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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Dec 22. 2019

홀리 모터스(영화)

검은 개 보단 아이

 '언더 더 스킨'에서 한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 사실 '홀리 모터스' 이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나에게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다. 나에게 비평은 그 영화와 의도적인 단절 혹은 균열을 내어 마침표를 찍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비평이 완성되었을 때 이제 그 영화와 이별한다는 허무함과 아쉬움이 진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럼에도 써야 한다. 난 현재 새로운 영화에 큰 흥미와 흥분을 느끼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볼수록 내가 여지껏 봐왔던 영화들이 더욱 빛나 보인다.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볼 수 없게 된다니 슬퍼질 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비평은 이별인 동시에 새 출발을 알리는 경쾌한 선언문인 것이다. 나에게 나쁜 느낌을 줬던 영화는 다시는 내 곁에 오지 못하도록 가차 없이 짓밟고 찢어버리자, 나에게 좋은 느낌을 줬던 영화는 애정을 듬뿍 담아 질리게 만들고 도망가게 만들자. 그동안 재밌었다 '홀리 모터스' 쉽게 이별하긴 힘들다. 바이

 레오 까락스 감독 영화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영화는 '홀리 모터스'가 될 것이다. 이는 유독 이 영화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레오 까락스 감독 영화에 나락의 이미지는 있어도 죽음의 이미지는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정적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감독의 10년 정도의 공백 후 나온 '홀리 모터스'엔 죽음의 이미지가 장난스럽고도 징그럽게 깔려있다. 영화 초반부터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강하게 깔려있다. 영화의 도입부에 감독 본인이 직접 출현한다. 감독은 죽어있는지 자고 있는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관객들을 둘러본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모습은 영화감독에겐 지옥일 것이다. 이 씬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존재는 장난스럽게 뛰어가는 아기와 늙고 지쳤지만 포악스러운 검은 개뿐이다. 안타깝게도 카메라는 검은 개한테 포커스가 맞춰진다. 이 검은 개의 질척한 걸음걸이는 케르베로스를 연상시킨다.

 영화 연출기법 중 가장 보편적이며 핵심이라 여겨지는 것은 몽타주 기법일 것이다.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결하며 직접적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철학자는 영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세련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니 말이다. 간단한 예로 어떠한 철학자가 국가의 존재가 전쟁을 발생시킨다는 논리를 표현하고 싶다면 숏 1로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 인물 등을 보여준 뒤 숏 2로 참혹한 전쟁 장면을 보여주면 된다. 이제 철학자가 구구절절 떠들 이유는 사라진다. 단 2 숏으로도 많은 의미의 논리를 담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 영화의 몽타주 기법 쓰임새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대다수의 몽타주 기법은 영화의 유려한 연결을 위주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 인물의 행동을 부드럽게 묘사하는 식으로 관객에게 편안함을 선사한다. 나는 이것을 굳이 몽타주 기법이라 칭할 이유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수많은 숏의 연결을 통해 던져지는 메시지는 고작 차에 시동이 걸렸다, 혹은 A가 B를 주먹으로 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저 영화 카메라를 수 없이 널려 있는 CCTV의 역할 즉 관찰 카메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의 이유는 영화감독이 몽타주 기법의 핵심을 연결로 봤기 때문에 생긴다. 몽타주 기법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씬을 생각해보자. 민간인을 학살 하는 군인의 이미지와 계단의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지는 유모차 이미지가 몇 번씩 반복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군인의 이미지와 아기의 이미지 사이의 이질감에서 생기는 공백이다. 잔악한 군인과 연약한 아기의 이미지는 쉽사리 연결시키긴 힘들다. 결국 관객은 자연스럽게 일시적으로 영화와 거리를 두었다가 두 이미지를 연결시키고 다시 영화로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영화상에선 숏으로 연결되었지만 관객 입장에선 일시적 단절을 느끼고 공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공백을 관객이 채우는 과정에서 군인의 잔악함은 더 도드라지게 된다. 몽타주의 진수를 보여줬다고 불리는 세르게이 감독은 관객에게 단절을 제공한 것이고 연결은 관객이 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몽타주 기법을 숏과 숏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않고 새롭게 말할 수 있다. 숏 1과 숏 2 사이의 단절에서 생기는 공간을 감독이 제시하면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는 것. 관객의 빈 공간을 채우려는 주체성을 자극하지 못하는 몽타주 기법은 그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로 전락된다. 나긋하고 편안해도 존나 재미없는 것이다. 레오 까락스는 현대 영화의 이러한 점을 꼬집는다. 또한 이것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과감하고 재치 있게도 레오 까락스 감독은 숏과 숏의 단절이 아니라 씬과 씬의 단절을 만들어 낸다. 자 이제 죽어있는 관객을 깨우려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감독의 노력을 음미해보자.

