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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Mar 08. 2020

복수는 나의 것(영화)

아이러니와 미성숙을 바라보는 박찬욱의 시선

자메즈의 17이란 노래가 있다. 노래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이 노래는 뮤직비디오로 인해 큰 논란을 야기시켰다. 뮤직비디오에는 문신, 화장, 담배, 술, 오토바이, 섹스 등의 행위가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을 통해 나열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이 뮤직비디오는 비행 청소년들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재밌는 지점은 문신을 자신을 표현하는 패션 아이템으로 생각했을 때 뮤직비디오 속 청소년들의 행위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특별할 거 없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 뮤직비디오의 핵심은 교복이 된다. 그들의 옷차림이 교복임을 알게 되었을 때 수용자는 자연스럽게 일진들의 비행행위 즉 학교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이 뮤직비디오는 색채가 좀 어두웠을 뿐이지 그 안에는 학교 폭력적 요소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들끼리 신나하고 재밌어하는 모습만이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학교 폭력이 연상된다. 자메즈는 꽤나 재밌는 지점을 들쑤셨다.

성인들의 일상적 행위가 교복이라는 획일화되고 미성숙을 상징하는 옷차림과 더해지자 폭력적인 장면이 떠올려진다. 결국 뮤직비디오에 대한 논란은 학교폭력을 미화했다느니 조장했다느니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진짜 핵심은 앞서 말했듯이 교복이다. 교복이 부각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논란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교복차림이 아니었다면 뮤직비디오 속 학생들의 행위는 흔히 힙합에서 멋이라고 생각하는 반항적이며 자유를 뽐내는 개성 넘치는 행위가 되었을 것이다. "감옥 같은 학굔 사방으로 담쌓았지, 그 안에 못 가둔 인생 파란만장하지" 자메즈의 가사이다. 학교의 담이 사라지면 그들 또한 파란만장한 인생으로 포함됨을 말해준다. 이렇게 되자 혼란이 생긴다. 비행청소년들이 학교폭력의 원인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어떤 특정한 존재로 정의 내리려 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사회 시스템이 원인이 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학생에게 특정한 이상을 품은 어른들의 시선이 청소년들의 비극적 행위를 탄생시킨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어른들의 욕망이 표출된 교복으로 돌아가서 교복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우리는 과연 청소년들이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타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가? 아무리 짱구를 굴려보아도 나는 찾지 못하겠다. 오히려 이유보다 그 역할 만이 부각된다. 교복은 마치 군인들의 까까머리와 같이 그들의 신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만든다. 즉 어느 때든 어딜 가든 자신의 위치를 본인이 인지할 수 있게 만든다. 군인은 자신의 까까머리 때문에 클럽을 가든 피시방을 가든 나는 자랑스러운 군바리임을 절절하게 인지해야 한다. 이와 같이 청소년들은 교복을 통해 자신이 미성숙한 사람임을 주변에 알려 본인 또한 인지하게 된다. 이렇게 교복은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낙인찍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청소년들은 보호받고 인도받고 교육받아햐 한다는 생각에 힘이 실리게 된다. 이러니 고등학생에게도 투표권을 주자는 주장이 나오자 치를 떨고 반대하는 어르신들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잠깐! 교복을 입혀야 된다는 타당한 이유를 생각하는 이들의 눈이 번쩍이게 된다. "청소년들은 실제로 미성숙하니 성인이 되기 전까지 교복을 입혀 본인이 보호받고 교육받아야 함을 인지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 나는 이들에게 교복을 입혔으니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되는 것이며 이유와 역할이 역전된 것이라고 받아치고 싶지만 결국 이런 식의 주장은 말장난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토론에서 가장 추잡하지만 강력한 양비론을 써볼까 한다. 양비론은 흔히 자신의 결함을 숨기기 위해 상대방의 결함을 돋보이게 만들어 "다 같이 바보다." 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그래서 추잡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결함을 드러내어 상대방의 결함까지 포용하는 양비론은 토론의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나는 이 양비론을 쓰기 위해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살펴보려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을 살펴보기 전에 하나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박찬욱 감독을 '박쥐'를 기준으로 나눈다. '박쥐'이후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여운이란 감정이 새롭게 추가되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는 따로 글을 쓰려한다. 