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자유/노자와 장자
"이렇게 사는 거지 뭐" 같이 일했던 형에게 들었던 말이다. 사실 저 말은 이미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 봤으며 나 또한 가끔 뇌까리던 말이다. 그런데도 그 형이 뱉어 낸 말은 유독 힘 있게 들렸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앞으로의 인생이 궁금하지도 기대되지도 않는 비참한 삶을 나름 긍정하려는 저 비루한 말을 나는 언제 처음으로 뱉었을까? 수능을 위해 몇 년을 공부에 열중했음에도 막상 수능 시험지가 내게 오자 풀기 싫어졌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임을 강조하려고 어설프게 엄숙해져 있는 이 거지 같은 분위기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아등바등 대며 문제를 풀 생각을 하니 침을 '탁' 뱉고 싶어 졌다. 그 당시 왜 침을 뱉지 않았는지 아직도 후회된다. 나는 침을 꿀떡 삼키고 그냥 잤다. 그렇게 시원하게 수능시험을 망치고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하며 비루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상상하던 인생과 현실이 아득하게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들이 각자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비루해진다. 그렇기에 보통 "이렇게 사는 거지 뭐"라고 할 때는 울상을 짓거나 억지로 쓴웃음을 지어댄다. 하지만 그 형은 달랐다. 매일 쇠가루를 마시며 일이 끝나면 혼자 술을 마시며 하루를 끝마치는 게 지루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던 것이다. 억지로 나의 질문을 무마하려고 웃은 것도 아니며 나를 웃기려 웃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바보처럼 웃었다. "시발...형은 진짜 재밌나 보네" 평소에 무시해오던 형이었음에도 그 순간만은 내가 작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그 형과의 대화 후에 접하게 된 ‘모래의 여자’ 스토리는 나를 살며시 미소 짓게 만들었으며 그형 앞에서 다시 당당해질 수 있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나의 글을 읽은 사람에게 하나 말해주고 싶다. 이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나는 영화를 하나의 소재로 삼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어필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내세우는 글을 성의 없는 글이라 말한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보려는 끈덕진 시선이 안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나의 글이 바로 그 성의 없는 글이다. 나는 데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의 의도를 모르겠다 물론 이 말은 원작인 책의 저자 아베 코보의 의도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모래의 여자’에 나오는 몇 가지 소재들이 나의 개인적 경험과 생각에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전체적인 맥락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모래의 여자’에 관해 쓰게 되면 성의 없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남자는 모래 구덩이 속에 있는 집에서 강제로 노역하게 된다. 그곳에는 나름 매력적인 여성이 있으며 모래만 퍼낸다면 술, 담배, 음식이 제공된다. 당연히 남성은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동시에 그곳 삶의 매력도 느끼기 시작한다. 자유가 거세된 삶에 매력이 있다는 이 발칙한 스토리가 나의 마음을 확 끌어당겼다. 솔직히 원작인 소설의 냉혹하며 동시에 시적인 표현, 초현실적인 글의 배열 그리고 영화의 그로테스크한 기법, 모래의 존재를 표현하는 디테일은 나에게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저 자유라는 단어의 권위를 설득력 있게 실추시키는 스토리가 나를 무척이나 흥분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태초에 자유로운 존재였으니 이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말 혹은 자유가 없다면 죽음을 달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가? 이 영화는 당연시 여겨지는 자유를 찬양하는 말에 모래와 여성을 이용하여 균열을 낸다. 이 균열을 이해하려면 장자의 철학이 필요하다.
