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공론장"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신 후에 글을 읽기를 권장해 드립니다.)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만국공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의거한, ‘합리적인 토론’ 혹은 ‘긍정적인 비판적 합리성’을 명목으로 한 각 배심원들의 편견어린 시선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편견은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현 사회적 및 시대적 분위기로서 판단건대 의사소통과 공론의 과정 속에서 지양해야 할 의사소통의 방해물이며 종종 사회적 문제점을 야기하곤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영화 속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투영하여 그 편견들에 대해 들여다보고, 배심원들의 토론을 통해 편견 즉,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을 통해 편견이 해소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궁극적으로 편견이라는 개념에 대해 현실세계 속에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해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한 현실적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연구 결과, 영화 속에서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따른 ‘공동체를 위한 합의’와 ‘보편적 이성성’ 에 대한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공론에 대해 나타났으나 부분적으로는 영화 속 ‘현실의 벽’에 의해 완전한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어렵다는 점을 도출해 냈으며 편견은 상호 이해와 공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필요악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출처 : 이강석. (2020).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 나타난 편견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 논문지, 20(5), 243-250.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의거한, ‘합리적인 토론’ 혹은 ‘긍정적인 비판적 합리성’을 명목으로 한 각 배심원들의 편견어린 시선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만국공법’은 미국의 외교관이자 법학자인 헨리 휘튼(Henry Wheaton, 1785~1848)의 저서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with a Sketch of the History of the Science)를, 청나라 주재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lexander Parsons Martin, 1827 ~1916)이 한역(漢譯)하면서 붙인 역서명(譯書名)이자, 19세기 중후반 경 동아시아에서 국제법을 지칭하는 일반적 명칭이었다. 당시 아편전쟁의 사후 처리 등 다양한 외교적 문제를 처리해야 했던 청(淸)나라 조정은, 마침 중국의 기독교화를 목적으로 휘튼의 저서를 번역하던 마틴을 알게 되었고, 또한 외교 문제 처리에서 만국공법이 지닌 효용을 직접 목도함에 따라, 1864년 그것을 공간(公刊)하기에 이르렀다. 『만국공법』은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에 각각 수입되어1) 각 정부의 대외정책 수립과 지식인의 사상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 김용구는 최소한 1876년 2월 이전에는 『만국공법』이 조선에 소개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김용구, 만국공법, 소화, 2008, 101쪽.
출처 : 이원석. (2018). 만국공법의 두 가지 지평과 구한말 유학. 한국학연구, 51, 599-633.
문제는 조약 내용의 실질적 협상이 종료된 후에 일어났다. 조선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서구 제국들과 조약을 체결할 때면 항상 ‘屬邦照會’라는 것을 상대국 원수에게 보내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것은 조선이 청의 속방이되 內治와 外交는 자주적으로 행한다는 선언을 담은 문서였다. 만국공법체제라는 형식상의 국가 간 평등체제 하에서 청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이 조치는, 원래 1882년에 조선이 서구 제국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려 할 때 청이 조약 전문 내에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내용의 조항을 삽입하려다 미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차선책으로 만들어낸 방안으로서,47) 이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이번 오스트리아와의 조약 체결에 있어서도 고종은 권재형을 협상 전권대표로 임명함과 더불어 역시 같은 내용의 조회를 보냈으며,48) 권재형은 1892년 2월 3일에 오스트리아 대표 비겔레벤을 방문하여 해당 조회를 전달하였다.49)
47) 조미수호조약 협상시 청측의 속방조관 삽입 시도로부터 속방조회 발송에 이르는 과정에 대 해서는 宋炳基, 1984 「金允植·李鴻章의 保定·天津會談」 (上)·(下), 『東方學志』 44·45 참조.
48) 속방조회의 발행 일자는 1892년 11월 25일로 되어 있는데(『國照會謄錄』(古5710-11) 「送奧國 照會」 참조), 아마도 이 날 실제로 발행되어 권재형에게 전해진 것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전의 미국·영국 등과의 조약 체결 시 조회를 보낼 경우에도 조회의 발행일자와 실제 전달일자가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1월 25일자로 권재형이 전권대표로 임명됨과 동시에 협상 업무 보조를 위해 2인의 주사가 파견 되었는데, 만약 조회가 11월 25일자로 발행되었다면 2명의 주사가 권재형에게 분명히 해당 조회를 전달했을 것이나, 이들의 일본 도착 후 권재형이 전권위임장 수령의 확인차 통리교 섭통상사무아문에 보낸 보고에는 조회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舊韓國外 交文書』 제2권, 「日案」 2, #2028).
49) 『淸季中日韓關係史料』 제5권 #1662-(2), 光緖 18년 3월 11일, 2965a면.
