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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Jan 03. 2020

마스터(영화)

체념하는 용기

논술학원 혹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안내책 등에자주 나오는 방법론이 있다. '글을 쓸 때 특정 대상을 고려해서 써라' 동화를 쓸 땐 어린이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간질간질거리는 연애 소설을 쓸 땐 10대/20대의 감성을 고려해서, 전문지식서를 쓸 땐 지식인들의 통념을 고려해서. 얼핏 보면 매우 타당한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어딘가 장사꾼의 냄새가 풍긴다. 장사꾼은 고객의 요구에 수긍하고 최대한의 만족을 선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곁눈질하고 배려된 몸짓을 취한다. 과연 글을 쓴다는 것이 이것과 비슷해야 할까? 글이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떠한 성역도 존재하지 않는 머릿속 생각들이 이리저리 배열되고 끌려 나온 결과물이다. 세상으로 나오길 우물쭈물 되는 머릿속 생각을 당당하게 실체화시키는 행위의 결과가 글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글은 관념화된 고객을 향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만질 수 있는 친구를 향한다. 그런 친구를 곁눈질하고 고려한다는 것은 웃기지 않은가? 당당히 쳐다보고 꼬우면 한 대 치고 그러다 맞기도 하고 그래도 통하는 것이 있기에 친구다. 나의 글의 대상은 그 녀석을 상정하고 쓰이기에 당당하다. 그 녀석이 '마스터'를 보고 나의 의견을 궁금해한다. 기쁘고도 좋은 일이다.

'마스터'는 21세기 걸작 영화 반열에 당당하게 입성하였다. 영화 광고 포스터에도 '당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명작이 온다!'라고 뻔뻔하게 적어놨다. 이런 당당함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핵심부터 말하자면 영화광들이 일반적인 영화 수용층에게 당당하게 추천해 줄 수 있어서이다. 영화광들은 자신의 취향이 수용되고 널리 퍼지길 고대한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주변 지인과 나눠먹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마스터'는 이 점을 만족스럽게 해소시켜준다. '마스터'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기억은 무엇을 상징하고 그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사이비 종교의 정의는 명확한가? 어떠한 이론을 사이비로 내모는 권한은 어디서 나오는가? 너무 다양하고 쉽지 않은 질문들을 감독은 개시한다. 어떠한 입장에서 혹은 어떠한 상황에서 이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관점은 달라지고 또 그만큼 즐길거리도 많아진다. 영화를 이리 씹고 저리 씹고 하면서 그 풍미를 깊게 음미하는 영화광들에겐 노다지이다. 앞서 말했듯이 '마스터'는 영화광들과 일반적인 관객층을 다양한 볼거리로 연결해준다. 필립 세이프 호프만의 호탕함, 호아퀸 피닉스의 치열함, 에이미 아담스의 아찔함이 얽히고설키어 풀어지는 스토리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기에 툭툭 던져지는 감독의 클로즈업이 더해지면서 이들 대배우들의 연기는 관객의 흥을 돋운다. 또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자신이 활용하는 캐릭터의 설정 틀 안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는 연출력을 선보이기에 관객은 큰 부담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위의 말을 좀 더 풀어보자. 영화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 속 캐릭터 혹은 영화 속 상황 설정을 대리자로 활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것은 감독의 시선이 많이 개입된 장면이다' 하고 느껴지는 부분이 생긴다. 이 부분을 감독이 어떻게 드러내고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영화가 담아내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어떤지 등을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딸에게 머리를 맡기게 된 신애(전도연)는 울던지, 웃던지, 가만히 있던지 어떠한 행동을 해도 이상하지가 않다. 여기서 이창동 감독은 신애에게 성을 내며 미용실 문을 박차고 나갈 것을 명령한다. 그럼으로써 감독은 용서와 관용의 위선적인 면을 폭로한다.

'마스터'에선 이러한 장면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애초에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의 캐릭터 설정이 예측 불가능한 설정이기에(프레디 퀠이 칼로 자신의 손을 내려칠지 야자수를 내려칠지 고민하는 장면, 모래 여자를 보고 자위하는 장면, 직접 제조하는 술 등은 이점을 잘 보여준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프레디 퀠의 선택인 것이지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앤더슨 감독은 지금 상황에서 이 캐릭터가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자연스러운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을 담담하게 카메라에 담아낸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능력이다. 대다수의 망작은 이 능력의 결핍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탕웨이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지구 최후의 밤'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영화 전체가 온통 감독의 시선과 의도로 얼룩이져 지저분한 잡탕이 되어있다. 심지어 그 의도가 너무나도 유치하여 토악질이 나온다.(여기서 잠시 왕가위 감독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은 본인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장면, 대사 등을 거의 어거지로 삽입하여 영화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작위적이지 않고 실로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러한 왕가위 감독을 따라 하다 많은 감독이 나가떨어졌다. 왕가위 감독의 이 특출남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중에 능력이 되면 다뤄볼까 한다.)

