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펜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학창 시절 쓰지도 않는 펜을 이리저리 모아서 필통 지퍼가 망가질 때까지 꽉꽉 눌러 담다가 필통을 잃어버려 울상을 지은 일이 빈번했다. 지금은 ‘필요한 펜만 들고 다니자’라고 생각해서 다행히도 필통엔 여유가 많이 남는 편인데, 그래도 좋은 펜에 대한 욕심은 버리지 못했다. 다만 사정상 구입하지 못했을 뿐…….
항상 풍성하지 못한 주머니 덕분에 필통 속 내 펜은 아무리 비싸도 5천 원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비쌌던 게 4색 펜으로 4천 원에서 5천 원 사이었다. 그다음으로 비쌌던 건 그 당시 유명했던 일제 하이테크 펜으로 2천 원에서 2천5백 원 사이. 그리고 필통의 나머지 공간을 차지한 녀석들은 모나미 펜과 제도 샤프, 그리고 형형색색의 형광펜들이었다.
그런 내가 좀 더 커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어머니가 일하시는 곳에서 펜을 몇 개 가져오셨다. 카드사 VIP 회원들에게만 나가는 나름 비싸 보이는 펜이었다. 펜 뚜껑은 없었고, 위아래가 나뉘어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리면 볼이 나왔다 들어가는 펜이었다. 아마 비싸 봤자 2만 원 안팎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어린 내 눈에는 좋아 보였다. 그래서 하나 갖고 싶다고 조르자 어머니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흔쾌히 내어주셨고 이후 내 필통엔 생애 제일 비싼 펜 하나가 들어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 펜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똑같은 펜을 두세 개 잃어버렸다. 그러자 이후 펜 수집에 대한 욕심이 점점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잃어버리자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 커서는 대학에도 가고, 군대도 갔다 왔다.
전역 후 집에 오니 눈에 익숙한 펜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전역하고 마침 정장도 샀겠다, 이건 내가 필히 써야 한다는 요량으로 날름 하나 챙겼었다. 예전에 쓰던 펜은 아니지만, 똑같은 펜으로 게이지도 크고 몸체도 뚱뚱했지만 ‘나만 쓰는 펜’이라는 생각에 그 펜이 나를 한 단계 띄워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복학할 당시 천안에 내려와 자취를 시작할 때 내 짐들과 그 펜을 고이 감싸서 내려왔다. 생애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살았다.
가방 안에 펜을 꼽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건 다행이었다. 새 학기가 되면서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할 일이 많아졌는데 그럴 때마다 난 항상 가방에 고이 꼽혀있는 ‘어머니의 펜’을 사용했다. 학과를 쓰고, 학번을 쓰고, 이름을 썼다. 시험을 볼 때에도 썼다. 그 펜을 손에 쥘 때마다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 펜에 담긴 누군가의 노력이 내 손으로 전해지고 내 역사가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단지 이 펜 하나로 과거의 추억들이 내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그렇게 학기 중 절반이 지났을까. 아버지가 내 자취방에 오셨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근 15년간 별거 중이시다. 이혼 서류도 내지 않고 별거만 15년째다. 나와 내 동생은 그동안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덕분에 그 사이에 값싼 플라스틱 펜처럼 구르고 깨지고 부서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아직까지도 잘 살고 있다.
새 학기 시작하곤 얼굴 보기 힘들어서 전화만 하다가 이제야 다시 만난 아버지는 더 늙어버린 얼굴에 말하지 못할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내가 사는 자취방도 보고 밥도 같이 먹었다. 덤으로 과일도 한 보따리 받고 용돈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인에게 선물 받았다며 나에게 펜 하나를 건네셨다.
그 펜은 검은색 바탕에 몇 군데가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펜 뚜껑 끝부분 금색 부분엔 ‘NOBLESS’라고도 적혀있었다. 펜 뚜껑을 열면 펜치 고는 얇은 게이지의 볼이 드러났고 그 볼과 맞닿은 부분은 힘을 주면 힘을 준만큼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펜을 좀 눕혀서 쓰는 습관이 있는데 이 펜을 쓰면 종이를 긁는 느낌이 들어 정작 사용하는 건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저 아빠에게 선물 받은 좋은 펜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신난 웃음을 지며 그 펜을 내 가방에 꽂았다.
선물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주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간에 기분이 아니 좋을 리가 없다. 난 집에 와서 가방을 열어 두 사람에게 선물 받은 두 개의 펜을 가만히 보았다. 근 15년간 깨어졌던 볼펜 한 쌍이 나란히 내 가방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나에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내 머릿속엔 나란히 찍힌 가족사진도, 비슷한 기억도 없다. 하지만 그 없던 기억들마저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내 이름을 쓰거나 서명을 할 때 행복한 고민이 생겼다. 오늘은 어떤 펜을 쓸까? 이번엔 어떤 펜을 쓸까? 언제는 이걸 써봤다가 언제는 저걸 써야겠다. 언제나 고민하면서도 행복했었다. 그런 고민을 할 때면 아무리 비싸다 하는 만년필이라도 부럽지 않았다. 단지 이 두 펜만 있다면 어떠한 글이라도 쉽게 쓰일 것만 같았다.
그런 행복한 고민이 지속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일을 하다가 펜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펜이 없었다. 난 그걸 눈치채자마자 재빨리 가방에서 펜 두 개를 꺼냈다. 사실 자랑할 요량으로 꺼낸 것도 있었다. 그리고 예상에 맞게 모두가 좋은 펜이라며 놀라 했었고, 나는 속으로 조금 우쭐했다. 그 욕심이 화근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니 펜 하나가 사라졌던 것이다. 바로 ‘어머니의 펜’이.
펜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자마자 이전에 사주를 봐주었던 역술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엄마와는 멀고 아빠와는 가깝겠어’. 어떻게 그 사주가 바로 떠올랐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너무 동일시했던 것일까. 사실 비싸지도 않고 그리 좋은 펜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벌써부터 한 쌍의 펜이 나란히 꽂혀있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열심히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를 찾고, 이틀을 찾고, 일주일을 찾았다. 누군가가 주워서 보관하고 있으리라, 혹은 아무도 모를 곳에 고이 잠들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을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가방에도 없고 사무실에도 없고 길거리에도 없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으려나. 차라리 부서져 어딘가에 버려져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미련 없이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잊는다는 것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닐까.
어차피 잃어버릴 거였다면 그런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 펜을 잃어버린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내 머릿속에는 단 한마디만이 맴돌 뿐이었다. ‘엄마와는 멀고 아빠와는 가깝겠어’. 그게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나의 운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운명은 싫었다. 언제나 두 개의 펜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가족으로서 함께 느끼고 싶었다.
지금도 가방을 열면 한 쌍이던 펜은 하나밖에 없다. 그저 이것이 내 운명이겠거니 한다. 물 흐르는 대로 바람이 떠나가는 대로 살아도 될 법하다. 다만 그 순간이 그리운 것이다. 펜 한 쌍이 나란히 가방 안에 잠들어 있는 광경이.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광경이 아직도 그리웠던 것이다. 15년이 지났는데도.
참 신기한 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또 되돌아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