장자의 철학은 노장사상 혹은 도가로 칭해지며 노자의 철학을 이어받은 철학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렇기에 노장사상을 다루는 책들은 흔히 노자의 사상을 위주로 다루며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훌륭히 뒷받침하는 철학으로 조명된다. 하지만 장자의 글을 따로 보게 됐을 때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수용한 다음을 생각한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먼저 장자는 노자의 어떤 사상을 수용하였는가를 알아봐야겠다. 노자는 무에 집중한다. 세상의 작동원리를 무를 통해 유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방의 존재는 빈 공간이 있기에 그 의미가 드러나듯이, 수레 바뀌가 바퀴축의 빈 공간이 존재해야 의미가 있듯이 말이다. 이렇게 무에 집중한 노자의 사상은 국가의 존재를 당연시 여기는 현재 우리들에게 굉장히 파괴적인 사상이 된다. 국가의 필요성과 그 역할을 주장하는 말들을 생각해보자. 홉스는 리바이던을 통해 인간관계의 안전함을 위해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공자는 통치자는 예를 정립시켜야 한다 했으며 묵자는 차별 없는 사랑으로 통치하여야 한다 하였다. 노자는 이 같은 생각을 유를 통해 무를 들어내는 것이라 한다. 안전함을 추구하게 되면 위험한 것들이 눈에 보이고 예절을 중요시하자 예의 없음이 부각된다. 그러니 모두를 사랑하자는 묵자의 사상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전쟁에 가담되었다. 무엇이 옳다 혹은 무엇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 같은 말은 인간의 가치 판단에 의한 행위이기에 항상 대립되는 개념이 생기며 불화가 생긴다. 노자는 이러한 것들을 작위적인 것이라 했으며 위태롭다고 한다. 그래서 노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도가 사상에 도 다음으로 중요한 개념인 무위인 것이다.
(박광수의 검은 숲 속)
도는 노자 스스로도 언어로 표현이 안 되는 것이라 칭한다.(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니라 한다.) 그렇기에 두리뭉실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설명해보자면 무에서 유를 드러내는 무 자체를 관장하는 개념이며 세상사 어디든 영향을 미치는 운명 같은 것이기도 하고 자연 그 자체이다. 이 같은 도의 가치를 느끼고 순응하며 사는 방법이 무위인 것이다. 운명론 특유의 회의적인 주장과 비슷하게 노자는 옳고 그름 즉 시비를 다투는 작위적인 것(인간의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것)에서 초월한 것이 무위적인 것이라 한다. 어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는 작위적인 것이며 화를 초래한다.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의 행위는 몸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위적인 삶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삶이며 물과 같이 유연하게 삶을 대처해 나가는 삶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노자는 국가, 명성, 도덕, 아름다움 등 그 어떠한 작위적인 것을 거부하며 자신의 몸을 온전히 보존하는 삶을 살 것을 권하였다. 양주의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절대 하지 않는다는 말의 무게감이 노자에게 전해진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노자의 도 사상을 흡수한다. 하지만 노자는 무위보다 도를 더 중요시 여겼다면 장자는 무위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장자가 말하는 무위란 노자가 생각하는 무위+처세술이 된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며 단명한 자는 장수하는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아침에만 사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단명하기 때문이다........... 초나라의 남쪽에는 명령이라 일컬어지는 큰 나무가 있는데 5백 년 동안을 봄으로 삼고, 5백 년 동안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서는 팽조가 장수한 인물로 특히 유명한데 이 역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노자는 도를 느끼는 삶을 위하여 몸을 온전히 보전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장자 역시 몸을 온전히 보존할 것을 권한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알 수 있는 지식은 자신의 인식과 경험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결국 일정한 수명 아래 삶을 사는 인간 누구나 우물 안 개구리 신세라는 것이다. 그러니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위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아침에만 사는 버섯과 쓰르라미로 비유한 것이다. 그렇기에 장자는 훌륭한 삶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장수하는 것. 몸을 온전히 보존하며 오래 산사람이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명령이라는 큰 나무로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장수한 사람으로 유명한 팽조를 보며 슬프다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이 장자가 노자와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노자의 도를 지키는 삶을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라 할 수 있는데 장자는 이 부분에서 인간의 필연적 한계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중에 가장 오래 살았다는 팽조를 보면서 까지 장자는 슬퍼하는 것이다. 