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빈딩 레픈 감독의 폭력의 아름다움
현재 한국은 TV 상영 영화에 담배 태우는 장면을 모자이크하고 있다. 영화가 담배 태우는 것을 조장한다는 발상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나는 실제로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에서 장국영과 양조위의 담배 태우는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담배를 태우게 되었다. 그렇기에 영화의 선동성 혹은 모방성에 대한 위험을 일부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내가 담배를 태우고자 마음먹은 것은 해피투게더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우울함, 회의감을 짊어졌음에도 삶의 우아함을 찬양하는 '해피투게더'의 아우라는 그 당시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담배의 해로움과 중독성을 인지 하였음에도 나는 선택했다. 나 또한 삶의 우아함을 만끽해보겠음을 이러한 나의 선택을 조잡한 모자이크로 비아냥되는 것이 나의 마음에 거슬린다. 영화 관객을 나쁜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따라 하는 멍청이로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멍청이가 존재한다. ‘다크 나이트’ 조커의 광기에 도취되어 극장에서 총을 갈기는 멍청한 새끼가 존재한다. 그 멍청한 새끼는 도대체 ‘다크 나이트’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는 초기부터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영화의 자극성은 다른 예술에 비해 쉽고 강하게 수용된다. 눈과 귀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영화관이란 암실 상자로 관객을 유인하여 공감각 까지 사로잡는다. 영화는 명백하게 관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끔 만든다. 공교롭게도 이점이 영화의 특출남이란 것이다. 이것에 우리는 열광한다. 관객을 순식간에 사로잡아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의 마술을 부정하는 순간 영화의 존재는 옅어질 수밖에 없다. 폭력적인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전쟁의 광기에 향수를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자신의 폭력성을 남에게 가하는 나약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감독은 '영화는 현실이 아니란다.' 따위의 비겁한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배트맨이란 코믹 북 히어로를 차용하는 하나의 안전장치를 했다. 관객이 극장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지면에 붙어있는 자신의 발을 보고 '배트맨은 없다!' 하고 느낄 수 있게끔 하지만 그럼에도 멍청한 새끼가 나왔다. 총기 참사에 대한 놀런 감독의 공식 성명 일부분을 보자. "영화관은 내게 집처럼 소중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순수하고 희망찬 공간을 누군가 참을 수 없이 야만적인 방식으로 짓밟았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과 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슬픈 마음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영화관은 영화의 아름다운 꿈을 선사하는 공간인 동시에 현실과 영화를 구분 짓는 것이기에 놀란 감독은 영화관이란 공간이 짓밟힌 것에 대해 분노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에 몰입하여 저지른 사건에 대해선 무거운 책임에 짓눌려 침묵의 애도를 표한다. 이것이 영화감독의 태도이다. 이에 비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태도는 다소 비겁함을 보인다. 그의 영화가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주장에 그는 자신은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며 가볍게 받아넘긴다. 이 가벼움은 영화에서 과하게 뿜어대는 피와 현실적이지 않은 광기 어린 캐릭터로 표현된다. 이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의 특유의 경쾌함과 흥분을 자아내지만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영화를 아름다운 절름발이로 밖에 볼 수 없다. 폭력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고자 하는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영화는 순수예술이라는 어쭙잖은 방패를 드는 것은 추잡하다. 자신의 폭력에 대한 로망을 영화에 폭주시키는 꼴이니 말이다. 이러한 폭주를 경계하고 요리조리 우회하는 과정에서 폭력영화의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찔한 칼날 위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는 무당과 같이 감독은 칼날의 날카로움을 항상 인지 하여야 한다. 아찔한 춤을 선사하는 많은 감독 중 나의 눈에 니콜라스 빈딩 레픈 감독이 보였다. 그의 춤사위를 살펴보기 전에 멍청한 새끼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장자의 호접지몽 내용이다.
'옛날 장주란 사람이 꿈에 나비가 되었다. 활기차게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혼자 유쾌히 뜻에 맞았다. 갑자기 깨니, 막 깨어 난 모습이 장주였다. 알지 못했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차이가 있다. 이를 물화라 한다.'
나비가 되어서 뜻에 맞아 신나게 놀았다. 좋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신났다. 더욱 좋다. 하지만 장자는 읊조린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차이가 있다. 나비와 자신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일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혼자 유쾌한 것이 아니라. 둘이 유쾌할 수 있는 것이다.
