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로 찍는다고 다 영화인가?
'좋아하는 것을 해라' 이 말은 정말이지 명쾌하게 들린다. 어찌저찌 태어난 마당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즐기다 죽는다는 것은 행복하며 풍요로운 삶일 것이다. 하지만 인지해야 하는 것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삶은 치열하게 산다는 것이다. 흔히 취미가 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영화감상이라고들 한다. 이는 영화가 다른 것들보다 훌륭하거나 특별히 재밌기 때문이 아니라 편안하며 적당히 고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취미가 축구인 사람은 이 취미를 즐기기 위해 여러 불편함을 수용해야 한다. 허벅지의 근육통, 헐떡대는 숨 고름, 여기저기 생기는 타박상 등 반면에 영화는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극장에서 선선한 온도를 느끼며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이 간단한 행위에 문화생활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즉 고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생기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 정말이지 놀라워해야 한다. 좋아한다라는 의미 안에는 편안하고 쉽다는 의미가 지배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애인과 밀애를 즐기다 말고 문득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저 편해서 이 새끼를 만나나? 혹은 이 새끼가 날 편안하게만 생각하나?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때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인생이 아님을 알게 된다. 편하기에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비참한가. 우리는 이제 '좋아하는 것을 해라' 라는 이 안일한 말을 하기 전에 '몰입해라' 라고 먼저 해야 한다. 몰입은 불편함 따위 쉽게 수용해버린다. 아니 편안함 과 불편함이라는 개념 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것에 몰입할 수 있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몰입하니 좋아지는 것이다. 몰입 조차 하지 못한다면 좋아한 것 따윈 애초에 없다. 여기서 많은 남자들이 페미니스트들의 논리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흥덕의 여인들)
페미니스트는 흑인 노예들 보다 더 비참하고 지속된 불평등의 역사를 끄집어낸다. 그렇게 끄집어내고 표출하면서 남성이 여성에게 빼앗아간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그러니 당연하게 권위 있는 남성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권위는, 권력은 정말이지 편한 것이니 말이다. 권위 있는 남성은 이런 페미니스트의 등장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을 혹은 사랑하게 될 여성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몰입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나약한 것들은 여성을 혐오하기로 결정한다. 나약한 인간의 특징답게 자포자기 식으로 모든 것을 배척하고 편안한 것들로 눈길을 돌린다. 남성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가장 쉽게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육체적 강함을 과시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거친 언행을 뽐내고 문명사회에서 폭행을 쉽게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한탄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노릇인가. 지금의 사회가 문명사회라는 것을 핑계로 삼다니. 흔히 야만인이라 여겨지는 인디언 조차 여성을 존중하였다. 그들은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 곧 강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강함을 지속하기 위해, 상실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구멍을 뚫고 살을 잘라내면서 고통스러운 성인식을 치렀다. 야만인 보다 못한 것들이 문명인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역사적으로 나약한 것은 언제나 퇴보되었다. 육체적 폭력이 더 이상 강함의 증명이 되지 않는 현재 당신들은 퇴보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실컷 낄낄 거려라.
'82년생 김지영' 이 영화는 쓰레기다. 쓰레기라는 이 말은 나의 극단적인 감정에서 과하게 표현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쓰레기다. 영화의 비정상적인 상업성에만 의존하여 탄생한 거대한 쓰레기. 쓰레기란 취할 것만 취한 뒤 남은 여분의 것이다. 이 영화는 돈 한목, 화제성 한목 챙기고 남겨진 예술이란 껍데기를 뒤집어쓴 영롱한 쓰레기다.
'82년생 김지영'은 원작 소설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원작 소설의 화제성이 없었다면 말이다. 원작 소설의 화제성에는 한창 뜨거워진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는 사회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참 시기적절하게 책이 출판되었다. 이 시기적절함에 비난을 가할 이유는 하등 없다. 오히려 감탄의 박수를 치고 싶다. 어떠한 시기에 발맞추는 것 또한 예술가의 의무 중 하나이니 말이다. 이 소설은 보통 소설에서 큰 즐길거리로 여겨지는 미적 표현, 세밀한 심리묘사, 웅장한 스토리 같은 건 없다. 굉장히 담담하며 일상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영의 이야기는 정신과 의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또한 이 점에서 소설에서 유일하게 탈 사실적인 요소인 빙의가 더 해지면서 정신과 의사의 무기력함이 강조된다. 정신과 의사는 끝내 빙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애초에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 조차 아니기 때문에 무기력하다 못해 무미건조하다. 이렇게 조남주 작가는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화자의 권위를 거세시킨다. 여기서 조남주 작가의 대담함이 느껴진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힘을 불어넣어 매력적인 무엇인가를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남주 작가는 의도적으로 힘을 빼고 별 다른 매력을 지니지 않은 자신의 작품을 한국사회 속으로 기투시킨다. 기투된 그녀의 작품은 사회적 상황과 결합하여 드디어 새로운 매력이 발산된다. 매력 없는 작품이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는 이 불편한 사실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권위가 얼마큼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 특별한 화학작용에 한국사회는 한동안 경악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뜨거운 불의 축제가 진행되었다. 조남주 작가의 영리함과 그녀의 예술적 기법이 훌륭한 땔깜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불의 출제가 영화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김도영 감독은 과연 불이 꺼지고 남은 재에 다시 불을 붙이려는 애잔한 행위를 할 것인지 아니면 따뜻한 재안에서 꿈틀대는 새로운 생명체를 조명할 것인지 역시 후자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박생광의 무당)
