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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왼손잡이앤 Dec 03. 2021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그녀의 한마디

내가 가장 존경하는 그녀의 이야기


1995년 4월 28일 오전 

여느 때와 다름없던 그날 아침 대구 달서구 상인동에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400m에 달하는 주변 현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당시 사고 발생지점에서 77m가량 떨어진 곳에서는 백화점 신축공사가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건설 작업 도중 실수로 도시가스배관을 건드린 것이 결국 참사로 이어졌다.


이 사고로 101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202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고 현장에서 20분 거리에 살고 있는 나는 학교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이날 우리 학교는 소풍날이었고 , 우린 결국 소풍을 가지 못했다.

가스 폭발의 소름 끼치는 위력을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다.




그 일이 있은 후, 3개월 후 


매미소리가 엄청나게 들리던 7월의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옆집 부부의 싸움 소리가 또 나의 귀로 찾아온다.


그 당시 아버지는 만성신부전증이 있으셔서 혼자서는 거동이 전혀 안 되는

상태로 늘 집에 혼자 누워계셨다.


부부의 싸움 소리는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둘이서 같이 죽자는 소리가 났다.

잠시 정적이 있은 후,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우리 집으로 퍼져 들어왔다.


나는 동생과 아버지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가 슬쩍 옆집을 보았다.


세상에나...

옆집 아저씨가 LPG 가스통을 열고서 라이터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나, 이거 무슨 냄새야?."

정신이 나가려다가 동생의 목소리에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어서 아버지랑 동생을 피신시켜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학생인 내가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를 부축하려고 앙상한 어깨를 잡자 아버지는 내 손을 밑으로 내리셨다.


"동생 데리고 뒤도 보지 말고 뛰어서 엄마한테 가"

아버지는 이 짧은 한마디를 하시고는 눈을 감고 누우셨다.


나는 남동생 손을 꼭 잡고 옆집을 지나서 밖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어서 엄마가 일하는 식당 앞에 섰다.


식당 주인분이 나를 알아보고 엄마를 불러주고 엄마가 나왔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체 울기만 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짐작하고 앞치마를 맨 채로 집으로 달렸다.


그 사이 주인아주머니의 신고로 우리 집 앞과 입구에는 많은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와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한 명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라이터를 내려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순간 경찰과 소방대원 사이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서 남자 앞으로 갔다.

내 눈으로 보고도 놀랬다.


'엄마?'


"아저씨,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엄마는 재빨리 가스통을 잠그고

"그건 내한테 주이소"라고 말하고 라이터를 뺏아 들었다.


그 순간 옆집 남자는 당황하여서 어쩔 줄  몰라하는 순간,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아저씨를 붙잡았다.


엄마는 얼른 우리 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상태을 살폈다.

'살았다.'


가스냄새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소방관들이 우리 집과 주인집, 옆집을 살폈다.

옆 집안에는 아줌마와 딸이 울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의 무모한 용기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그 옆집 부부의 가정폭력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경찰이 와도 그때 잠시뿐....

그 남자는 다시 풀려났고.. 그렇게 우리는 1년 뒤에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음 독하게 먹고, 딸 데리고 멀리 도망가서 살아요."

우리 엄마가 옆집 아줌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도 이제 그만하시고요. 그카다가 천벌 받습니데이"

엄마는 옆집 남자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


그 뒤로 그 부부의 소식을 알 수 없지만.. 

나는 뉴스에 가정폭력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부부가 생각난다.

가정폭력을 대하는 사회의 제도나 규범이 조금 더 엄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든다.


그러면서 또 한 사람, 우리 엄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나도 지금 엄마가 되었지만 그 당시 우리 엄마만큼의 용기는 아직 없다.


엄마의 위대함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다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엄마 덕분에 한번 더 살게 된 인생이라 난 허투루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누군가를 도와주고 봉사하면서 살아야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도 뜻깊은 하루를 보내고자 노력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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