니콜라스 빈딩 레픈 감독의 모든 영화엔 폭력이 깔려있다. 하지만 레픈 감독의 폭력을 대하는 태도는 푸셔 시리즈 이후 나온 '발할라 라이징' 부터 변했음을 보여준다. '발할라 라이징' 부터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폭력에 아름다운 미장센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감독의 폭력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어느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 '드라이브'와 '온리 갓 포기브스'를 먼저 살펴보자. 이 두 영화에서 펼쳐지는 폭력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는 동시에 잔인함을 내포해 있다. 흔히 폭력이란 과격하며 피가 난자하고 광기 어린 무엇을 상징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폭발력은 관객에게 힘을 선사한다. 어떤 이를 때려눕혔을 때 온몸에 전해지는 전율과 비슷한 감정을,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폭력을 다루는 대다수의 감독은 주인공의 대담성과 과감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레픈 감독의 폭력은 절제되어있다. 그렇기에 힘의 전달력이 다소 약함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의 강함이 훅! 하고 나에게 전달되지가 못한다. 이는 폭력 위에 우아함을 덧씌우는 레픈 감독 특유의 미장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라이언 고슬링이(두 영화의 주연 배우) 어떤 이를 때려잡을 때 난자하는 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빛 그의 몸짓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주인공이 폭력을 행할 때 혹은 행하기 전후에 보여주는 주인공의 걸음걸이, 손동작, 얼굴 표정에 온갖 미장센이 부가되어 우아한 화보 혹은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게 한다. 이 같은 감독의 연출은 폭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의 에너지보다 다른 감정들을 관객에게 선사하게 된다. 한 남자의 머리를 터질 때까지 짓밟는 라이언 고슬링의 광기 어린 몸짓 이후 이를 두려워하는 사랑하는 여인의 숏 이어짐으로 애잔함을 드러낸다. 자신의 두 팔을 잘리도록 앞으로 내민 라이언 고슬링의 단단한 팔뚝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엄마의 뱃속을 쑤셨던 팔뚝이기에 후련함을 선사한다. 레픈 감독에게 폭력은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어떤 감정을 선사하는 과정에 폭력이 사용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가 잔인하고 사실적인 폭력을 보여주어도 관객이 느끼는 부담감이 덜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레픈 감독은 아찔한 칼날을 마음껏 보여주는 동시에 베이지 않도록 사뿐한 춤사위를 선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감독 치고 왜 그의 영화는 온통 폭력을 다루고 있는 것인가? 지나치지 않은가? 이는 확실히 그가 폭력이란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는 확실히 폭력이 선사하는 힘의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여기서 이제 이 글의 주제이며 레픈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급격히 변했음을 보여주는 '발할라 라이징'을 봐야 한다.
이 영화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6개의 파트로 구분되어 있다. 1.격노 - 2. 침묵의 전사 - 3. 신의 남자 - 4. 신성한 땅 - 5. 지옥 - 6.희생 이 파트의 순서는 불신이 지배하는 세계에 신의 대리인인 예수의 등장과 희생에 대한 일대기를 연상시킨다. 재밌는 지점은 Part1 이 격노라는 것이다. Part1은 원 아이로 불리는 사나이가 자신을 구금하고 감금하여 돈벌이로 사용했던 자들의 창자를 뽑고 머리를 잘라 창에 꽂음으로써 자유의 몸이 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원 아이가 신의 계시를 받아 앞날의 미래를 일부분 볼 수가 있다는 점, Part 6에서 어린 소년을 위해 희생한다는 점을 통해 그가 예수로 상징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이들에게 가차 없는 죽음을 선사한다는 점은 일반적인 예수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갖다 대라는 예수를 자신의 몸에 해를 입히려는 낌새만 보이면 도끼와 칼을 상대에게 쑤셔대는 이미지로 바꾸어버린 레픈 감독의 태도는 꽤나 도발적이다. 우리는 영화 시작 부분에 나오는 글을 유심히 봐야 할 것이다. “시작은 한 남자와 자연이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떠받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지구의 끝으로 이교도들을 몰아냈다.”
그렇다 감독은 신 탄생의 시작과 원인을 한 남자와 자연이라는 대립 구도로 이해하고 있다. 신을 인간이 자연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힘을 즉 폭력을 선사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무시무시한 변덕에 맞서 싸울 수 있게 신은 인간에게 힘을 준다. 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 즉 원 아이에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교도들을 몰아낸다. 마치 세계에서 본인이 가장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UFC 선수처럼 말이다. '발할라 라이징' 에서 자주 보이는 카메라 구도가 있다.
인간의 옆얼굴과 자연의 풍경이 대칭되어 나누어지는 이 구도는 인간이 자연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미지다. 흔히 동양과 서양이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다르다고들 한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동양은 자연을 동화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인 '충사'의 이미지 구도와 앞서 말한 '발할라 라이징'의 카메라 구도를 비교해보면 세계관의 다름이 더 확실히 느껴진다.
