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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Dec 11. 2019

언더 더 스킨(영화)

있어 보이는 영화는 어떤 것인가

전위 예술이란 기존의 관습과 전통을 뒤집음으로써 새로운 무엇을 제시하는 형태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 연출 쪽에서의 전위 영화는 오히려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흔히 무비, 시네마, 필름, 영화(映畵) 등으로 불리는데 무비와 시네마는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며 필름과 영화는 사진과 그림이라는 시각적 요소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초장기 영화는 시각적 표현의 동적성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이후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오게 되면서 영화는 문학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특성 일부분을 다뤄야겠다. 모든 예술은 스토리를 탄생시킨다. 앞서 나는 영화 '비몽'을 비평할 때 스토리의 순간적, 일시적 발생을 지적한 바 있다. 이를 좀 더 광범위하게 표현하게 되면 감정의 발현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떠한 그림을 관람할 때 그 작품에서 풍기는 아우라로 인해 수용자는 특정한 감정이 발현된다. 이러한 감정의 발현은 수용자 개인의 경험 즉 스토리를 자극시킴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결국 예술가는 어떠한 스토리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는 수용자의 수많은 개인적 스토리를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예술은 예술가의 의도성과 예술작품의 추상성 이 두 가지의 줄다리기 구도가 만들어진다. 예술가의 의도성이 증가될수록 스토리의 방향성과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지지만 편협한 작품이 될 위협이 있다. 반대로 예술 작품의 추상성이 증가될수록 수용층의 폭이 넓어지며 다양한 스토리를 함유할 수 있지만 오해와 왜곡의 위협이 따른다.(심하면 아무것도 수용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예술에서 적당한 타협이나 탁월한 선택을 행하는 예술가의 촉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다. 이 촉이 예술가의 숙명적 고민이며 능력의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같은 예술가의 고민을 효과적으로 일부 해소시키는 영리한 방식이 있다. 흔히 소설, 이야기 등으로 표현되는 문학성이 가미된 예술이다. 이 같은 예술의 대표 격인 소설로 범주를 좁혀서 생각해보자. 소설은 수용자가 개인적 경험을 상기시키는 주체적 행위 일부를 예술가가 대신 맡아 경험 자체를 창조한다. 이럼으로써 추상성으로부터 생기는 위협이 일부 사라진다. 또한 소설의 범주와 양이 증가되는 동시에 의도성으로부터 생기는 위협 또한 일부 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성이란 단어를 경험 자체를 창조하는 방식이나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문학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도화되고 발전되어 기승전결, 인칭구분, 은유, 액자 형식 등의 작법을 통해 스토리를 발생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화는 소설의 황금시대 이후의 예술답게 문학성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무성영화 시대 때 어쩔 수 없이 억압된 문학성의 표현이 유성 영화 시대에서 폭발하게 된다. 영화는 소설의 문학성을 더욱 스펙터클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감 없이 뽐내기 시작하면서 소설의 확고한 위치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 문학성이 풍기는 은밀한 위화감을 느끼는 예민한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문학성의 가장 큰 매력은 예술가, 수용자 둘 모두가 큰 불만 없는 편리성을 제공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편리성은 예술가의 숙명적 고민의 깊이를 얇게 만들며 수용자의 주체성이 거세되어 수용자의 안일하고 게으른 수용 태도를 허용한다. 문학성의 편리에 위화감을 느낀 예술가의 작품 두 개를 통해 문학성이 가진 양날의 칼날을 더욱 통찰해보자.

(허진웨이의 현실의 잔광)