첫 씬에 오스카(드니 라방)는 제벌가를 연기한다. 수많은 경호원을 동원하고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총을 사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딘가 지나친 자기 애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씬에 오스카는 돈을 구걸하는 나약한 노파를 연기한다. 굽어진 허리 때문에 땅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한다. 노파는 떨리는 손에 깡통을 들고 자기 비하를 읊조린다. "너무 늙었어요, 두려워요, 안 죽을까 봐" 이 극단적인 두 씬 사이에 생기는 공백을 감독은 관객에게 던져준다. 벤츠 안에서 오스카가 다음에 무엇을 연기해야 하는지 파일을 체크할 때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은 끝음이 올라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감독은 노골적으로 뒤에 이어질 선율을 관객 스스로 채우라고 요구한다. 벌써 감겼던 눈이 떠지고 손가락은 까딱까딱 리듬을 짜내고 있지 않은가? 부족한가?

세 번째 씬에 오스카는 모션 스턴트맨을 연기한다. 센서를 붙인 쫄쫄이 옷을 입은 오스카는 화려한 액션을 뽐내지만 철저한 시스템의 통제하에 이루어지기에 처절하게 보인다. 그러던 와중 지친 오스카 앞에 아름다운 여성이 나오고 둘은 격렬하게 몸을 부딪힌다. 처음으로 자발적이며 야수적인 오스카의 몸짓이 표현되지만 이들의 격렬한 움직임은 결국 그래픽화 된 괴물들의 추한 교배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인간의 행위가 기계의 부품 중 하나로 역할하게 되는 현대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세 번째 씬은 네 번째 씬이 펼쳐지면서 더욱 비참함을 드러낸다. 네 번째 씬의 오스카는 광인을 연기한다. 묘비에 놓인 꽃을 씹어먹고 눈 앞에 거슬리는 장님을 짓밟으며 뻑뻑 담배를 피워대는 광인의 자유분방함에 카타르시즘을 느끼는 동시에 세 번째 씬에 보여준 오스카의 지친 얼굴이 겹쳐진다. 비참하다. 하지만 감독의 재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자를 납치한 광인은 자신의 성욕을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의 노출된 옷을 수선하여 얼굴까지 덮는다. 여기에 광인이 옷을 벗을 때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등 털이 더 해지면서. 순식간에 광인의 유아스러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유아스러움엔 순수함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광인은 발기된 상태로 여자의 무릎에 기대어 잠을 청한다. 자신의 몸 위에 꽃을 흩뿌리는 순수함까지 보여준다. 이에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여자의 입에서 자장가가 흘러나온다. 이렇게 세 번째 씬에 보여준 야수적인 남녀의 몸의 부딪힘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현대에서 우리가 행하는 사랑과 섹스는 아무리 격렬하게 행한다 해도 시스템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던져진다. 사랑이란 단어는 사육으로 변하여 가축의 교배가 행해진다. 우리는 출산율이 떨어지니 애를 많이 낳으라고 말을 하는 이에게 발끈한다. 우리의 발끈은 그들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인간적이라지만 그들은 현실적이다.

 다섯 번째 씬과 여섯 번째 씬이 만들어내는 공백을 차마 글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자존감이 떨어진 자기 자신과 평생 사는 것이 벌이라고 딸에게 단호하게 말한 오스카가 자기 자신마저 잊은 듯 폭발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은 압권이다. 그래 나는 그저 압권이다라고만.... 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이 이후 영화의 색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했던 감독은 이후엔 지치고 늙은 검은 개가 된다. 관객에게 내 맡겨진 피아노 선율 역시 끊긴다. 까딱되던 손가락의 움직임은 멈춘다. 쭉 펼쳐지는 죽음의 이미지에 심장마저 두근대기를 눈치 본다. 레오 까락스 감독은 허탈하게 짖어댄다.

"내가 카메라에 담은 장면은 거짓된 디지털로 치환되어 생명력을 잃는다. 이미 카메라에 담는 순간 거짓된 것이 되어 버린다. 영화를 왜 보고 왜 만드는가?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아름다움은 복사되고 복제된 디지털일 뿐이다. 파리의 아름다운 전경을 TV 화면으로 보고 내 몸을 온화하게 데우는 장작 또한 나를 기만하는 디지털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이렇게 가짜인데 그대가 보는 것도 가짜이다. 그대는 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보는 이가 없는 아름다움은 허황된 몸짓일 뿐이다. 내 감각은 마비되었고 내 몸은 허황되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죽어간다. 반복되고 반복되는 역할만을 수행하다 나의 몸은 이토록 늙어 있다. 하지만 진실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인생은 고작 몇 년일 뿐인다. 이 거짓된 세상에 나는 이제 살 수가 없다. 나의 기억에 담긴 건물들, 추억들은 자본주의의 논리 하에 허물어지고 새롭게 변했다. 애초에 살았었나 의심스럽다. 나는 없다."