어쨌든 앤더슨 감독의 이러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시선이 강하게 개입되는 장면을 하나 찾아볼 수 있었다. 배의 진행 뒤편에 생기는 포말들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장면, 앤더슨 감독은 이 장면을 세 번씩이나 활용한다. 이는 명백히 감독의 시선이 많이 담겨 있음을 말해준다. 나의 '마스터'에 대한 분석은 이 포말 덕분에 가능했고 여기서 시작된다.

감독이 영화 시작을 알리는 장면으로 이 포말 장면을 넣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앤더슨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영화를 3개의 파트로 나누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니체의 시적인 표현력과 그의 사상의 명확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초인으로의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추상화한 문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니체가 말하는 세 단계 변화를 간단하게 풀어쓰면 낙타는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과 선악의 기준들을 짊어지는 존재, 사자는 낙타가 짊어진 것들을 벗어던지고 으르렁대며 반항하는 존재, 아기는 새로움을 창조하는 존재를 말한다. 니체는 초인이 되고자 한다면 위의 세 가지 변화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마스터'로 돌아가 보자. 첫 번째 포말이 일렁인다. 프레디 퀠은 나라가 요구하는 전쟁에 참여했다. 그 무거운 사회적 책임에 그의 허리는 굽었고 그의 양손은 그 허리를 지탱한다. 전쟁이 끝나자 프레디 퀠은 자신이 짊어진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를 절감한다. 타인의 행복한 순간을 담아내는 사진가로서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가 않은 이 이상한 구조에 그는 불합리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새로운 자신의 터전을 찾아 나서지만 그곳에서도 의도치 않게 쫓겨난다. 사랑하는 여인을 져버리면서까지 사회적 책임에 복무한 결과가 이리도 비참하다니, 농장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프레디 퀠의 모습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다.

랭가스터 도드(필립 세이프 호프만)을 만나고 두 번째 포말이 일렁이면서 프레디 퀠은 낙타에서 사자로 변모할 용기를 얻는다. 허리를 지탱하기 위해 얹은 두 손은 공작이 자신보다 큰 동물을 위협하기 위해 펼지는 날개와 같이 위엄이 생긴다. 프레디 퀠은 경찰에 반항하고 모든 여자의 나체를 상상한다. 임신한 여자, 의젓하게 나이 든 여성, 친구의 딸 등 가릴 것 없이 모든 사회적 관습을 무너뜨리고 반항한다. 심지어 그를 거둬들인 랭가스터  도드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페기도드(에이미 아담스)는 이러한 프레디 퀠의 시선을 예리하게 알아채고 조련하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프레디 퀠은 단호하게 랭가스터 도드를 부정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가는 그의 모습은 전처럼 비참하지 않다.

프레디 퀠이 랭가스터 도드가 그리워 그에게 향할 때 3번째 포말이 일렁인다. 허리춤에 두 손을 얹는 그의 독특한 동작은 더 이상 위협하는 동작이 아니다. 랭가스터 도드와 프레디 퀠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서로 마주 보는 장면은 그 의미가 변했음을 말해준다. 타인을 위협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활짝 드러내고 타인을 환영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개방성을 의미한다.

프레디 퀠은 랭가스터 도드에게 자신을 써달라고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랭가스터 도드에게 프레디 퀠은 더 이상 조련의 대상이 아닌 친구이기에, 친구가 자신을 곁눈질하고 배려적인 몸짓을 취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에 그는 애절하게 거부한다. 그러곤 마스터 없이 살 수 있는 길을 알게 되면 알려달라고 한다. 이제 둘은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초인으로 향하는 공동 목표를 지닌 소중한 동지가 되었다. 그 후 프레디 퀠은 랭가스터 도드가 자신에게 했던 치료 과정을 섹스를 할 때 애무 용도로 사용하는 장난기를 보인다. 이 천진난만함은 귀엽기까지 하다.

