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현 Dec 03. 2019

케빈에 대하여/쥐잡이꾼(영화)

비범한 길.

 어쩌다 이름 모를 자와 영화 조커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그는 조커에서 계몽주의적 활기를 느꼈고 그것에 흥분했다고 말했다. 나는 계몽주의는 이미 생명력이 다한 사상이며 조커는 오히려 그 사상의 환멸을 보여주는 것이다며 반박했다. 대다수의 토론이 그렇듯 서로 찜찜함만 남긴 체 어영부영 끝이 났다. 토론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아 많은 생각들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부풀릴 수 있을 만큼 부풀린 뒤 핵심과 방향성을 찾아가며 부피를 줄여갔다. 계몽주의와 엘리트주의의 차이 부분에서 생각은 더 날카로워졌고 린 램지 감독의 엘리트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많은 답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앞으로의 글은 앞서 적은 나의 생각 흐름을 보여 줄 것이다.

 현재 계몽주의 사상의 생명력은 다 하였다. 계몽주의는 17c, 18c 유럽을 대표하는 사상이다. 심지어 학계에서 계몽시대라는 시대적 구분까지 하였다. 예민한 사람은 이미 이 지점에서 생명력이 다 하였음을 느낄 것이다. 위대한 사상에 시대 구분은 용이하지 않다. 유럽의 17c, 18c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어보면 사유재산의 범용적 인정으로 인한 계급의 경계선이 약해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계의 흐릿함으로 인해 엘리트 계층과 하층민 계층은 뒤섞이고 여기서 생기는 다양한 사건과 심리를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계급의 초월로 인해 개인의 욕망이 솟구치다 계급적 차이를 느끼며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고 졸라의 ‘나나’는 돈과 섹스를 부각시켜 엘리트 계층과 하층민 계층의 비슷한 천박함을 묘사한다. 이 같은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관심은 어떠한 사상이 아니라 엘리트 문화와 하층민 문화의 차이, 그 접점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상 계몽주의 사상은 누군가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외침이며 무엇을? 어떻게? 에 대한 알맹이 없이 목정성만 드러낸다. 이는 계몽주의 사상을 엘리트 문화와 하층민 문화의 교류에서 발생하는 혼란 속 외침 중 일부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순수한 의미인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라는 것에 좀 더 집중해보자. 어떠한 사람이 지식을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얻은 지식의 결과로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전과 달라 진다. 이 자연스러움이 진정한 지식의 정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깨우침엔 수용자의 주체성이 가장 중요하다. 지식을 수용하겠다는 생각으로 수용하여야 하며 그 지식이 가치가 있다면 수용자는 변한다. 계몽주의 사상은 이 자연스러움이 무디다. 어리석은 자를 깨우친다는 즉 전수자의 주체성을 강요하는 꼴을 보인다. 알맹이 꽉 찬 지식을 억지로 전파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훌륭한 지식엔 수용자가 알아서 모이게 될 것이다. 혼란의 시기엔 부자연스러움이 왕왕 탄생하며 문화의 교류는 지식의 교류 또한 의미한다. 계몽은 이 같은 메커니즘에서 탄생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엘리트 계층과 하층민 계층의 문화적 차이는 희소하며 그 차이 또한 인정은 아니라도 서로 이해는 할 수 있는 상태이다. 계몽주의 사상은 목소리를 잃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엘리트의 존재는 무엇인가? 계몽주의 사상의 죽음과 동시에 엘리트의 존재 의미 또한 부정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린 램지 감독의 시선이 필요하다.

(문세희의 breath6)


 린 램지 감독의 대표작은 역시 ‘케빈에 대하여’로 볼 수 있다. 감독 특유의 연출과 스토리 텔링 능력의 완성도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의 타 작품에 비해 엘리트로서의 태도와 그 방향성을 지적하는 강도가 강해졌다고 느낀다. 그것이 무엇인지 보기 전에 린 램지 감독이 생각하는 엘리트의 정의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감독의 초기작인 '쥐잡이 꾼' 에서 알 수 있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인 어린 소년이 의도치 않게 자신의 친구를 익사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후 소년이 느끼는 죄책감을 잠시 보여준 뒤 소년의 환경을 묘사한다. 소년이 살고 있는 동네는 정치적 이유로 쓰레기 수거가 되지 않아 쥐와 위생병이 들끓을 정도로 여기저기 쓰레기가 쌓여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무능한 주정뱅이이며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불륜도 모른 척할 정도로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소년의 큰 누나는 몸을 팔고 있는 듯하게 묘사된다.(몸을 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몸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연출이 이루어진다.) 그런 누나를 보며 제임스(주인공인 소년의 이름)는 섹스의 은밀함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제임스는 가정에서 자신의 여동생인 마리와만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이 감독은 제임스 주변의 무능함을 제임스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제임스의 시선은 가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친구, 동네 건달, 주변에 널린 쓰레기들로 확장된다. 이렇게 쓰레기 더미에 둘러 싸인 제임스는 우연히 마가렛을 알게 되고 그녀를 통해 섹스와 사랑을 알게 된다. 제임스는 어린 나이에 죽음과 섹스를 일찍 깨우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감독의 시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임스는 주변인들에 비해 영민함을 드러내고 주변의 무능함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영화 후반부에서 동네의 쓰레기가 치워지는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마가렛이 일종의 강간을 당하고 ('일종'이란 단어를 쓴 것은 마가렛이 그 같은 강간을 어느 정도 동의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이 친구를 죽였다는 것이 주변에 폭로되면서 자신의 악행을 깨닫는다. 감독은 모든 것을 알게 된 제임스를 자살시킨다. 이것이 린 램지가 생각하는 엘리트이다. 제임스는 우연한 사건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였고 그것을 영민하게 소화해낸다. 하지만 아직 그는 힘을 갖추지 못하였다. 지식의 수용과 동시에 행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어린애인 제임스는 그 만한 힘을 갖추지 못하였다. 감독은 단호하게 그런 제임스를 자살시킨다. 물론 감독은 어린애인 제임스에게 일종의 자비라 볼 수 있는 장면을 영화 끝 부분에 연출한다.(제임스가 자신의 집이 되었음을 바라던 빈 집으로 이사 가는 장면을 삽입하였다. 하지만 이 장면은 제임스의 장례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을 린 램지 감독은 잘 활용한다.)

