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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Nov 24. 2019

조커(영화)

조커의 떠들썩함에서 풍기는 위화감

"역시 이 정도구나" '조커' 관람이 끝난 후 나의 감상이다. 호아퀸 피닉스의 열렬한 팬이며 히어로물 영화의 유일한 업적이 조커(다크 나이트)의 탄생이라 생각하는 나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인가? 분명 나는 재밌게 관람을 했음에도 어딘가 모를 꺼림칙한 기분과 기대 이하라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결국 나에게 '조커'를 관람하는 것은 '조커'에 쏟아지는 관심과 극찬에 대한 위화감을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앞으로 쓸 글은 '조커'가 이 정도까지 큰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한 글이다. 나의 글이 모두가 yes 할 때 혼자 억지로 no 하려는 어린애 같은 반항심이 담겨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다.

(공성훈 담배피는 남자)


 호아퀸의 연기력, 조커의 재탄생, 열성적인 팬을 보유하고 있는 히어로물 장르의 연장선, 정치적 시기적절함 이 4가지가 조커에 대한 관심의 주된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역시 내가 느낀 위화감의 원인은 정치적 시기적절함에 관심이 쏠려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영화에 정치적 메시지가 포함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 예술은 인간사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시작되는 표현 언어이다. 정치는 문명이 탄생한 이후 언제나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예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역전이 일어날 경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정치에는 방향성이 내포해 있다. 어느 쪽으로 향하려는 방향성을 내포해 있는 단어엔 항상 배제가 따라다닌다. 이것이 예술에 적용되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예술의 자유로움이 제한되어 편협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예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정치의 강력한 배제성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종 차별, 성 차별, 계급 차별 등의 사회적 혐오에 많은 관심을 가지지만 실질적으로 이것들은 정치성향 차별에서 오는 혐오만큼 강하지가 않다. 전자는 개인 대 개인으로서 접점이 이루어지면 의외로 혐오는 금방 사라진다. 하지만 후자는 언제나 개인 대 관념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관념은 실제적 물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접점을 찾아 혐오를 해결하기가 매우 힘들다. 혐오는 더욱 커지고 그럴수록 배제성 또한 커진다. 나는 영화 조커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단언할 수없지만 분명 그 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관객의 우매한 관람 태도가(예술을 어거지로 정치적으로 보는 태도) 원인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로 인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본다. 물론 감독의 강한 의도성이 느껴지는 악의적인 영화라고 하긴 힘들다. 이렇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의견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니 앞서 말한 '조커'가 관심받는 주된 이유 4가지 모두를 좀 더 세밀하게 다뤄보려 한다.

1. 호아퀸의 연기력

호아퀸 연기력의 탁월함을 지적하기 앞서 나의 연기에 대한 얄팍한 신념부터 말해보겠다. '영화배우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은 자연스러움이다' 영화라는 예술매체의 특징은 타 매체에 비해 노출성이 강하다. 기존 예술이 가진 노출성(생각의 표현, 시각적 표현, 청각적 표현)에 운동성과 공간의 자유로움이 더해지게 되면서 사실성이 강조된다. 예술의 노출성이 강해지면 현실 반영 또한 강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연극배우와 영화배우를 비교해 보자 연극은 공간에 제약이 존재하며 그만큼 운동성이 제약된다. 결국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배우의 몸짓은 과장되고 감정은 과잉된다. 이를 통해 배우의 강력한 힘과 역동성을 즐길 수 있지만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현실감은 떨어진다. 반면에 영화는 공간에 제약이 없어 배우의 과한 표현은 불필요하게 된다. 배우의 역동성을 죽이고 자연스러움이 강조되게 된다.  즉 캐릭터의 현실감이 강조되는 것이다. '탁월한 배우는 메소드 연기를 하지 않는다.' 메소드 연기는 배우가 캐릭터를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헌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기 방식이다. 배우가 영화를 위해 과감한 헌신을 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꽤나 감동을 준다. 하지만 메소드 연기엔 '자신을 파괴한다'는 즉 자신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존재한다. 캐릭터와 배우가 완벽히 일치하는 모습을 통해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영화에 메소드 연기는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 영화 속 캐릭터만이 부각된다. 이런 식의 강한 부정은 파괴당하는 주체 즉 배우 자신 또한 필연적으로 강조가 된다. 결국 메소드 연기의 종착역은 김치로 싸대기 때리는 한국 막장 드라마 연기 방식이 되어 자극성만 남기는 꼴이 된다. 이것이 한창 중요시 여겨지던 배우의 메소드 연기가 현재 놀림거리나 단순한 이슈성으로 전락된 이유이다.