_/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_/

 이 소설은 수용자의 게으른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기존의 문학성에서 발전된 소설 기법을 깡끄리 무시하고 오직 6 인물의 시적 독백과 작가의 시적 에세이로만 구성되어 있다. 인물의 주변 상황, 심리 상황, 피상적 물체 등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 묘사도 생략되어 있다. 이런 상황이니 처음 이 소설을 읽게 되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수 없이 읽었던 문장을 반복해서 읽거나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면서 앞의 내용을 복귀하기도 한다. 그러다 나는 몇 번씩 책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소설 전체에서 풍기는 위엄을 무시할 수 없었고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려 생각날 때 한번, 두 번, 세 번.... 읽게 되었다. 나의 개인적 경험의 양과 질이 바뀌어 갈수록 이 소설 또한 변하게 되었다. 처음엔 황망한 인생의 무기력, 두 번째엔 소박해 보이는 무엇인가가 나의 삶에 크게 자리 잡은 따뜻함 세 번째엔... 더 이상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직 나의 개인적 감상만을 열거하는 꼴이 된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읽으면 이 책은 그 사람에 맞추어 변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비평의 단계를 뛰어넘었음을 보여준다. 어느 카테고리에 포함되는지 어떤 거와 비교를 하여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한다. 그저 수용자의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것이다. 이렇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파도는 문학성이 거세시킨 수용자의 주체성을 회복시키고 있다.

_/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 _/

 이 영화는 예술가의 숙명적 고민으로의 회귀와 전위 영화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레오 까락스는 영화 시작 부분에 감독 개인의 상황과 그동안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홀리 모터스'가 굉장히 개인적인 영화라는 것을 선포한다. 이미 이 부분에서부터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문학성의 성격을 거부했음을 보여 준다. '홀리 모터스' 주인공인 배우 드니 라방은 벤츠 안에서 몇 번씩 새로운 캐릭터, 역할을 요구받는다. 그때마다 영화에는 새로운 스토리가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문학성의 대표적 기법인 기승전결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연출을 통해 레오 까락스는 예술의 의도성과 추상성의 줄타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감독의 예술적 고민을 엿볼 수 있게 된다.(후에 '홀리 모터스'는 따로 독자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그때로 미루겠다.)

이동진 평론가는 '홀리 모터스'의 운동성에 집중하며 감탄을 표한 적이 있다. 영화 중간중간 편집되어 있는 무성영화 장면과 드니 라방의 캐릭터의 변화에 따라 역동하는 카메라 연출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찬사를 보냈다. '홀리 모터스'는 문학성에 의존하여 스토리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혹은 영화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운동성을 통해 스토리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운동성은 글로 표현하기가 참 난감하다. 비평 또한 문학성에 의존하는 예술이라 그 한계를 드러낸다. 그저 드니 라방의 동적인 연기와 그것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동적인 연출의 합이 훌륭하다고 밖에 할 뿐이다. 이러한 비평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홀리 모터스'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레오 까락스는 영화 연출 쪽에서 중요시 여겼던 씬과 씬의 연결을 통해 스토리를 탄생시키는 영화 고유의 예술적 표현을 훌륭하게 활용한다. 이 지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편집 부분은 아버지라는 역할에서 풍겨오는 회의감을 드니 라방의 표정, 지친 듯 터벅터벅 걷는 몸짓으로 표현하는 장면>entracte(중간여흥)인서트>손을 푸는듯한 동적인 장면 인서트 이후 드니 라방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 장면 순으로 구성된 지점이다. 이는 드니 라방의 연기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을 해소하는 장면 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시선이 드니 라방에서 관객으로 순간 역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후에 이 부분을 더 자세하게 따로 서술하겠다.)

이를 통해 수용자에게 폭발적인 스토리 혹은 감정을 선사해 주는 동시에 관객에게 영화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오직 영화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스토리를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렇게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통해 전위 영화의 영화의 전통적 표현으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의 고유성인 운동성을 통해 수용자에게 스토리를 선사한다. 이는 현재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예술 표현이며 문학성에 대항할 수 있는 영화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기도 하다.

(가브리엘 뮌터의 kandinsky’s Der Blaue Reiter)


지금 적고 있는 글의 제목은 모두가 알다시피 '언더 더 스킨' 이다. 그럼에도 '언더 더 스킨'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을 적는데 지면을 크게 할애한 이유는 내가 주제를 망각했거나 '언더 더 스킨'을 단순한 소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대부분의 비평가가 극찬을 한 영화를 비난할 것이다. 또한 나에게 비평가의 꿈을 처음 심어준 이동진 평론가의 비평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무게감을 느끼고 있으며 살짝 쫄아 있다.