린 램지 감독에게 엘리트는 남들보다 뛰어난 영민함과 그것을 발전시킬 만한 경험을( 린 램지 감독은 그 경험을 죽음과 섹스로 본다.) 갖춘 자이다. 즉 텔런트의 유무로 판별하는 것이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견해이다. 더 엄격한 통찰을 통해 감독은 엘리트로서 행동을 단호하게 요구한다. 지식을 갖춘 자가 그것을 행동을 통해 표현하지 않는다면 엘리트가 아니다. 차라리 무능한 것이 나은 것이다. 적어도 자신을 기만하진 않으니깐. 제임스는 자신을 기만할 것을 허용치 않고 자살을 한 것이다.

감독의 이 같은 단호한 행동의 요구는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더욱 냉철하게 표현된다. 에바는 영민한 두뇌를 소유한 여성이며 능력 또한 탁월하다. 하지만 아둔한 플랭클린과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에바가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안일한 삶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독은 이런 에바를 에바의 아들인 케빈을 통해 잔인하게 질타한다. 케빈은 갓난아기일 때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존 위협을 느꼈고 섹스의 과정을 어린 나이에 일찍 깨우친다. 이런 영민한 케빈의 눈에 에바의 행동은 기만 투성이다. 케빈은 솔직하지 못한 에바의 행동을 정확히 인지하고 강력한 행동력으로 비난한다. 동시에 에바의 솔직함을 인지하면 에바에게 애정을 선사한다. 이러한 관계를 엄마와 자식 간의 관계로 표현하는 린 램지의 대담함은 영화 내내 소름을 끼치게 만든다. 나는 여장부란 단어에 어떠한 성차별적 요소를 제거하고 린 램지를 그렇게 부르고 싶다. 내가 아는 최고의 여장부이다.

 린 램지 감독의 행동의 요구는 엄밀하다. 에바의 위선을 끊임없이 비판하던 케빈은 결국 자신의 아버지(프랭클린)와 여동생을 죽이고 체육관 안에서 학우들에게 화살을 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이는 케빈의 영민함을 보여준다. 에바가 자신과 물리적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알게 된 케빈은 이 같은 끔찍한 일을 통해 에바의 위선을 지적할 대리자를 만든다. 결국 에바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고난을 겪으며 저들의 무지함과 자신의 특별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로써 케빈이 만든 대리자는 에바 스스로가 된다. 하지만 이는 또한 케빈의 미성숙함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케빈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어린 시절 입었던 작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감독은 냉철하게 케빈의 미성숙함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 그 같은 끔찍한 짓을 하였는지 묻는 에바의 질문에 케빈은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모르겠다고 씁쓸하게 답한다. 케빈은 어머니의 위선에 집착하다 자신의 미성숙함, 즉 자신의 애정 결핍을 인지하지 못한 무능함을 깨달은 것이다. 감독의 요구는 이 같이 엄밀하다.

린 램지 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케빈의 출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케빈의 방을 정갈하게 정리하는 에바를 통해 에바의 비범함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비범하기란 이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린 램지 감독의 엘리트에 대한 엄밀한 요구는 엘리트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또한 린 램지 감독의 엄밀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엘리트가 있다면 그의 지도에 따를 것이다. 분명히 그런 사람은 있을 것이며 이 세계에 필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의 업적은 위대 할 것이다. 가끔 무조건적으로 엘리트에 대한 혐오를 표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세계가 공평하다는 판타지를 가지고 사는 망상 환자 이거나 열등감에 찌들어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자들이다. 엘리트는 엘리트만의 길과 고난이 있다. 이 점을 인정하자.


작가의 이전글 엘리펀트(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