필립 셰이프 호프만, 배두나, 송강호, 드니 라방 등의 명배우들도 영화의 필요성에 의해 메소드 연기와 같이 강력하고 자극적인 연기를 선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역량과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의 폭을 넘는 연기는 하지 않는다. 배우 자신의 연기 스타일과 그 역량, 한계 등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캐릭터와 일치되는 지점을 찾아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인다. 이들의 연기에는 파괴적인 자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이 같은 연기에 대한 신념에 빗대어 호아퀸은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캐릭터와 일치되는 호아퀸의 집중력은 소름이 돋는다. 탁월하다. 그렇다면 호아퀸의 탁월한 연기력이 영화에 잘 표현되었는가? 나는 그렇다 생각한다. 감독은 호아퀸이 가장 잘 소화해내는 연기가 무엇인지 파악하였으며 그가 가진 매력을 최대한 영화에 표현하였다. 사실 호와퀸이 '조커'에서 보여 준 연기는 그가 앞서 활동한 영화 '마스터'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마스터'에서 호아퀸은 PTSD 증상을 가진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억압된 분노를 구부러진 허리, 그 허리를 지탱하는 듯한 몸짓,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표현, 불안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과하게 찡그리는 얼굴 표정 등으로 탁월하게 표현한다. 감독은 이런 호아퀸의 연기력을 '조커'로 그대로 끌어 쓴다. 하지만 감독은 지나치게 그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아서 플렉이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옛 동료를 죽이고 나머지 동료를 돌려보낼 때 괜히 뜸 들이는 장면, 이미 머레이 프랭클린을 쏠 것이라는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아서 플렉의 넋두리를 보여주기 위한 무의미한 쇼의 진행 등은 호아퀸의 연기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재미를 주지만 영화 전반적인 리듬감을 늦추어 긴장감을 떨어 뜨린다. 스릴러 혹은 느와르 영화에서 후반부 클라이맥스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관객의 긴장감과 몰입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영화 평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긴장감을 떨어뜨리면서 까지 호아퀸의 연기에 매료된 모습을 보여준다. 호아퀸 연기력에 대한 감독의 이 같은 과한 애정에 위화감이 풍긴다. 감독은 호아퀸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현재 시대의 상황을 대변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알고 있다. 세계적인 젊은이 들의 극우화 성향은 자신이 겪은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알 수 없는 분노의 원인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트럼프의 주된 지지층이라 보이는 백인 하층민은 기존의 올바른 소리에 의해 억압된 분노를 트럼프를 통해 발산하고 있다. '조커'의 아서 플렉은, 호아퀸의 연기는 이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감독은 이들에게 혹은 이들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자에게 호아퀸의 방대한 연기로 보답한다. 이 지점에서 묘하게 호아퀸의 연기력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2. 조커의 재 탄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이저가 연기한 조커는 영화인들에게 강한 매력을 선사하였고 히어로물 특징인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다시 보고 싶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조커'는 많은 영화인들에게 조커의 귀환을 기대하게 하였다. 하지만 '조커'는 조커의 귀환보다 재 탄생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쭙잖은 귀환보다 재 탄생이 확실히 나은 전략이란 것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니 나는 히스 레이저의 조커와 호아퀸의 차이점을 지적하려 한다. 두 조커 모두 빌런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공감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관객의 공감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에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히스 레이저의 조커는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돈을 불태우고 국가권력 고위직을 조롱하며 돈과 명예로부터 초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행동엔 목적성이 없다. 하지만 언제나 동일한 메시지를 던진다. "혼란은 평등하다" 기존의 권력체계를 과감하게 부숴버리는 조커의 행위에서 관객은 매력적인 카리스마와 초월적인 힘을 느끼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세상의 평등으로 이어지는 조커의 마술에 설득되어 히어로로 여겨지게 된다. 반면에 호아퀸의 조커는 모든 힘이 거세된 채 등장한다. 호아퀸의 조커는 가난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좌절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후반부에서 시위 무리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 되지만 이는 그의 주체적인 행동의 결과로 볼 수 없다. 또한 경찰차 위에 올라서서 환호받는 장면 다음이 감옥에 구속된 장면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아서 플렉의 망상으로 봐도 무방하게 된다. 감독은 조커의 히어로 성을 거세시켜 우리 주변의 노동자 중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감독은 조커에 대한 관심의 주된 이유 중 하나인 3. 히어로물 팬들의 히어로물의 연장선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린 브루스 웨인의 등장, 그의 부모들이 살해당하는 클리셰적인 장면, 경찰차 창문을 통해 세상의 혼란을 감상하는 장면(다크 나이트의 장면을 오마주 하였다) 등을 구겨 넣음으로써 히어로 물의 향수를 물씬 풍긴다. 이럼으로써 감독은 우리 주변의 노동자 중 하나인 아서 플렉에게 히어로의 탈을 교묘히 씌워준다. 돈과 명예에서 초월한 히스 레이저의 조커보다 우리들의 삶에 더욱 가까운 조커가 재 탄생한 것이다. 결국 '조커'는 조커를 시대가 요구하는 히어로로 만든다. 이 시점에서 묘하게 조커란 캐릭터가 정치적으로 소비된다.