그러니 이 글에서 말하는 박찬욱 감독은 '박쥐'를 제작하기 전 박찬욱을 말한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박찬욱 감독 영화를 대표하는 단어를 하나 말하자면 아이러니가 될 것이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인생의 아이러니함이 주된 소재로 쓰인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하는 적끼리 싹트는 동지애를, '올드보이'는 사랑하기에 잊어야만 하는 것을, '친절한 금자 씨'는 친절하려면 살인을 해야만 하는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또한 박찬욱 감독은 본인의 재치를 최대한 녹여내어 영화 곳곳에 관객이 아이러니함을 느끼게끔 연출해 놓는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가 15년의 감금생활 후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장면을 연출할 때 카메라 앵글의 한계를 교묘히 활용하여 관객에게 현재 장소가 드 넓은 들판으로 여기게 만든 후 줌 아웃하여 사실 건물 옥상 화단 속임을 드러낸다. 이런 식의 연출 기법은 박찬욱 감독 영화 모든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이 그의 영화의 독특함과 특유의 재미를 느끼게 만든다. 그렇다면 내가 왜 굳이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 박찬욱 감독의 아이러니를 말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다른 영화에서도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을 느낄 수 있다면 굳이 가장 인기 없는 '복수는 나의 것'을 들먹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미안하지만 이 이유는 뒤에 서술하는 것이 글의 흐름상 자연스러우니 잠시 기다려주기 바란다. 여기서는 먼저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 박찬욱이 생각하는 아이러니와 그가 바라보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박찬욱 감독은 영화 시작부터 류(신하균)에게 인생의 아이러니함이 무엇인지 절절하게 느끼게 만든다. 누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누나에게 이식시켜주겠다는 류의 감동적인 결심은 자신의 혈액형이 A가 아닌 B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좌절한다. 감독은 잔인하게도 류가 자신의 결심을 누나에게 전하는 장면에 아름답고 숭고한 멜로디를 사용해 류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이후 감독은 계속해서 류의 현실이 얼마나 우스운지 보여준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는 누나의 신음소리에 맞춰 자위하는 이웃집 청년들을 보여주고 장기를 축출당한 벌거벗은 류가 성기를 가리고 절절한 표정으로 히치하이킹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을 흔히 찰리 채플린의 명언인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를 증명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박찬욱의 시선은 찰리 채플린과 결을 달리한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은 멀리서 볼 수 있는 넓고 높은 시선에 권위를 부여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찰리 채플린 카메라 속 채플린은 발발되고 깡충되는 광대로 묘사된다. 채플린의 영화를 볼 때는 넓고 높게 볼 수 있는 시선 즉 영화적 시선이 가진 권위를 인정해야 관객은 과하게 우스꽝스러운 채플린의 몸짓과 표정을 수긍하고 웃을 수 있게 된다. 찰리 채플린은 권위 있는 영화 시선을 이용하여 현실의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반면에 박찬욱의 넓고 높게 보는 시선에는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더 자세히 더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카메라의 순수한 기능만을 뽐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박찬욱 영화를 대표하는 말이 아이러니가 된다. 아이러니란 자신이 가진 이상이 현실적 상황과 부딪쳤을 때 보이는 격차에서 느껴지는 감정인 것인데 이 감정을 느끼려면 현실을 직시한다는 선행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박찬욱은 영화적 시선을 이용하여 관객에게 현실을 강하게 직시시켜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만든다. 찰리 채플린과 박찬욱의 시선이 다름을 좀 더 쉽게 비유하자면 찰리 채플린은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장면에서 여자 친구가 현재 똥이 마려운 심리를 묘사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영화 시선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면 박찬욱은 여자 친구가 똥을 싸고 엉덩이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내는 장면을 직접 보여줘서 웃음을 유발한다.