김도영 감독은 소설의 흐름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 놓았다. 소설과 영화는 명백히 다르다. 표현기법, 사용하는 언어, 의미부여 방식 등 모든 것이 다른 매체이다. 소설의 입은 글이라면 영화의 입은 카메라다 입의 구조가 다르면 새어 나오는 발음,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가 다르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차이를 똑바로 인지하지 못한 김도영 감독은 많은 대사로 영화를 구성해 버린다. A가 B에게 적개심을 느끼는 것을 묘사하려면 소설은 글로 쓰지만 영화는 A의 날카로운 눈빛과 B의 안하무인적 행동을 보여주면 된다. 이 같은 카메라 언어를 무시한 김도영 감독은 작위적이고 간질거리는 대사를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영화 속 모든 장면이 대사를 위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이 기막힌 역전은 영화를 모멸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나는 김도영 감독이 영화를 편하고 쉬운 매체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니 그녀가 영화의 상업성을 목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제작했다는 비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 좋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심에 영화를 이용했다는 것을 이해해보자. 예술가의 욕망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욕망이니 이해할 수 있다고 넘어가 보자. 그렇다면 이 영화가 과연 과거의 영광을 비춰주는 역할이라도 똑바로 수행했는 것일까?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소설에서 화자 역할을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는 영화에서 완전한 겉절이가 되어버린다. 이로써 김지영이 화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카메라는 김지영의 얼굴에 클로즈업을 해대고 그녀의 감정을 잡아내기 위해 홀로 있는 김지영이 부각되는 연출이 행해진다. 이미 이 지점부터 소설의 방향과 틀어진 것이다. 어쨌든 김도영 감독은 김지영에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도권을 주었다. 그렇다면 김지영이라는 캐릭터에 힘을 불어넣어 그녀의 매력을 조명해야 관객은 그녀의 감정과 상황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캐릭터의 매력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장면이 하나 이상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 것 없이 서사를 수용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일 뿐이다. 하지만 김도영 감독은 억척스럽게 소설의 길을 따라간다. 끊임없이 김지영의 비굴하고 우유부단하며 골골되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빙의는 정말로 미친년으로 밖에 안 보인다. 서사 속 고난에 굴복한 나약한 존재 그 결과 빙의라는 정신병을 갖게 된 여자 말이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지영은 맘충이라고 힐난하는 남정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김도영 감독은 이 부분에서 관객이 큰 희열을 느끼길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가 너무 뻔하여 김지영은 다시 미친년으로 보인다. 허겁지겁 김지영의 위상을 올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김지영을 단순 미친년으로 만드는 김도영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가? 정말이지 의아스럽다.(심지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는 김지영을 묘사할 때 감독은 뒷 배경의 초점을 흐린다. 물론 김지영의 특별함을 부각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이 연출 또한 김지영을 미친년 만드는데 한몫 거든다.)
김도영 감독은 김지영이라는 캐릭터를 훼손한 것도 모자라 김지영의 엄마인 미숙의 캐릭터 조차 나약하게 묘사한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힘 있고 강직한 존재로 묘사되는 미숙을 말이다.
소설에서 김지영의 엄마인 미숙이 나대, 막 나대 라고 말하는 부분은 그동안 그녀의 삶에서 억압되었던 것이 약하게나마 표출되는 애잔하고 뭉클한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미숙의 나대라는 외침 뒤에 이어지는 희화화된 장면이 연결되면서 날파리의 날개가 가볍게 파닥거리는 그런 종류의 나댐으로 변질된다. 뭐... 이 또한 애잔하긴 하다. 비웃음이 섞여 있지만.
(김경은의 Dialogue of Silence)
'82년생 김지영' 이 영화에 악의 적인 악플과 비평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단순 페미니스트에 대한 적개심에 찬 비열한 비난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이념이 영화로 표현되었다고 마냥 좋아해서는 안될 것이다.(애초에 영화라고 할 수도 없는 작품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꿨던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논리를 선도하는 용의 대가리만 컸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행보는 끊임없이 아쉬움과 부실함을 보여주었다. 대가리만 치켜든다고 위엄이 생기지는 않는다. 대가리 밑으로 건실하고 우아한 컨택츠가 바탕이 되어야 드디어 대가리를 치켜든 맥락과 진취성이 표현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큰 이슈로 소비되고 있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가 다가올 조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기는 자신들의 논리가 더욱 엄밀할 것을 요구받는 때이기도 하다. 간혹 불편함을 수용하기 싫어 페미니스트를 혐오하는 안일한 태도와 같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편안하고 쉽기에 행해지는 경우가 있다. 혹여 쉽게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기에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자신이 고작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나는 언젠가 조남주 작가와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재 속에서 아름다운 꿈틀거림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흉내, 단순한 제스처가 아닌 자신의 몸 감각 하나하나에 몰두 한 꿈틀거림 나는 기다리겠다. 그것에 몰입할 수 있는 나를
(조미영의 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