여기서 이렇게 '마스터'에 대한 해석을 끝낸다면 아마 감독은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를 단순히 니체의 사상을 인용한 영화로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말이 일렁이는 장면을 다시 살펴보자. 인간의 변화 과정, 초인으로 향하는 진행만을 보여주고 싶은 거였다면 배가 물살을 가르는 장면 혹은 배가 힘차게 나아가는 장면을 보여 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앤더슨 감독은 배 뒤쪽에 남겨지는 일렁이는 포말에 집중하였다. 이 지점에서 앤드류 감독과 니체의 차이가 드러난다. 니체는 망각이란 개념을 새롭게 재 조명했다. 흔히 망각이란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는데 니체는 망각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길로 발을 딛을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연인과 이별을 한 후 새로운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잊어야 한다. 한 평생 가슴에 품고 질질 울고 있는 모습은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철학자인 니체의 눈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에는 미래를 창조하는 능력 외에 과거를 망각한 산뜻한 존재라는 의미가 내포해 있다. 이렇게 니체는 삶을 너털웃음을 지으며 산보하듯 걸어가라고 말한다. 반면에 앤더슨 감독은 기억하고 기억한다. 지속적으로 카메라는 인간의 주름을 담아낸다. 과하게 찡그린 프레디 퀠의 얼굴 주름(이 주름은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 그대로 표현된다. 그의 나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랭가스터 도드의 호탕함에 위엄을 새겨주는 이마 주름, 여러 여자들의 뱃살(이 뱃살들이 강조되었기에 임신으로 주름이 잡히지 않은 페기도드의 배가 강조된다. 여기서 그녀의 오묘함과 이질감이 발산된다. 아름답지만 어쩐지 향기가 나지 않는다.) 등을 서스럼 없이 카메라에 담는다.

이러한 감독의 시선은 니체의 사상이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니체는 망각의 산뜻함을 말했지만 거울을 보면 마빡에 새겨진 주름과 이리저리 접힌 살점들이 망각할 수 없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감독이 보여주는 일렁이는 포말이 앞으로의 진행만을 뜻하지 않고 뒤에 새겨지는 흔적이란 의미가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포말 이미지 직후의 숏은 그리움을 자아내는 숏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첫 포말 직후 방탄모를 쓴 프래디 퀠의 아련한 눈빛, 두 번째 포말 직후 도리스의 그리움에 눈물을 훔치는 프래디 퀠, 세 번째 포말 직후 다시 랭가스터 도드에게 돌아온 프래디 퀠의 어색한 몸짓 그리고 그 몸짓에서 풍기는 애절함. 앤더슨 감독의 이 치밀한 숏의 구성은 감탄을 자아낸다.

어쨌든, 그렇다면 감독은 이 인간의 기억, 흔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의문이 생긴다. 애석하게도 '마스터'에선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 지점이 감독의 비범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태어나 삶을 살아갈수록 자연스럽게 주름이 잡히 듯 인간이 지나간 기억을 가지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시골 인적이 드문 카페에 있다 보면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나이 드신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어색하게 커피를 홀짝인다. 그들은 제2의 인연을 제2의 인생을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주고받는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개인적 사정(여기서 말할 수는 없다.) 때문에 꽤나 흥미를 갖고 지켜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가슴에 깊게 남는 장면을 보았다. 서로 커피 한잔씩을 시키고 마주 않은 두 노인은 서로의 전 남편, 전 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쿨함은 뭔가! 이 두 노인은 서로를 반듯이 쳐다보고(커피도 힘차게 마셨다.) 쓴웃음을 짓기도 하고 쾌활하게 웃기도 하며 당당하게 전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애인이란 어찌 보면 삶에 가장 깊은 주름을 선사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패인 주름을 내보이고 또 그것을 바라보며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미칠듯한 쿨함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아름다운 커플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름이란, 삶의 흔적이란 상대에게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어린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을 만나길 꺼려한다. 하지만 나이 든 여자의 화장 지운 모습을 보고 이쁘다 생각 들 때 또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추억을 당당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억지로 새겨진 주름, 기쁘게 받아들인 주름 모든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화장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깊게 패인 주름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니깐. 그저 받아들인다는 이 쿨함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것이다.

앤더슨 감독이 생각하는 어린아이는 미래를 창조하는 능력 외에 새로운 걸음걸이를 받아들인다는 체념이 섞여있다. 그렇기에 니체의 상쾌한 걸음걸이는 될 수 없지만 묵직한 걸음을 통해 더욱 용감함을 보여준다. 니체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벌떡 다시 일어나는 쾌활함을 보여준다면 앤더슨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체념의 무게감에 한참을 뒹굴거리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애처롭게 뒹굴거리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있다면?

프래디 퀠과 랭가스터 도드가 땅바닥에 같이 뒹굴거리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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