이 두 감독의 차이를 좀 더 깊게 파고들면 박찬욱이 바라보는 세계가 어떠한지 알 수 있게 된다. 찰리 채플린은 우리의 인생이 비극적일지라도 넓고 높게 보면 희극이니 비극과 희극이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던진다. 반면에 박찬욱의 희극은 짧고 순간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이 현실적 상황에 의해 깨지는 순간 즉 아이러니함을 느끼는 순간 일시적으로 희극이 발생한다. 하지만 곧바로 무너진 이상에 현실의 비극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류 누나의 고통스러운 신음에 자위하는 청년을 보며 피식 웃다가도 청각 장애인이라 누나의 아픔을 인지 못하고 맛있게 라면만 먹는 류의 모습에 웃음은 사그라들게 된다. 이렇게 박찬욱에게 현실은 기본적으로 비극이며 찰리 채플린의 세계보다 냉혹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비극은 특정한 이상을 꿈꾸었을 때 생긴다는 점이다. 애초에 이상을 품지 않았다면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나는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특정한 이상을 바라는 욕망이 표출된 교복이 폭력을 만들고 비극을 탄생시킨다 한 것이다. 어쨌든 이것만으로는 고지식한 우리 어르신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박찬욱 감독 역시 특정한 이상을 품지 않는 것이 비극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을 품지 않으면 아이러니함에서 느낄 수 있는 희극 역시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그만큼 박찬욱은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며 이것을 긍정하고 즐기려 한다. 이 대담함은 나의 생각을 비겁하게 만든다. 박찬욱 감독의 놀라운 점은 현실의 비참함을 감수하면서 까지 아이러니함을 즐기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는 아이러니함을 수용하고 즐기지 못하는 인간의 미성숙함에 집중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이를 알려면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봐야 한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 씨'(2005)

위의 4가지 영화를 모두 본 사람은 '공동경비구역 JSA'는 나머지 영화와 그 색채가 다름을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 씨'는 흔히 복수 3부작으로 엮이고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찬욱이 자본에 굴복하여 만든 대중 영화라는 소리를 듣는다. 박찬욱 감독 영화를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표현하는 영화라 한다면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충분히 같이 엮일 수 있음에도 나머지 영화와 색채가 다름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오경필 중사(송강호)와 이수혁 병장(이병호)의 깊이 있는 웃음과 이우진(유지태)의 얕은 웃음이 다름을 느끼는 것이다. 오 중사와 이 병장은 현실의 서글픔에 가슴 아파 하지만 넷이서 즐겁게 놀았던 즉 아이러니한 상황을 즐겼던 시절을 가슴에 품었기에 그들의 웃음은 깊이가 있다. 반면에 이우진은 수아(윤진아)하고 즐거웠던 시절을 가슴에 품기를 거부하고 오대수(최민식)에 대한 복수를 한다. 현실적으로 수아하고의 관계는 끝이 났음에도 어린애처럼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혹은 인정하지 않기 위해 오대수에게 복수를 행한다. 그렇기에 이우진은 피식되는 얕은 웃음을 토해내고 복수가 끝나자 어린애처럼 울며 자살을 하게 된다. 박찬욱은 이렇게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수긍하고 즐길 수 있는 자 즉 오 중사와 이 병장을 성숙한 이들로 보고 현실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과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자 즉 이우진을 미성숙한 이로 본다. 이 점에서 '공동경비구역 JSA'이 나머지 영화와 결을 달리하게 된다.  '공동경비구역 JSA' 만이 유일하게 성숙한 이들을 묘사한 것이며 나머지 3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 씨' 속 인물은 아이러니함을 즐기지 못하는 자 즉 미성숙한 인물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왜 내가 굳이 '복수는 나의 것'을 선택한 이유가 나온다.