'언더 더 스킨'을 본 후 별생각 없이 여러 사람들의 감상평을 보고 있다. 덜컥 눈에 띄는 짧은 평을 보았다. '있어 보이는 영화 그래서 좋다'(정확한 코멘트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와 비슷한 뉘앙스였다.) 있어 보인다는 감상평에 급격히 공감이 되는 동시에 '그게 왜 좋다는 거야?' 라는 의문이 생겼다. 있어 보이게 만드는 예술가의 기만과 그것을 보고 솔직한 감상을 표현하지 못하는 수용자의 비겁함에 울컥하였다. 나는 이러한 기만과 비겁함을 생성시키는 '언더 더 스킨'을 비평하기로 생각했다. 글의 시작은 '언더 더 스킨'에 찬사를 보내는 이동진 평론가의 비평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려 한다. 이동진 평론가는 앞서 '홀리 모터스'의 운동성의 표현을 보며 극찬을 하였다. 그런데 어찌 이리 정적인 영화에도 역시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 '언더 더 스킨'의 스토리를 탄생시키는 방식을 보자면 문학성을 배제하려는 전위예술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어설프며 영화로 표현되어 오히려 더욱 허접하게 보인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문학성을 배제하는 방식은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를 이용하여 영화 예술을 그림이나 조각 예술로 치환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특히 조각예술에 치중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스칼렛 조한슨의 몸 전체를 풀샷으로 찍어 낸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은 슬로우 효과로 느껴질 정도로 배우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억제되어 정적으로 표현된다. 또한 스칼렛 조한슨의 노출이 강해지는 장면에서 정적인 표현 역시 강해지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조각 예술을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토퍼 빌헬름 에케르스 베르크의 작품)


조각예술이 꽃을 피우던 시기에 조각가는 사람의 인체에 대한 아름다운 비율, 굴곡, 조화 등을 조각상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으로써 예술가의 머릿속에 구상된 인물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아우라를 표현하였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스칼렛 조한슨의 몸이 풍기는 아우라를 영화 속에 담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어설픔을 드러낸다. 조각상화 된 스칼렛 조한슨이 뿜어내는 스토리는 스타의 전라를 보고 싶어 하는 저급한 욕망만을 자극시킨다. 나머지 스토리는 전적으로 원작인 소설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오직 조각상화 된 스칼렛 조한슨으로부터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외계인의 비애, 정체성의 혼란으로 부터오는 불안감, 외계인으로서 인간의 정서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따뜻함 등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원작 소설에 대한 정보가 가미되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결국 전라의 스칼렛 조한슨은 관능미만을 애절하게 뽐내고 있다. 기승전결 즉 이야기의 맥락을 파괴하여 문학성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한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애처롭게도 원작 스토리를 붙잡고 있다. 그러면서 아닌 척 시치미를 떼는 엄마 치마 속 자존심 쎈 아이 같은 면모를 보인다.

이 같이 어설퍼 보이는 이유는 조각예술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영화의 필연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영화 내적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그저 조각 예술을 영화의 시각적 기능을 이용하여 옮겨놓았을 뿐인 것이다. 3D인 조각상을 2D로 옮기는 과정에서 입체감은 소멸되고 동시에 굴곡, 비율, 조화 또한 일그러진다. 또한 영화는 스크린을 통한 2차적 공간을 제공하는 예술이기에 조각예술에서 느낄 수 있는 현장감 또한 관객에게 온전히 제공하지 못한다. 이렇게 현장감의 부재는 조각상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질감의 부재를 낳게 된다.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너선 감독은 이를 배제하였다. 훌륭한 조각상은 냄새를 풍긴다고 한다. 아우라란 수용자의 모든 감각을 지배하는 무엇인 것이다. '언더 더 스킨'에서는 무엇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야동에서 영화와 같은 영상물이 입체감을 살리지 못하는 한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내가 말하는 야동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만을 말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와 육감적인 몸을 소유한 여성이라도 영상물 안에서 존재 자체 만으로 수용자에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온전히 선사하지 못한다. 결국 배우는 작품이 늘어날수록 가학성과 특정한 캐릭터를 요구당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 점에서 야동은 저급한 것이 된다. (야동 또한 작품성을 신경 쓰는 위대한 감독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럼에도 필연적으로 저급함을 드러낸다.) 결국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를 조각 예술로 치환시켜 문학성을 탈피하려는 노력은 영화의 생명인 운동성만을 죽인 것이 되며 동시에 야동에서 풍기는 저급함 또한 보여주게 된다.