그렇다 장자의 눈에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옳지만 자유로운 삶을 의미하지 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의미가 없는가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장자는 자연에 순응하며 인간 나름의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처세술을 생각한다.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이란 곳에 이르러 사당의 신목으로 심어져 있는 참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아름이나 되었으며............. 제가 도끼를 손에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뒤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을 본 일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선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아서라 그런 말 말아라 쓸모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곧 썩어버리며 그릇을 만들면 곧 깨져버리고, 문을 만들면 나무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어버린다. 쓸만한 곳이 없어서 그 처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자연에 따라 죽기 전에 작위적으로 죽으면 안 되니 장자는 먼저 무용론을 말한다. 위의 글은 참나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오래 살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장자는 유용한 인간이 되지 말라한다. 현재 우리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유용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유용한 인간이 돼야 먹고살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기에 더욱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진 유용함은 오히려 우리들의 몸을 해친다. 육체적 노동에 재능이 있는 자는 늙어서 골병에 시달리거나 불행한 안전사고로 화를 입는다. 정보처리 능력에 재능이 있는 자 역시 거북목이나 허리디스크로 불구가 되며 머리는 빠지고 간이 나빠져 눈은 충혈된다. 간신히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연명할 수 있다지만 이 연명의 이유는 서글프게도 더욱 지속적으로 유용한 인간으로 쓰임을 당하기 위함이다. 반면에 무용한 인간은 누군가 보살펴 주기도 한다. 운이 좋은 나라에 산다면 삼시세끼 꼬박 챙겨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따뜻한 잠자리 역시 제공된다. 그렇지 못한 나라라면 자신이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돈을 벌거나 수렵채집을 하면 된다. 여기서 없어져야 할 나라가 정의된다. 자신이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유용한 인간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을 갖춘 나라이다. 혹시 그러한 나라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는가? 착각이다. 국가 시스템이란 생각보다 냉혹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 어쨌든 장자는 이러한 무용론을 통해 오래 살 수 있는 처세술과 더불어 부,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것에 대해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자연에 순응하는 동시에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장자의 처세술을 알아보자.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은 곤이라 하는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변해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하며 붕의 등 넓이 역시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쪽 끝에 있는 바다로 날아가려고 할 때는 날개를 활짝 펴 3천리에 이르는 수면을 쳐올리며 바람을 타고 9만리 높이까지 올라간다............... 바람의 부피가 두텁지 않고서는 붕의 큰 날개를 지탱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9만리나 되는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비로소 그 날개를 지탱할 수 있는 바람이 밑에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바람을 타고 등에는 창공을 업고 아무 거리낌 없이 남쪽을 향해 날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붕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우리는 재빠르게 일어나 느릅나무나 박달나무가 있는데 까지 날아가려 해도 어떤 때에는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9만리 높은 하늘에 올라 남쪽 바다까지 날아간다는 것인가?................. 이 두 벌레들이 또한 무엇을 알겠는가?
