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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Nov 27. 2019

인랑(영화)

리메이크의 잔인함, 조직과 개인

원작을 리메이크할 때는 잔인해져야 한다. 원작의 아성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짓밟은 뒤 다시 세우겠다는 잔인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자신의 기만만 들어내는 꼴이 되어 버린다. 원작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표현하며 리메이크를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의 존중에서 진정한 존중을 느끼기란 힘들다. 이들의 존중은 원작의 아우라가 탐난다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존중은 수많은 부정이 행해진 뒤에 생기는 것이다. 상대의 아우라에 짓눌려 행해지는 즉 수동적인 태도로 이루어지는 존중의 결과는 기품 있는 아첨이나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는 비겁함으로 이어진다. 상대의 더러움, 악취, 기만 등 모든 허점을 적나라하게 직시한 뒤에도 존중하기로 선택한다는 주체성이 있어야 존중에 힘이 깃든다. 이러한 주체성이 결여된 리메이크 작품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시 시 하다. 타인의 질투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시시하다. 또한 원작을 소생시키겠다는 각오로 리메이크를 임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거짓된 영원성을 바라는 인간의 가장 부질없는 욕망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원함엔 지속성과 부활의 개념이 일체 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 좋은 작품을 향유했다면 그것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끄집어내어 발버둥 치는 순간 영원성은 파괴된다. 우리는 다른 예술에 비해 영화 판에서 리메이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화 판의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거짓된 영원성 장사는 언제나 누군가의 돈벌이가 된다. 가끔 형편없는 리메이크 작을 내놓고 원작자와 리메이크 작자 둘이 히히덕 대며 광고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훌륭한 원작에 부패한 시큼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역겨운 광경인가. 원작자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깃든 권위를 돈을 위하여 깍아내린다니... '인랑'의 부패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더 썩기 전에 내 가슴속에 간직한 인랑을 글로 써보려 한다.

'인랑' 은 조직과 개인에 대한 갈등을 다룬 영화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간의 광기가 가라앉아 이성이 돌아왔을 때 돌아본 세계는 끔찍한 광경을 뽐냈다.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고 인간의 가장 강한 강점이라 생각했던 집단 지성의 결과에 경악을 하였다. 이 시기에 어떤 형태의 집단 혹은 조직에 의해 개인의 인격, 자아, 주체성이 말살되는 스토리를 다룬 영화가 많이 출현하였다. 이것이 하나의 영화적 흐름, 운동이 되어 느와르 장르가 탄생하게 된다. 느와르는 기본적으로 흑백 영화를 상징하며 단조로운 색채는 인간이 해제되어 감정이 말살됐음을 상징하게 된다. 느와르 영화는 꿈과 희망을 표현하길 꺼리고 음모, 배신, 학살 등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음을 표현한다. 인랑 역시 그때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전체적인 스토리 역시 느와르 장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랑'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격이 무너진 하나의 짐승 즉 늑대를 격려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먼저 감독이 조직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존 느와르 영화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을 열거해볼까 한다. 섹트라는 폭력 테러리스트 집단에 속해 있는 속칭 빨간 망토는 어린 소녀이다. 주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섹트는 어린 소녀를 폭탄 배달원으로 사용한다. 빨간 망토의 초점 잃은 눈빛, 주어진 명령에 고개만 끄덕 거리는 권태감 등을 보여주며 이미 어린 소녀가 가져야만 하는 감정, 인격이 배제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느와르 영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할머니 선물이다.” 하며 폭탄을 건네주는 장면,(일종의 같잖은 농담으로만 여길 수 있지만 농담은 인간 감정의 마지막 생명줄을 상징하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주인공의 농담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갑갑한 사회주의 체제를 보여주며 비판한다.) 투지에 가득 찬 눈으로 폭탄을 들고 뛰어가는 소녀의 모습, 동료들이 소탕된 뒤 홀로 남은 소녀의 슬프고 두려워하는 표정이 인서트 되는 장면 등은 소녀는 섹트에 충분한 소속감을 느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준다.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연출 덕에 자폭을 시도하는 소녀를 보고 "왜...?"라고 묻는 후세의 말에 힘이 실린다. 과연 소녀의 지폭은 인간의 주체성이 결여된 행동이 었을까? 소녀에게 던진 "왜?..."는 폭탄의 강력함과 함께 후세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위협이 되는 적은 누구라 하여도 쏴야 한다는 명령을 후세는 어긴 것이다. 후세는 왜 총을 쏘지 못한 것인지 묻기 시작한다.

감독은 후세를 늑대라고 칭한다. 영화 시작 전에 “그자는 늑대 같은 자다. 그자는 늑대다. 그런 이유로 추방되었다.” 라고 한다. 후세는 조직에 속하면서 인간성이 거세되어 늑대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늑대인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후세는 특기대를 소중한 보금자리라고 말한다. 감독은 조직이란 가면을 통해 쉽게 저질러지는 악행을 이해하는 동시에 조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소속감 역시 이해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감독은 자신의 완벽한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케이를 통해 말한다. 케이는 이미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이탈된 아픔을 겪은 캐릭터이다. 그녀는 생각하는 게 귀찮아졌다며 담담하게 자신의 흉터를 후세에게 털어놓는다. 후세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면서 사랑과 자유를 알게 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선 무리에 속해 있지 않는 고독한 늑대가 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흉터를 통해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 역시 알게 된다. 결국 후세는 고독한 늑대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케이를 죽인다. 그럼에도 나는 '인랑'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친구인 헨미를 가차 없이 쏴 죽이던 후세도 케이를 죽일 땐 울부짖는다.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진행된 것에 만족을 느끼며 개운하게 담배를 피우려던 한다는 케이를 죽인 후세를 보며 씁쓸하게 담배를 던지고 패배자처럼 읊조린다. "그리고 늑대는 빨간 두건을 잡아먹었다."

후세는 무리를 떠날 선택을 아직 내리지 못한 것이다. 아직일 뿐이다.... 한번 알게 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후세를 전처럼 딱딱한 마스크를 쉽게 쓰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엔 마스크를 벗어야 할 것이다. 후세는 "왜...?" 에 대한 대답을 케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후세에겐 행동만이 남았다. 한다의 씁쓸함엔 이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가는 한다는 후세를 무리에서 추방시켜야 한다.

기존의 느와르 영화는 조직에 대한 깊은 회의감 때문에 인간의 조직을 꾸리려 하는 나약함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인랑'은 조직에 완벽히 속해 있는 한다, 후세의 강인함과 조직에 이탈된 흉터를 지닌 헨미, 케이의 나약함을 통해 조직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후세의 허망한 울부짖음, 케이의 허약한 몸짓을 통해 눈보라가 쳐도 당당하게 홀로 서 있는 늑대의 강인함을 요구한다. 늑대 무리를 초월한 늑대는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남을 이끌지도 정복하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성 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홀로 당당한 초월한 늑대. 이것이 니체가 죽을 때까지 외치던 초인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그자는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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