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현 Jan 18. 2020

데어 윌 비 블러드(영화)

15분의 진실과 거짓으로 이루어진 영화

 케스파컵, KBS에서 E-sport 대회를 개최하였다. E-sport는 한국에서 엄청난 성과와 화제성이 있었음에도 언제나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국영방송인 KBS에서 손을 뻗고 있다. E-sport팬인 나에게 이것은 굉장한 의미를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봐보자. KBS는 너무나 늦었다. 현재 방송매체가 지닌 권위는 기술의 발전과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상실되고 있다. 예능프로그램, 스포츠 중계, 드라마를 보기 위해 TV를 켜는 사람의 수는 줄고 있으며 유튜브, 트위치, 아프리카 TV를 소비하는 이들은 늘어나고 있다. 과거에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던 방송 3사 KBS, MBC, SBS는 무너지고 있다. 이들은 현재 애처롭게 시사프로그램의 권위성에만 의존하는 꼴을 보인다. (하지만 이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케스팝컵의 의미는 KBS가 E-sport의 시장성을 인정한 그림이 아니라 KBS가 E-sport의 시장성에 의존하고자 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E-sport의 팬으로서 KBS의 태도가 고맙지만 큰 감동이 없는 이유는 있는 것이다. KBS는 좀 더 빨랐어야 했다. 사실 방송 3사는 훨씬 빨리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백종원의 인기는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방송사의 권위는 공공성을 지킨다는 형태로 위세를 뽐냈다. 기존에 우리가 즐겨보던 방송 프로그램은 공공의 목적에 부합한 것인지 혹은 공공의 이해에 위배된 것은 없는지 고민한 흔적을 여실히 보였다. 그렇기에 욕이나 섹스, 사회적으로 저급한 욕망으로 취급되는 것들을 보기에 힘들었다. (E-sport가 인정받지 못한 것 또한 게임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공공적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을 저급한 욕망으로 치부하곤 했다. 그렇기에 돈의 가치를 긍정하는 프로그램은 언제나 질타를 받아왔다. 대신에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크게 인기를 얻어왔다. 여기서 백종원의 인기가 이러한 관념이 뒤집혔음을 말해준다. 백종원은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훌륭하게 내려놓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백종원은 여기서 요리하는 푸근한 아저씨 이미지로 대중에게 큰 호감을 샀다. 하지만 그의 인기에는 외식업계의 큰손이라는 그의 커리어가 은근한 자극을 가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결국 마리텔 이후의 그의 행보는 3대 천왕, 푸드트럭을 거쳐 골목식당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백종원은 슈가보이 이미지를 탈피하고 외식업계의 대부 이미지를 당당하게 어필한다. 기존 방송사의 권위가 허물어진 즉 공공성의 가치가 전환됨과 동시에 백종원이라는 인기 사업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방송사들은 허물어지는 자신들의 권위를 역으로 이용하고 백종원을 소비하여 꽤나 유연한 대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그만큼 옅어졌다. 이 고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공공성이라는 가치가 흔들리는 순간 방송사의 위치 또한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앞으로 이 고민의 결과로 방송사들이 어떠한 방향을 잡을 것인지 지켜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여기서 백종원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황교익(음식 칼럼니스트)과 백종원의 논쟁이 잠시 동안 화제를 모았던 적이 있다. 이 둘의 논쟁의 결과는 황교익의 옹졸함으로 끝이 났다. 황교익의 비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음에도 그의 말은 공허했다. 이것은 그의 비판의 방향이 잘못 설정되었음을 말해준다. 황교익은 장사꾼인 백종원이 슈가보이 이미지를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백종원이 단순한 장사꾼임을 폭로하는 황교익의 비판은 분명히 날카로웠으며 옳다. 하지만 백종원은 이미 슈가보이 이미지를 스스로 탈피하였고 자신이 훌륭한 사업가임을 어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교익의 비판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공허하고 옹졸하게 보이는 것이다. 백종원은 대중의 실질적 오성을(음식사업은 돈이 된다라는 느낌) 자극시키는 존재인 것에 반해 황교익은 추상적 개념(음식문화의 의미)에 머무르는 존재였다. 쇼펜하우어는 실질적 오성에 무감각해지고 추상적 개념에 몰두하는 학자들을 옹졸하다고 명확하게 말했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망을 똑바로 이해하지 못한 황교익이 딱 그 꼴이 되었다.