붕은 남쪽 끝에 있는 바다로 가기 위해 9만리나 되는 높이까지 올라가 자신의 날개를 지탱해줄 바람을 기다린다. 이 같은 모습을 두 벌레들이 비웃는다. 이 두벌 레는 붕이 자유를 향해 날개를 퍼덕이려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문구는 노자에 대한 장자의 비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자의 도에 순응하는 삶이 매미와 작은 비둘기의 삶으로 비유가 되면서 자연에 순응하며 아등바등 사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작위적인 노력을 거부한 노자의 눈에 남쪽 끝에 있는 바다로 향하려는 붕의 모습은 어리석게 보인다. 이 지점에서 장자는 노자와 생각을 달리한다. 장자에게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두 벌레의 삶은 붕의 삶과 비교하면 작은 것이다. 그렇기에 장자는 붕의 크기를 비현실적으로 크게 설정한다. 또한 큰 날개를 지탱해 줄 바람을 위해 9만 리나 되는 높이까지 올라가는 붕의 모습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려는 삶이 순탄치 않음을 말해준다. 장자는 이러한 붕의 자유를 향한 집념을 노자와 달리 긍정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재밌게도 9만리 높이를 날려면 9만리의 높이를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가 단순히 제멋대로 하는걸 뜻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막막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며 집에서 가출을 하는 자유로움 혹은 국가를 향해 돌을 던질 권리를 누리기 위해 복면 쓴 아나키스트들의 자유는 장자의 눈에 자유가 아닌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는 무겁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는 행위라 위태롭기까지 한 것이다. 집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해 가출을 했다면 그냥 나가는 것이다. 노숙을 할 수도 있고 무서운 형들에게 삥을 뜯길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는 국가의 존재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니 돌은 던진다. 하지만 돌정도 던진 걸로 국가가 자신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던지는 것은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에 몇몇 아나키스트들이 쓰는 복면이 비겁해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아나키스트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쓴다. 하지만 자유의 무거움을 안다 하여도 아직 부족하다. 이것만으로는 장자가 생각하는 자유가 아니다. 붕이 가려는 남쪽 끝 바다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장자가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상호와 맹자반 그리고 자금장 등 세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서로 사귀는 것이 아니면서도 사귀고 서로 돕는 것이 아니면서도 도울 수 있을까. 누가 하늘에 올라 안개속에 노닐며 무궁한 곳을 돌아다니고 서로 삶을 잊은 채 다 함이 없을 수 있을까?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웃고는 마음이 맞아 마침내 벗이 되었다'
장자는 도를 깨우친 자를 진인이라 부르는데 이 진인이라는 자들은 의지 빈약이며 가르침을 받으러 온 자들에게도 뭘 자꾸 하지 말라한다. 돈을 주어도 돈을 써먹을 생각조차 안 하며 명예를 받아도 알리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라 자체를 주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고는 빈둥대다 얼마 후 나라를 버리고 떠난다. 하지만 이런 진인들이 유일하게 의지를 보이고 활기를 띠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행위이다. 자신의 뜻과 맞는 사람을 만나 무궁한 곳을 노닐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의 책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희망이며 자유인 것이다. 지상호, 맹자반, 자금장 이 세 인물은 서로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노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생각하는 자유이며 붕이 남쪽 끝에 있는 바다로 향하는 이유이다. 자신과 세상을 노닐 또 하나의 붕을 만나러 가는 모습에서 장자는 자연에 순응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만남이 성사되면 인간의 필연적 죽음조차 무섭거나 슬프지 않은 것이다
(강요배의 으악새)
이제 우리는 노자와 장자를 같이 묶어 노장사상이라 일컫는 것은 너무 단순함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노자의 도와 장자의 도가 어떻게 다른지 정리를 해보자. 노자는 도를 현묘한 암컷이라 비유하는데 이 현묘한 암컷은 여성의 생식기를 말한다. 여성의 생식기의 빈 공간이 무이며 이 무에서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채워짐이 있어야 한다. 생명의 탄생조차 무에 대한 자연스러운 채워짐 혹은 이끌림에서 나왔으니 우리의 생명을 무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장자의 도가 만든 길은 여성의 생식기에만 이끌리지 않는다. 두리번대며 타인의 걸음에 한눈을 팔기도 하고 뜻이 맞으면 발걸음을 같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자는 삶을 유유자적 걷는다면 장자는 삶을 노닐면서 걸어 다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이다.