4. 정치적 시기적절함

 앞서 나는 '조커'가 묘하게 정치적으로 소비되는 지점을 지적하며 나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이 생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며 가장 강하게 영향을 주는 지점이 있다. '조커'의 스토리 내에서 가장 큰 반환점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은 아서 플렉이 금융인 3명을 지하철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이다. 앞부분에서 아서 플렉이 사회의 부당함으로부터 분노가 쌓이는 것은 충분히 묘사하였기에 살인을 행하는 것에는 개연성의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아서 플렉의 살인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순식간에 광대 가면이 시위의 상징이 된다는 부분은 비약적이다. 이 부분이 '조커' 전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 가장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중간중간에 고담시의 정치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감독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고담시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감독은 현재 우리 시대의 상황에 의존한다. 우파 포퓰리즘을 통한 세계적인 극우화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관객일수록 조커의 개연성에 어색함이 줄어든다. 엘리트 계층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과 비전 없는 혁명을 외치는 영화 속 시위 장면은 과거 독일의 나치 시절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감독은 현재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부족한 개연성을 보완하였다. 이럼으로써 광대가 사회적 하층 계급을 상징하는 마술이 비약적이지 않게 보인다.

"제가 생각하는 예술은 복잡한 겁니다. 만약 복잡한 예술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서예 정도를 즐기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조커가 폭력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주장에 대한 감독의 반론 중 일부분이다. 감독은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을 피상적인 부분에 매몰되어 멍청한 주장을 하는 것으로 치부 해 버린다. 하지만 내 생각에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은 감독의 연출에 의해 본능적으로 영화를 정치적 상황과 결부시켜 관람하였다. 이들에게 영화가 폭력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과연 감독은 관객에게 예술로만 봐달라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 정도의 연출을 했는가?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또한 나는 서예의 미학을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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