 이제 처음 질문이었던 이동진 평론가가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와 그것을 부정해보자. 이동진 평론가는 감독의 이질적 연출을 지적한다.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진행된 실험적인 연출, 과감하게 지워버리는 배경, 줄거리 맥락을 감추는 독특한 연출 등 이 모든 것은 문학성을 탈피하려는 감독의 노력들이다. 여기서 이동진 평론가는 이러한 감독의 이질적 연출을 통해 '낯섦'이 부각되면서 '언더  더 스킨' 이 예술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이입과 공감이라는 것을 해체한 메타 예술을 선보인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에 이입과 공감 즉 몰입을 하지 못했음을 자백한다. 그럼에도 그가 영화에 극찬을 하는 이유는 원작 소설의 문학성이 작용하여 감독의 이질적 연출을 외계인의 이질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앞서 나는 어설픔이라 지적하였다. 또한 실제로 영화 만으로는 스칼레 조한슨이 외계인인지, 로봇인지, 종교 단체 혹은 어떠한 집단의 소속원 인지 알 수가 없다. 나에게 감독의 이질적 연출은 그저 다른 감독의 특색 있는 연출을 짜깁기 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은 홍상수 감독의 연출을, 잔인한 장면을 과한 미장센을 이용하여 아름다움으로 변모시키는 연출은 니콜라스 웨딩 레폰 감독의 연출을, 장면과 음악을 비대칭적으로 사용하여 이질감을 주는 연출은 린 램지 감독의 연출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고유의 특색 있는 연출로 보이지 않는 것은 '언더 더 스킨'에 사용된 연출력에서 (앞서 말했듯이) 스토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동진 평론가는 감독은 왜 스칼렛 조한슨을 캐스팅 하였는가? 라는 질문에서 감독이 스칼렛 조한슨을 캐스팅하여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섹슈얼리티를 의도적으로 탈색시키므로 낯선 이미지를 생성시킨다고 하였다. 이점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얼마나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였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영화의 반 이상이 스칼렛 조한슨의 관능미만을 보여주며 그 관능미를 이용하여 남자를 사냥하는 내용이 영화의 가장 핵심 줄거리임에도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탈색시킬 리가 없다. 그렇게 보였다면 감독의 연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감독이 스칼렛 조한슨의 타 미모 배우와 달리 육감적이며 질감 있는 몸매의 소유자임에 끌린 것이라 생각한다. 한동안 여성에 대한 아름다움이 길쭉하게 시원한 느낌을 주며 센치하게 마른 몸매를 가진 현대적인 여성미에 고착화되었을 때 스칼렛 조한슨의 등장은 중세 시절 선호되던 육감적이며 통통한 여성미의 재 발견을 선사하였다.(그런 그녀의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여성미가 사회적으로 관용되었다.) 감독은 이러한 그녀의 이미지에 끌린 것이다. 하지만 그 쓰임새가 어설펐던 것이다. 그러니 영화 포스터에 '그녀가 벗는다' 따위의 한심하고 저질스러운 광고가 성립되는 것이다.

'언더 더 스킨' 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주제가 껍데기를 다루듯이 영화감독의 있어 보이는 연출의 껍데기를 잘 보여준다. 이 점을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면 감탄의 박수 한번 해줄 수 있다만 나의 2시간을 이러한 영화에 소비할 이유는 하등 없다. 그럼에도 나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이렇게 영화를 실컷 까내리고 하는 말이라 우습지만 진심이다. 앞서 나는 감독을 엄마 치마 속 자존심 쎈 아이라 비유하였다. 아직 엄마 치마 속이라 그 아이의 자존심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다. 치마 속에서 벗어난 그 아이의 자존심은 어떠한 형태를 띌 것이며 빛이 날 가능성이 있다. 나는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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