이렇게 백종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 우리는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이 당당히 인정되고 용인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꽤나 자본주의 국가 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골목식당에서 음식장사를 훌륭히 행하지 못하는 사장은 백종원에게 쓴소리와 호통을 듣는다. 우리들은 이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백종원의 권위에 동조한다. 돈의 가치는 확실히 전보다 긍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은근히 백종원의 몰락을 기대한다. 황교익의 실패는 꽤나 가슴이 아팠다. 돈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 되어가는 사회를 나는 혐오한다. 하지만 백종원은 이런 나에게 인자한 웃음으로 혹은 무섭게 찡그린 얼굴로 그렇지 않다고 타이른다. 돈을 목적으로 여기는 삶 안에도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혼재하며 애틋한 인간미가 풍길수 있다는 것을 백종원은 몸소 보여준다. 또한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누리게 되는 쾌적함과 관대함은 실로 갈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나는 그 같은 삶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애써 부정해보지만 백종원의 관대한 웃음을 보면 끝내 힘을 잃게 된다. 이 같은 나의 상황을 비웃는 영화가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의 추악함에 질겁하여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There Will Be Blood'

이 영화의 제목을 직역하자면 "그곳에 피가 흐를 것이다"가 된다. 출애굽기의 문장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신의 명석한 예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앤더슨 감독은 영화에서 엘리 선데이(폴 다노)를 통해 신앙의 위선을 날카롭게 폭로한다. 이런 앤더슨 감독을 생각할 때 "그 곳에 피가 흐를 것이다"의 의미는 신의 속 좁은 저주로 해석된다. 또한 석유업자인 다니엘 플레인 뷰(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말하듯이 그 땅에 석유가 흐를 것이라는 즉 엄청난 부가 존재할 것이라는 축복의 의미도 더해진다. 이렇게 영화 제목은 저주와 축복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해 있다. 앤더슨 감독이 이것을 영화 속에서 어떻게 풀어냈는지 저주와 축복 중 어느 것을 선택했는지 알아보자. 'There Will Be Blood'는 석유 시추 업자인 다니엘 플레인 뷰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는 한 인물의 일생을 다루는 타 영화와 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보통 이러한 영화는 인물의 상황과 감정상태에 따라 연출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화가인 장승업(최민식)의 일생을 다룬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보면 장승업의 어린 시절 총명함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은 다소 밝아지고 탁 트인 자연풍경의 이미지가 소비된다. 반면에 총기를 읽고 삶이 무너지는 장승업을 표현할 때는 구름 낀 하늘과 어수선한 자연 풍경을 소비한다. 이렇게 영화 연출은 장승업의 상황과 함께 바뀌고 같은 호흡을 내쉬거나 뒤따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앤더슨 감독은 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There Will Be Blood'는 플레인 뷰의 현재 상황과 감정에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불길함, 불안함을 자극시키는 연출이 선행된다. 앤더슨 감독의 연출은 플레인 뷰의 걸음걸이를 따라가지 않고 항상 앞서가는 모습을 보인다. 더욱 대담한 것은 영화 첫씬 5분가량 프레인 뷰가 광산을 캐는 장면이 펼쳐지는데 여기서 감독은 앞으로의 영화가 이런 식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선언을 한다. 영화 첫 장면은 민둥산과 함께 귀에 거슬리는 음향이 즉 임팩트가 강한 음향이 길게 지속되는 배경음악이 깔린다. 