살라딘이 바라던 지역과 방식으로 적군을 유인해내는 데 성공한 것.

6. 전투의 유일한 이점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정황을 단숨에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6월 26일 다마스쿠스에서 출진한 뒤 7월 4일 결전을 벌일 때까지 고작 9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


하틴 전투 이후 살라딘은 티베리아스, 아크레 항, 갈릴리, 사마리아, 사이다를 차례로 정복하고, 티레를 놓아두고 아스칼론, 베들레헴까지 정복한 후 9월 20일 예루살렘 성벽 앞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서 도시를 무혈 점령하기 위해 뤼지냥과 템플 기사단 단장 제라르를 성벽 앞으로 끌고 가는데 상대편 병사들은 조롱과 경멸의 욕설만 했다고 한다. 기 왕을 당나귀에 태워 굴욕을 주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장면이다.

기는 살라딘이 석방해 준 이후 7년을 더 살았다. 발리앙과의 결투씬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견고하지 않았다. 성벽은 대략 4Km 정도였고, 기 드 뤼지냥이 하틴 전투에 방어병력까지 총동원해서 성 내에 쓸만한 병사도 적었다. 외부 원군도 없는 상태였고 성에서 지휘할 사람도 없는 곧 함락될 성이었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는 약 6만 명 정도가 살았고 이 중 4분의 1은 유럽에서 온 그리스교도 또는 그 사람들을 조상으로 둔 유럽인이었고 나머지 4만 5천 명은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파의 동방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도 였다. 구성상 당연히 이슬람교도들을 살라딘을 방어하는데 동원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그대로 살렸어도 충분히 멋있었을 진짜 발리앙 이벨린의 활약이 시작된다. 아마 시나리오 작가는 이 부분에서 영화적 영감을 얻고 집필할 결심을 세웠을 것이다.


[하틴 전투의 전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이벨린은 부하 병사들과 함께 티루스로 도망쳤는데, 그의 아내와 아이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티루스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모든 길에 살라딘의 병사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벨린은 능숙한 아라비아어로 쓴 자필 편지를 살라딘에게 보냈다. 처자식을 예루살렘에서 구해내고 싶으니 티루스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통행허가증을 살라딘의 이름으로 발급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살라딘은 이슬람교 이맘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프랑크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 무장으로서 이벨린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살라딘이 단 한 번 패배를 맛본 몽기사르 전투에서 문둥이 왕 보두앵 4세가 승리한 것도 이벨린의 감투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틴 전투의 전장에서 적의 공격이 집중된 후위 부대에 있었으면서도 부하들을 거느리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도 예사로운 무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조건을 붙였다. 예루살렘에서는 하루밖에 머물 수 없고 처자식을 데리고 곧장 티루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공포에 떠는 주민들이었다.

발리앙 이벨린은 이들을 버려두고 자기 혼자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살라딘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약속을 깨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예루살렘 성벽을 사이에 두고 코앞에 진을 치고 있던 살라딘으로부터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이벨린의 사정을 이해했으니 약속을 깨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벨린의 처자식이 티루스까지 가는 데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허가증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이처럼 신사적으로 행동한 탓에 살라딘은 손쉽게 함락할 수 있었을 예루살렘에 괜한 공을 들이게 된다.

[이벨린의 지휘에 따라 예루살렘 방어전을 치를 수 있는 전사는 60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최소한 3만 명이 공격해올 게 분명한 살라딘에 맞설 주요 방어 전력이 고작 60명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살라딘과의 결전에 임할 때 예루살렘 방어 요원까지 총동원한 뤼지냥의 책임이었지만, 그때 뤼지냥이 예루살렘 방어를 맡겼던 대주교는 우왕좌왕하기만 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때 예루살렘 시내에 남아 있던 열여섯 살 이상의 남자를 모두 기사로 임명한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이들에게 전투의 프로인 기사라는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최소한 성도를 방어할 기개를 심어주려 한 것이 이벨린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영화에서 참 잘 살렸다. 이 장면을 위해 전반부 50%의 고프리를 등장시키고, 발리앙이 대장장이에서 장군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남자가 보기에 뭉클할 장면이다. 여기서 대주교는 영화에서는 계속 같은 사람으로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보두앵 4세를 보좌한 주교는 티루스의 기욤이라하여 따로 있었다. 영화에서는 별 비중 없이 마지막에 발리앙에 반대하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실제 티루스의 기욤은 재상이었고, 보두앵 4세로부터 새로운 십자군을 파병 요청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그리고 십자군에 관계된 1144년부터 1183년까지를 기술한 역사서를 남기기도 한 현장 증인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킹덤 오브 헤븐' 이란 영화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아랍어, 투르크어까지 자유로이 구사했다고 한다. 원래 보두앵 4세가 왕자 시절 때 가정교사였으나 44살에 재상으로 임명되어 10년 동안 보두앵 4세를 보좌했다. 로마까지 간 후 프랑스로 향하던 중 소식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치안이 불안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중요한 인물도 영화 서사 구조를 위해 쳐내야 했다.