출처 : 민회수. (2009). 조선-오스트리아 수호통상조약(朝墺修好通商條約) 체결의 정치적 의의. 규장각, 35, 151-184.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1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동아시아에 구축할 새로운 거점 가운데 하나로 한국을 점찍고 대형 이양선을 끌고 조선을 찾았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892년 조선과 오스트리아가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 배경이다. 조·오 수호통상조약은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 인정 등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압박에 따른 불평등 조약이긴 했지만 고종은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 조선의 갑옷과 투구를 선물로 보냈다. 갑옷과 투구에는 비와 구름을 의미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농경사회에서 풍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갑옷과 투구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수집품으로 등록돼 빈미술사박물관에 보관됐다. 130년 전 고종이 우정의 표시로 보낸 조선의 갑옷과 투구(사진)가 한국을 찾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출처 : 이선아, "고종이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갑옷·투구…130년 만에 한국 찾는다", 한국경제, 2022.10.13,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101362081
타펠슈피츠는 홀스래디쉬의 뿌리, 당근, 파 등의 각종 야채와 소뼈, 소엉덩이 살을 넣어 우려낸 국물과 고기를 소스와 함께 먹는다. 이때 감자도 곁들인다. 소스는 사과와 크렌이라 불리우는 서양 고추냉이가 주 재료이다.
타펠슈피츠는 합스부르그의 프란츠 요세프 황제가 다이어트를 위해 기름기를 뺀 삶은 소고기 요리를 즐겼다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출처 : 김경열, "비엔나 타펠슈피츠의 명가 플라후타! Tapelspitz Plachutta", Culturewindows, 2022.03.03, https://culturewindows.com/news/view.php?no=46#google_vignette
세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역사 30화 영국, "아서" 편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독일, 영국을 연결하여 전세계적 지역별 조직을 만든 후 영국에서 아서를 주인공으로 한 미디어아트와 함께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 F&B 사업을 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를 연결하여 전세계적 지역별 조직을 만든 후 오스트리아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를 주인공으로 한 헤리티지 미디어아트 갤러리와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타펠슈피츠) F&B를 하고자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읽는 시 18화 기욤,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편에서 '거트루드 살롱'처럼 살롱을 운영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개인의 사생활·재산·인권 등과 같이 발전된 개념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기원을 17∼18세기 영국, 프랑스의 커피하우스와 살롱 등에서 찾았다. 그 당시 커피하우스와 살롱 등은 정치적 공론장으로, 그곳에서 발행하는 서신, 뉴스레터, 저널, 수기신문 등은 여론을 조성하였다.
부르주아는 공론장에서 그들의 생활세계를 표출시키고, 공개함으로써 비판적, 합리적 토론을 가능케 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통한 미디어의 구조와 그 변화에 연구를 국한시키지 않고,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통한 생활세계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현대 사회의 체계가 강화, 보강되면서 통제 메커니즘의 고리는 더욱 확장되었다. 체계는 생활세계를 강제함으로써 인간 해방의 실현을 가로막았다. 그 결과 현대 사회는 ‘민주적 토론’의 공론장 기능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그 구조적 변동을 일으켰다. 즉, 자유주의적 공론장이 조직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홍보 기능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개인은 체계의 확장으로 인해 ‘다원적’ 동기를 상실하게 되었다. 언론은 공개적 참여를 뒤로 하고, 무비판적 선전·오락·홍보의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그렇다면, 초기 부르주아지가 사적 영역을 어떻게 공론장으로 가져올 수 있었는가. 공론장은 생활세계를 반영하였다. 중세의 참여 없는 공론장에서, 자기 통제 메커니즘으로 구조 변동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문예적 공중’이 소수의 전문가로 둔갑하고, 그들은 대중소비의 메시지를 비판 없이 오락으로 수용하는 독자에게 전한다. 과거의 참여 없는, 혹은 숙의 없는 공론장으로 다시 회귀한 것이다. 본고는 현재 공론의 매개 수단인 언론을 당시 공론장의 역할에 비추어 그 기능을 점검한다.
출처 : 조맹기. (2007). 하버마스(Juergen Habermas)의 공론장 형성과 그 변동. 한국소통학보 , 8, 70-105.
하버마스의 공론장을 참고하여 살롱을 운영하고자 한다.
세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역사 14화 우즈베키스탄, "티무르" 편에서 아름다움(신이 현존한다는 증거, 신 = 일자 = 좋음의 이데아)을 인지하기 위해 아름다움에 대한 동서양의 철학과 세계관에 대해 책을 쓰고자 한다고 적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영감 받은 것을 책에 넣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