위와 같이 영화적으로 불길함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이 음향효과는 전적으로 누군가 나의 귀 가까이에 어떠한 소리를 속삭이는 행위를 묘사한다. 누군가 나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는 오직 나의 귀에만 강한 자극을 준다. 여기에 실제로 이 소리는 매우 작은 소리라는 인식이 더해지면 불안함이 자극된다.(여기서 불안함은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어떠한 기대감도 같이 내포해 있다.) 오직 나만 자극시키는 이 행위는 순식간에 나를 남들과 다른 공간으로 옮겨 고립시킨다. 여기서 고립되었다는 불안감(이것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 안정감이 된다.)과 이 옮겨진 공간에서 다시 원래의 공간으로 옮겨질 때 무슨 일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해져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을 음악으로 임팩트 강한 음이 지속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임팩트 강함은 우리 귀를 자극시키는 효과를 이 음이 지속되는 것은 실질적으로 작은 소리라는 효과를 낸다.(한음이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감독의 이 같은 음향효과 덕분에 민둥산 장면 이후 펼쳐지는 플레인 뷰의 노동과정이 불안해 보이게 된다. 또한 실제로 노동과정에서 불행한 사건이 발생할 때 영화적 연출과 상황이 일치하는 묘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이렇게 민둥산으로 시작되어 펼쳐지는 플레인 뷰의 광산 캐는 장면은 다시 민둥산을 보여주며 씬을 마무리한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영화의 압축판임을 관객에게 말해준다. 감독은 이렇게 선언한 거와 같이 끊임없이 영화 연출로 플레인 뷰의 비극을 미리 암시해준다. 플레인 뷰의 비극을 미리 암시해주는 연출은 음향효과가 대표적인 것이지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일이 꼬집기에는 글이라는 형태의 한계가 존재하니 대충 서술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석유가 솟구치는 장면 외에 감독은 하강의 이미지에 집중하며 조도의 폭은 최대한 축소시켜 밝음과 어둠 중 어둠의 이미지를 뒤에 깔아 놓는다. 또한 배우의 얼굴에 자주 클로즈업을 하는 카메라 구도로 관객의 시야를 제한하여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이 연출은 앤더슨 감독 특유의 연출로서 영화 속 캐릭터에 입체감과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도권을 주입하는 효과이기도 하다. 이 같은 연출의 활용면에서 앤더슨만큼 뛰어난 감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 속 캐릭터는 힘 있고 유독 매력적이게 느껴진다.) 어쨌든 감독은 이런 식으로 플레인 뷰의 비극을 미리 암시한다. 이렇게 연출적으로 영화 속 인물의 상황을 미리 암시하는 연출은 관객에게 깊은 몰입감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자주 반복되고 지속되는 경우엔 유치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There Will Be Blood'는 유치함을 느낄 정도로 이러한 연출이 지속된다. H.W(딜런 프리지어)의 사고, 헨리(케빈 J 오코너)의 등장, 엘리 선데이와의 갈등 등은 작위적이거나 충분히 예상이 될 정도로 유치함을 선사한다. 나는 앞서 앤더슨 감독의 다른 작품인 '마스터'를 비평할 때 자신이 창조한 영화 속 캐릭터에 깊게 몰입하는 감독의 연출력에 대해 찬사를 보낸 적이 있다. 'There Will Be Blood'에서도 이 점을 충분히 볼 수 있지만 위와 같이 유치함을 드러내는 것은 '마스터'를 제작하기 전인 앤더슨 감독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영화가 유치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영화 속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한 감독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나의 생각은 영화 마지막 장면을 봤을 때 순식간에 변하게 된다. 플레인 뷰가 엘리 선데이를 죽이고 "이제 끝났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영화가 끝나는 이 장면을 봤을 때 나는 비속어가 섞인 욕이 나올 정도로 깜짝 놀랐다. "와...쓰벌"

