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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Nov 27. 2019

엘리펀트(영화)

무료한 살인을 무력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묵직함

엘리펀트는 미국에서 종종 발생하는 총기 참사에 대한 영화이다. (종종 발생한다니... 종종이라는 가벼운 어휘를 쓴다는 것이 꺼려지지만 앞으로 적을 영화 분위기 때문에 사용해 본다.) 영화 구성은 범죄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사건 발생 전 일들을 되짚어 본다. 엘리펀트는 11명의 인물들의 사건 발생 전 행적을 시간을 몇 번씩 되돌려 가며 살펴본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사건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대부분은 인물의 등 뒤를 무력하게 따라다닐 뿐이며 그들의 행적에 특별한 범죄적 냄새를 느끼긴 힘들다. 그저 긴 롱테이크로 담담하게 인물들의 행적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다 영화 끝 부분에 2명의 학생이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극적인 장면 역시 앞에서 보여준 방식과 동일하게 담담하게 찍는다. 마치 앞서 학교 내부 구조물을 살핀 것을 다시 복귀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카메라에선 특별한 의도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무력함과 무료함이 영화 내내 지속된다. 이런 감독의 연출은 일부러 범죄사건의 원인을 회피하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2명의 학생이 무장한 채 학교 내의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이 끔찍한 사건을 감독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보는 것일까? 이 질문에 어느 정도의 답이 머릿속에 정리되었을 때 '엘리펀트'의 묵직함이 크게 와 닿았다.

(김대수의 bamboos frome the people)


 앞서 나는 종종 총기 참사가 발생한다고 했다. 미국에 가본 적도 없고 거주하지도 않았기에 안일한 생각에서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당사자들 에겐 이런 끔찍한 일이 종종 발생한다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나는 절대 당사자 앞에서 "종종 발생하네요" 라고 능청스럽게 떠들 수 없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영화로 용기 있게 말한다. "자주 발생하며 이젠 익숙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능청스러움엔 깊은 분노가 담겨 있다. 영화에서 감독이 굳이 총기 참사에 대한 원인을 찾아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총이 팔리고 있으니 총기참사가 발생한다는 이 간단한 이유를 모를 수는 없다. 하지만 몇몇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다. 그러곤 원인을 학교 내 왕따, 사회 부적응, 폭력적인 게임, 극우화 성향 등으로 찾으려 한다. 감독은 본인 스스로가 영화로 이 같은 우둔한 짓을 반복하면서 이들을 조롱한다.

구스 반 산트

무책임한 술 주정뱅이 아버지, 학생의 상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권위적이기 만한 선생님, 선남선녀 커플이 주변에 주는 열등감, 10대들의 비정상적인 다이어트, 학생 내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험담과 폭력, 폭력적인 게임, 쉽게 접할 수 있는 나치의 극우화 문화 이 모든 것이 영화 속에 담겨있다. 몇몇은 이것이 원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평범한 일상으로서 카메라에 담는다. 위에 열거한 일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인물의 캐릭터가 어떻게 바뀌는지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저 인물의 일상 중 하나일 뿐으로 담담하게 보여준다. 감독은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그저 슬쩍 더듬어 댈 뿐이다. 오히려 실질적인 사건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일부러 숨기고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취한다. 히틀러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이 상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 위로 총을 배달하는 배달원이 초인종을 누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장면이 앵글의 구석진 곳에 담겨 있으며 초점도 맞지 않는다. 총을 건네주는 배달원의 모습 또한 의도적으로 담지 않는다.

 감독은 확실히 사건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이렇게 됐을 때 시간을 계속 돌리며 영화 속 인물을 보여주는 연출은 평범한 일상을 누렸던 이들을 그리워하는 추모식이 된다. 그렇기에 감독은 무력하게 떠나보낸 이들을 무력하게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간중간 무력함을 해소하기 위해 감탄이 나올 정도의 훌륭한 카메라 연출이 나온다. 카메라를 고정하여 제한된 앵글 안에서 슬로우로 진행되는 배우들의 연기, 치밀한 카메라 동선을 통해 배우들의 동선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드는 연출까지 하지만 이러한 훌륭한 연출이 뜬끔없으며 과장되게 표현된다. 이러한 연출이 스토리 진행과 매치가 안되게 되면 관객은 카메라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는 연출의 미숙함에서 나오는 실수로 볼 수 있지만 '엘리펀트'에서는 의도적인 연출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관객에게 어필한다. 관객에게 카메라가 인식되는 순간 관객의 심리적 공간은 앵글 밖으로 튕겨진다. 이는 영화의 몰입력을 급격히 떨어뜨리며 관객이 영화 속 인물에게 느끼는 동질감을 무너뜨린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관객과 영화 속 인물 간에 거리감을 만듦으로써 관객에게 무력함을 전달한다. 결국 관객은 최소한 저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던지며 응원할 힘 조차 거세된다. 예쁘게 포장하여 건네지는 감독의 선물엔 끔찍한 무력함이 담겨 있다. 이런 감독의 선물은 하나 더 존재한다.

 엘리어스가 존의 사진을 찍을 때 미쉘이 그들 곁을 지나치는 장면을 3번 씩이나 보여준다. 큰 의미 없는 장면이 3번 씩이나 반복되면서 영화 외적인 의미가 만들어진다. 시종일관 무력함을 드러내던 감독이 시간을 과거로 돌리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카메라 각도만 바뀔 뿐 정확히 똑같은 장면이 반복될 뿐이다. 반복하면 할수록 돌이킬 수 없다는 무력함만이 커질 뿐이다. 소중함과 아픔이 같이 공존한다.

알렉스는 살인을 저지르는 도중에 우중충한 날씨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무료하다.”  이 불쌍한 놈..

알렉스는 며칠간 살인을 저지를 계획에 흥분해 있었다. 열광에 빠져 미리 동선까지 치밀하게 짜고 엘리제를 위하여를 쳐대며 살인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는 숭고한 마음으로 무장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료함을 느끼는 꼴이라니.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죽여버리고 싶다는, 저 놈의 생명을 내가 끊어 버리겠다는 살인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다. 피살자와의 과거를 끊어낸다는 통쾌함, 피살자의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비장함,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비참함 등 이 같은 감정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 도중, 직후까지 수 없이 격동하고 폭발하고 낭자한다. 이 같은 지점에서 잔인하며 끔찍한 것임에도 아름다움이 꽃피기도 한다. 안일한 마음가짐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총은 이 모든 것을 말소시켜준다. 인간의 무수한 감정의 아우성을 ‘탕’ 소리 하나로 감춰준다. 알렉스가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결심의 반은 총이 대신해준 것이다. 그 결과 알렉스는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헛헛한 반쪽을 차갑게 식은 총을 만지며 느낀다. 무료할 수밖에. 무료한 살인이라니 재미도 없고 끔찍하기 만 하다.

(이희명의 검은 이명)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영화 '굿 윌 헌팅'을 제작한 감독이다. 미성년자에게 한 없이 따뜻한 시선을 던진 영화를 만든 사람이었다. 그런 구스 반 산트 감독을 의도적으로 안대를 쓰고 코끼리를 더듬어대는 무책임 한 인간들이 너무나도 차갑게 만들었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에 부딪쳐 무력함을 느껴 좌절하곤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의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총기 참사의 원인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은 너무 쉽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위선적이며 이기적인 안대를 벗어던질 것을 요구한다. 차갑고도 무력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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