그래도 주교라는 단서로 후반부까지 연결시킨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살라딘은 도착 다음날인 9월 21일에 공격했다. 21일부터 25일까지 예루살렘 북서쪽에서 서쪽 성벽을 공격했다.

[시내에서 이벨린이 주도한 방어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닷새 동안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지만 성벽이 한 군데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살라딘의 군대는 이전의 투석기가 수없이 활용되었고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수류탄이 끊임없이 불을 내뿜었다.]

영화에서 그리스의 불로 추정되는 폭탄이다. 수류탄이라기 보단 화염병에 가까운 구조다. 왜 그리스의 불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하다.


[닷새째 전투가 끝난 후, 살라딘은 더 이상 같은 전법으로 공격을 계속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밤중에 진을 물리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26일, 예루살렘 북쪽과 북동쪽 성벽에 새로운 전법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전처럼 석유를 넣어 불을 부인 수류탄을 병사들이 하나씩 던지는 게 아니라 성벽 앞을포 끌고 나온 투석기를 이용해 한꺼번에 던져 넣었다.]


[9월 29일. 맹공격을 퍼붓는 한편으로 인부들에게 성벽 아래까지 갱도를 파라고 명령했다. 사흘에 걸쳐 30미터의 갱도를 파내려 갔고, 조금만 더 파면 내부에 화약을 채워 성벽을 산산조각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방어하는 쪽도 갱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30일, 발리앙 이벨린은 편지를 보내 직접 회담을 하자고 요청했다.

10월 1일 다시 한번 회담을 청한다.

10월 2일, 마침내 살라딘의 천막 안에서 두 사람의 회담이 실현되었다.

둘은 통역 없이 고급 아라비아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실로 영화 같은 장면이 있었다. 당시 장면 그대로가 곧 영화였다.


이븐 알 아시르,

[발리앙은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야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살라흐 알 딘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발리앙은 술탄의 분노를 가라앉혀 보려 했으나 술탄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그는 술탄을 향해 말했다. "오 술탄이시여, 이 도시에는 신만이 그 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들은 싸움을 망설이고 있습니다. 술탄께서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목숨을 살려주리라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맙소사, 우리는 자식들과 여자들을 죽이고 우리가 가진 것을 모조리 태워버릴 겁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동전 한 닢도 전리품으로 남겨두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이 끌고 갈 남자들과 여자들도 단 한 명도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스런 언덕과 알 아크사 사원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곳도 파괴해 버릴 것이며, 우리가 붙잡고 있는 5천 명의 무슬림 포로들도 죽여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탈 짐승이나 가축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떠날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당신들과 싸우겠습니다. 당신들을 여럿 죽이지 않고서는 우리 누구도 눈을 감지 않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 협박을 하는 발리앙의 베포와 그걸 받아들이는 살라딘의 포용력. 두 영웅의 만남이다.

이 시기 예루살렘에는 토머스 베켓 사건으로 험악해진 로마 교황의 심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영국 왕 헨리 2세가 성지 방어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보내온 3만 디나르 상당의 돈이 있었다. 이벨린은 그것을 프랑크인들의 몸값으로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10 디나르, 여자들은 5 디나르, 아이들은 1 디나르. 가난한 이들에게 가족당 20디나르는 1,2년 꼬박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하지만 7천 명 밖에 구할 수 없었다. 이벨린은 자신의 사유 재산도 내놓는 동시에 예루살렘 시내의 모든 돈을 끌어모아, 그것으로 불쌍한 사람을 하나라도 더 구해낼 생각이라고 살라딘에게 말했다. 여기에 살라딘은 감격하고 말았다. 동석한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 역시 형 이상으로 감격해 1천 명 분의 몸값을 받지 말라고(자기가 내겠다고) 나서 형의 동의를 얻었을 정도였다. 술탄의 재량으로 나이 많은 이, 한 가정의 가장은 모두 석방하고, 과부들과 고아들은 선물까지 쥐어서 보냈다.

1187년 10월 2일 금요일에 예루살렘에 살라딘이 입성한다. 노예가 된 프랑크인은 거의 없었다.

프랑크인, 동방인, 그리스도 교도들은 신변의 위험 걱정이 없었고, 어떠한 학살이나 약탈 행위도 없었다. 예배 장소의 경비는 강화되었고 프랑크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순례 올 수 있을 것이라 선언했다. 십자군이 점령했을 당시와 너무도 다른 행보였다.

영화에서는 살라딘이 바닥에 엎어져있던 십자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실제 살라딘은 그 정도까지 관대하지는 않았지만, 이 장면의 임팩트는 매우 강력하다. 전반부에 조금씩 언급하고 있는 실제 이슬람의 사상. 세금만 내면 종교에 관대했던 당시의 예루살렘. '킹덤 오브 헤븐'. 말 그대로 '천국의 왕국'은 눈으로 보이는 한 성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머릿속에 있는 세계라는 것을.

엔딩은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3차 십자군 원정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리석음은 계속된다. 지금까지.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이 부족하고 사진으로 영화 전체를 보여줄 수 없어 최소한으로 줄이다 보니 빠진 것도 많은데 인용 부분을 읽고, 또 영화를 다시 보면 분명 새롭게 보이는 것이 훨씬 많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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