앤더슨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앞에 해왔던 자신의 연출을(비극을 암시하는 연출) 비웃고 있다. 플레인 뷰가 외치는 이제 끝났다는 말은 영화 속에서는 자신의 인생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자조적인 외침일 뿐이지만 영화도 동시에 끝나는 것으로 하나의 의미가 더 전달된다. 감독은 관객에게 '플레인 뷰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났으니 더 이상 당신들이 볼 것이 없다.' 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앞서 비극을 암시하는 연출....우리는 앞으로 이것을 저주라고 말하자. 이 저주를 플레인 뷰에게 쏟아내면서 그의 비극이 실현되었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즘에 동조하며 즐겼던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다.

앤더슨 감독은 "There Will Be Blood"라는 말을 명백하게 축복이 아닌 저주로 사용하였다. 시추 업자로서 달콤한 말로 남을 현혹시켜 돈을 버는 플레인 뷰에게 저주를 하는 것은 꽤나 이치에 맞는 것일 수 있다. 남을 상처 입힌 자는 언젠가 본인이 다친다는 이 근거도 없지만 명쾌한 명언은 모든 이들의 가슴에 박혀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플레인 뷰에게 저주를 토해내는 것과 그의 비극은 합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위와 같은 생각이 옹졸한 것임을 폭로한다. 여기서 잠깐 'There Will Be Blood'에서 가장 훌륭한 시퀀스라 할 수 있는 대사 없이 진행되는 15분의 의미를 살펴보자. 사실상 'There Will Be Blood'가 플레인 뷰의 일생을 다루는 영화라 했을 때 영화 초반 15분간 대사 없이 이어지는 그의 행적 이것만이 의미가 있으며 진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앤더슨 감독은 영화 속에서 엘리 선데이를 통해 말이 가지고 있는 거짓이라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리 선데이는 말을 통해 사람을 현혹시켜 돈을 번다. 이 같은 말의 공허함은 아무 말 없이 육체적 행동이 부각되는 장면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면서 양쪽 다 강조된다.

행동은 진실한 것인데 반해 말은 거짓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애인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을 때 "괜찮아?", "많이 아프지?", "난 니가 걱정된다." 하고 떠드는 것과 죽이나 약을 한 다발씩 싸들고 오는 것 무엇이 더 진실한가? 당연히 후자가 더욱 진실하다. 전자는 걱정된다는 찡그린 가면을 쓸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늘어놓지만 후자는 헐레벌떡 뛰어다니느라 가면을 쓸 시간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대조를 위해 감독은 15분간 침묵의 행위가 끝난 뒤 플레인 뷰의 긴 궤변의 이어짐으로 영화를 구성하였다.(대부분 그저 15분간 대사를 지웠다는 것에 놀란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긴 궤변까지 보지 않는다면 놀랄 이유가 있는가? 그저 특이한 것을 보고 놀란다는 것은 자신 삶의 경험이 왜소함을 드러내는 꼴일 뿐이다.) 이렇게 말의 거짓, 행동의 진실함을 구분 짓는 앤더슨 감독의 태도를 생각해 봤을 때 플레인 뷰의 긴 궤변으로 시작하는 15분 이후의 영화는 거짓말 즉 단순한 궤변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앤더슨 감독은 영화 끝에 자신이 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비웃을 수 있는 것이다. 15분 이후의 영화는 돈을 많이 버는 자에 대한 질투가 섞인 저주를 하는 자들 즉 앞서 내가 백종원을 대하는 태도를 가진 자들의 소망을 실현시켜주는 판타지인 것이다. 성격 나쁘게도 감독은 끝에 이들을 비웃은 것이다. 이렇게 싸가지 없는 앤더슨 감독 덕분에 나는 나의 추악함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케이 세이지의 Le Passage)


내가 백종원을 보며 느끼는 불편함과 그가 몰락했음을 바라는 나의 소망은 사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에 나오는 추악한 질투인 것이다. 겉으로 돈은 더러운 것이며 그보다 소중한 가치들을 나는 알고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진정 그렇지는 못한 것이다. 나의 이 추악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지식 무기를 빌릴 필요가 있다. 경제 시스템에서 폭력적인 권력의 냄새를 맡은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르크스가 노동자 혁명이 아닌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계급의 주체를 선정했고 이들의 혁명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공상단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다. 노동자는 자신의 불평등을 알게 되었다 하여도 결국 자신 또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존재인데 반해 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며 노동의 진실성에 가치를 두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같은 정의가 혁명이라는 불같은 광기에 의해 옅어졌던 것은 꽤나 가슴 아픈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필연적인 실패를 품고 있다는 논리는 혁명 주체자의 치열한 자기반성 결여에서 도출된다. 백종원을 선망하는 자는 자본가가 되기를 꿈꾸는 자인 거와 같이 백종원을 질투하는 것 역시 자본가를 꿈꾸는 자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는 자라면 진정 본인이 돈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노동의 진실함을, 그 가치를 느끼는지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백종원은 꽤나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해준다. 백종원이 그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푸근한 아저씨로 보이기 시작할 때, 그때 아름다운 불빛이 튀기는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사실상 앤더슨 감독은 "There Will Be Blood"를 축복도 저주도 아닌 의미로 쓰고 있다. 말 그대로 "그곳에 피가 흐를 것이다." 혹은 "그곳에 석유가 흐를 것이다." 정도로 그저 그곳의 상태를 서술하는 의미로서만 쓰고 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만 보는 앤더슨 감독의 태도는 무관심해 보이고 냉소적이게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스터(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