충사는 자연의 섭리로 상징되는 벌레(bug가 아니라 이형적 존재이다.)가 사람에게 입히는 피해를 주인공인 깅코가 적절한 타협과 방안을 통해 같이 공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충사의 이미지 구도는 깅코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바라보거나 자연의 품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발할라 라이징'의 카메라 구도는 원 아이의 시선은 자연을 외면하며 화면비율은 자연과 인간을 거의 1:1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을 외면한 그의 시선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신이겄지?) 그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진취성을 보여준다. 신은 인간의 이 같은 진취성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 준다. 이것이 레픈 감독이 생각하는 신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레픈 감독이 생각하는 폭력인 것이다.
레픈 감독의 도발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 아이를 싸움 노예로 부려먹던 족장은 “우리는 많은 신을 가졌다. 그들은 하나의 신만 가지고 있다.” 며 그리스도교의 나약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원 아이는 압도적인 폭력으로 창에 족장의 머리를 꽂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강함을 증명한다. 이렇게나 그리스도교가 강한 이유는 죽은 족장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신의 살점과 신의 피를 먹었다고 하더군 혐오스러워” 무엇을 잡아먹었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을 취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신을 잡아먹었기에 다른 종교에 비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레픈 감독이 신을 폭력으로 생각하는 거 외에 자연과 싸워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이 잡아먹었다는 즉 하나의 도구로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레픈감독에게 폭력이란 영험한 기운이 도는 신성한 도구이며 감독은 이 도구의 자태에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도구의 자태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감독은 어색한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누구보다 강한 전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원 아이가 신의 계시에 따라 무기력하게 아무 저항 없이 죽음으로 희생하는 모습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 쓰임새와 활용가치가 아무리 뛰어남에도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의 명령하에 장인이 있을 순 없는 것이다. 이런 어색함은 ‘발할라 라이징’에서 감독이 신을 즉 폭력을 단순한 도구로만 사용하지 못하고 신의 권능과 권위에 무릎을 꿇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칸트가 그토록 찬미한 숭고미가 나오게 된다.(어린 소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담하게 내던지는 원 아이의 모습은 숭고하다 할 수 있다.) 칸트의 미적 판단에 핵심은 관조이다.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저것이 아름다운지 그렇지 못한 지 뒷짐을 지고 관찰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수 없는 예술 태도 즉 거리를 끊임없이 두는 것은 신이란 개념을 만들어낸다. 신은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며 신과 같은 자태를 뽐내는 예술을 보게 되면 다가갈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런 식으로 수용되는 아름다움이 수용자에게 인간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존재론적 우월성은 우습게도 외부의 파괴적인 광경(신과 같은 자태를 뽐내는 예술)을 보며 거리를 두고 있는 자신의 안전성을 통해 이성적 우월함을 느낀 다는 개념이다. 이것이 숭고미이다. 어째 예술에 겁을 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은가? 레픈 감독은 신의 이미지에 폭력의 냄새를 맡는 대담함을 보여줬지만 끝내는 그것에 압도되어 버렸다.
다행히도 발할라 라이징 이후 레픈 감독 영화에 신의 이미지는 퇴색했음을 보여준다.(이 감독은 또 변화를 시도한다.) 드라이브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입은 점퍼 속 전갈 그림에서, 온리 갓 포기브스에서 태국 경찰이 휘두르는 칼에서 만 신의 권능이 풍긴다. 신은 이제 그의 영화에 조미료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숭고미에서 우아함을 뽐낸다. 이것이 좀 더 나의 취향에 맞다. 숭고미는 신의 자태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우아함은 인간의 자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아함은 숭고미보다 인간적이며 유려하며 섹시하다.(숭고미는 섹시하지가 않다. 인간의 미적 판단에 일정 부분 거리를 두려 한 칸트가 왜 숭고미를 찬양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은가? 섹시함은 다가가고 만지고 싶은 것이다. 거리를 둘 수가 없다. 나는 이게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칸트는 무엇인가 두려움에 인간의 미적 판단에다 신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레픈 감독의 영화는 점점 숭고미에서 우아함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웅장한 멜로디에서 펑키한 멜로디를 자주 활용하는 감독이 되었다.
그의 가장 최신 영화인 ‘네오 데몬’은 이점을 잘 말해준다. 이미 많은 영화를 제작하였음에도 여전히 변화하고 있는 레픈 감독의 연출은 나의 흥을 돋우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로 침샘을 자극시킨다. 섹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