(제임스 앙소르의 The Row)


감독은 이렇게 짖어대다 다시 피아노 선율을 켜고 관객에게 시선을 던진다.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오스카는 원숭이 앞에서 행복한 가정을 애처롭게 연기한다. 가장 사랑하고 진실해야 할 가정에서 조차 그는 거짓된 연기를 한다. 진실 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현재 세계에 깊은 회의감에 빠진 감독은 잔인하게도 관객에게 자신의 감정을 퍼뜨린다. 싫어도 현재 세계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감독이 짖어대는 절망의 질문을 받아넘겨야 한다. 두근대기를 눈치 보는 자신의 심장을 침묵 속으로 던져 넣을 것인지 아니면 벌떡 일어나 극장 문을 걷어 찰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답은 각자의 몫이다. 답을 찾은 이는 내 글을 더 이상 읽을 필요는 없다. 나는 애니메이션 망념의 잠드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망념의 잠드에서 이름 없는 자는 외친다.

“적에 대해서 어떤 때 든 조사 하며 귀를 기울이시오.  당신의 적은 그것입니다. 당신의 적은 저것입니다. 당신의 적은 틀림없이 이것입니다. 그 대답의 명쾌함! 적은 예전처럼 갑옷과 투구로 한 번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현대에선 계산자나 고등수학이나 데이터를 응축시켜 산출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인지 그 적은 나를 분발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맞붙으면 다시 그저 미끼 인척 하고 아군인 척하고 그런 걱정이, 게으름뱅이 게으름뱅이 너는 일생 적을 만날 수 없다. 너는 일생 살았다 할 수 없다. 아니 나는 기다리고 있다. 아니 나는 찾고 있다. 나의 적을 적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나날이 우리들을 침범하는 자 만남의 순간이 있다. 우리들의 손톱을 이를 귀도 손발도 뒤집어버린, 적이라고 외치는 게 가능한, 나의 적이라고 외치는 게 가능한 하나의 만남이 분명히 있다.”

이름 없는 자의 태도는 존경스럽다.(다만 적을 찾으려고 할 뿐) 모든 것이 거짓되었음을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을 진실하게 봐줄 이를 찾는다. 결코 나약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이름 없는 자는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 볼 타인이 없으면 자신 또한 진실하게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찾아 헤맨다. 그런 그에게 망념의 잠드의 주인공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이름을 준다. 이로써 이름 없는 자는 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찾아 나선다.

레오 까락스 감독 역시 사랑이 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시인한다. 나이 들어 죽어가는 오스카가 마지막으로 "사랑을~"하고 외치지 않는가. 하지만 감독에겐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다. 너무나도 무기력하다. 그렇기에 오스카가 외치는 "사랑을~" 은 허공을 향한다. 내 이름 석자는 타인이 불러주지 않으면 너무나도 무의미하다. 허공에 "사랑해"라고 외치는 것은 결국 자기 귀로 돌아올 뿐이다. 흔히 ‘자기 자신을 사랑해라 그러면 사랑하는 이가 찾아질 것이다.’고 한다. 순 거짓말이다. 타인이 보지 않고 불러주지 않고 만져주지 않는 자신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지? 먼저 우리는 이름 없는 자와 같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마주치고 소리치고 부딪혀야 한다. 그것이 먼저다. 그다음 타인이 나를 진실하게 봐주고 나 또한 그 타인을 진실하게 본다면 거짓과 진실은 너무 쉽게 구분된다. 그와 나 사이는 진실이고 나머지는 거짓이 된다. 아니 거짓 또한 되지 못하고 무의미한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구분법은 이렇게 허물어진다.

망념의 잠드에서 우리는 이름 없는 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준 주인공의 비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이름 없는 자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연인이 불러줄 소중한 이름을 건네주고 연인이 자신을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름을 주는 동시에 연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도 사라지고 연인을 만나지 못한다. 결국 주인공은 딱딱한 돌이 되고 연인은 허공에 사랑한다고 외친다.

검은 개가 되어 짖어대는 레오 까락스를 보면 다음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까? 하고 걱정이 된다. 하지만 레오 까락스의 카메라 포커스가 검은 개에 집중되어 있다 하여도 그는 천진난만한 아이 역시 보여 주었다. 이점은 충분히 희망적이다. 현재 레오 까락스의 고민은 그 특유의 재치로 해결할 것이라 믿는다. 나는 다시 그의 광적이며 아름다운 사랑의 이미지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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