(이상원의 동해인)
이제 ‘모래의 여자’로 돌아가 보자. 먼저 제목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목이 모래와 여자 혹은 모래 속 여자가 아니라 ‘모래의여자’라는 점 이는 모래와 여자를 대칭 혹은 대립관계에 놓는 것이 아니며 여자를 모래 속에 갇힌 존재로 모래의 권위나 여자의 특정한 상황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모래의 여자란 이미 여자가 모래이며 모래 역시 여자라는 서로 합일된 관계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여자가 모래와 다투는 모습이나 여자를 강제노역 시키는 마을의 상황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의 모래 구덩이 속 삶을 숙련된 삽질과 알몸으로 자고 있는 여자 몸 위에 살포시 덮여있는 모래로 자연스러운 삶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 작품의 대담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강제 노역을 다루면서 사회적 약자의 아픔 혹은 인간의 비열한 폭력성을 보지 않는 것이다. 모래가 꾸릿한 냄새를 덮어주듯 그냥 덮어버린다. 그러곤 이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다.
좋다 이 작품의 농간에 놀아나 보자. 여자가 모래 구덩이 속에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여자의 집은 모래 속에 파묻히고 그 후에 다음 집이 파묻히니 여자의 희생으로 마을이 유지돼야 한다. 그래서 여자는 강제 노역을 해야만 한다. 이 악취 나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다 해보자는 것이다. 이 논리가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라 인정했을 때 드디어 남자의 어리석음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남자는 지식인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행위와 여자의 순응적 삶을 어리석다고 본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며 자신을 좀 더 쓸모 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 외친다. 장자의 무용론이 생각나지 않는가? 남자는 자신의 유용함을 뽐내며 마을 사람과 협상을 시도하지만 결국 목이 말라죽기 직전까지 간다. 결국 남자는 목숨을 부지하려면 자신의 유용함을 포기하고 여자와 같이 삽질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이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에 순응하는 삶이다. 남자는 삽질에 익숙해져 가며 여자의 삶을 존중하게 되고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남자의 변화를 보고 노자는 "자연에 순응하니 좋지 않느냐"하며 옅은 미소를 띨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그것이 바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인 것이다." 하며 눈가가 살짝 붉어질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자유를 만끽하는 삶이 아님을 보여준다. 감독은 성격 고약하게 마지막까지 이점을 환기시켜준다. 남자가 새를 잡기 위해(여기서 새를 잡으려는 행위는 남자가 자유를 얻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모래 속에 파묻은 나무통에서 의도치 않게 물이 고이는 것을 보여주며 무에서 유가 드러나는 자연의 이치 혹은 도의 이치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남자의 자유에 대한 조그마한 갈망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의 자유에 대한 갈망 덕에 물을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되어 남자는 모래 속 삶을 더욱 풍요롭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감독은 자유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진짜 자유가 필요해?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를 꿈꿀수록 목숨은 위태로워지고 여자와의 사랑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되는 남자의 상황을 보여주며 정말 자유가 중요한 거야?라는 대담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질문의 의도는 자유가 없음을 한탄하기 위함인 것이다. 물이 생기는 원리를 연구하고 알아낸 남자는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인다. 모래 구덩이 속에서 나와 자신의 원래 삶을 되찾는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하게 강제로 자연에 순응한 사람에게 더욱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장자의 붕의 자유가 떠올려지는 부분이다. 이 특정한 자유가 모래 구덩이 속에서는 실현되지 않으니 결국 남자는 붕과 같이 9만리를 올라가듯 모래 구덩이 속을 기어올라갈 것이다.
'이렇게 사는 거지 뭐' 하며 활짝 웃는 그 형의 미소는 자신이 자신의 상황에 완벽히 순응했음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형의 미소는 솔직히 부러웠으며 그 형을 큰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그 형의 미소로 인해 뚫린 입안에 씁쓸한 모래를 살포시 얹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계속 그 형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모래의 여자’를 좋아할 수밖에..... 내가 속이 좁아 보이는가?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무시하기로 결정한 사람을 존경하기란 매우 힘들다. 힘든 건 최대한 우회해보자는 것이 내가 이 삶을 노니는 방법 중 하나이다. 누군가를 빨리 배척하는 것 역시 자신과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나기 위한 훌륭한 방법 중 하나라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를 배척하는데 마음 쓰지 않고 자신의 친구를 만나려는 장자의 걸음걸이가 더 쿨하며 멋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