'올드보이'는 미성숙한 이우진의 복수극으로 시작되고 '친절한 금자 씨'는 강제적으로 이상을 꿈꾸는 것이 거세된 인물이 주인공이기에 두 영화 속 인물은 이미 아이러니를 포기한 채 등장한다. 반면에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류가 처하는 아이러니함의 강도가 점진적으로 강해지며 류가 어떤 식으로 아이러니함을 거부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되는지 그 과정을 묘사한다. 그렇기에 반찬욱의 대담함을 느껴보기에는 '복수는 나의 것'이 가장 적절한 작품이 된다. 박찬욱은 '공동 경비구역 JSA'를 제작하며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즐기려는 대담함을 보이기 시작했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즐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지는 미성숙한 이들의 모습과 행동을 생각하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이 미성숙한 이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그들을 포용하려는 것이기에 대담하다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지난하고 힘들기에 박찬욱은 류와 다른 상황에 의해 미성숙해진 이들을 묘사하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 씨'까지 제작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왜 복수 3부작으로 엮이는 영화 속 인물들이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하게 묘사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거부한 인물은 박찬욱에게는 인생의 희극적인 면을 거부하고 인생의 비극 속으로 치닫는 인물이 된다. 그러니 류는 자신의 신장을 도륙한 이의 신장까지 씹어먹는 비극적 인물이 돼야 하며 동진(송강호)은 류의 시체를 토막 내는 비극적 인물이 돼야 한다. 여기서 박찬욱의 그로테스크한 연출은 이들의 비극을 최대한 포용하려는 박찬욱 나름의 애절한 시도로 여겨진다. 장례식에 국화꽃 한 송이 올려놓듯 미성숙한 자의 잔인한 폭력에 보라색 꽃 한 송이 올려놓는다. 이 그로테스크함은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 씨'에서 박찬욱 특유의 아름다운 연출로 까지 발전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그 아름다운 연출까지 발전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류를 포용하려는 박찬욱 감독의 애잔한 시도가 보이는 장면이 있다. 류의 신장이 축출된 장면에서 박찬욱은 허겁지겁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찾으려 줌 아웃을 시도한다. 즉 넓고 높게 보는 시선으로 류에게 희극을 찾아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줌 아웃을 시도해도 찾지 못하자 카메라는 애잔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이 지점에서 류는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거부한 미성숙한 존재가 된다. 이제 류는 인생은 뜻대로 되지 못한다는 즉 인생은 아이러니하다는 점에 분노를 한다. 그 후 인생이 뜻대로 되게 만들기 위해 류는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잔인해진다. 타인을 강제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찾기 시작하고 실행에 옮긴다. 류는 더 이상 치매 걸린 동네 할아버지의 바지를 따뜻하게 올려주는 성숙한 청년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인생에 반항하는 초록색 머리 양아치 즉 청개구리가 탄생한다.

이 청개구리가 우리가 흔히 미성숙하다 칭하는 사람임을 눈치챘는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담배 피우고 자신보다 힘이 약한 애들을 때리고 문신하고 머리는 색 노랗게 물들인 그 양아치들, 그 일진들임을 말이다.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며 너 내는 미성숙 하니 교육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말하는 이들은 무엇으로 학생들이 미성숙하다 판단하는가? 나이가 어려서? 교복을 입었기에? 자신 스스로 돈을 벌고 있지 않기에? 우리는 이제 이러한 이유들이 박찬욱이 미성숙함을 판단하는 기준에 비해 얼마나 하찮은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위의 이유들은 자신이 나이가 많기에, 사복을 입고 있기에, 자기 스스로 돈을 벌고 있기에 말할 수 있는 자기 우월성에서 비롯되는 짜치는 이유에 불가하다. 반면에 박찬욱의 아이러니함을 즐기지 못하는 자, 인생이 뜻대로 되지 못하는 것을 수긍하지 못하는 자라는 미성숙을 규정하는 기준은 더욱 엄밀하며 우리 모두가 미성숙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학생들은 미성숙하니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맥 빠지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자신 또한 미성숙해질 수 있음을 애써 외면하고 자신보다 미성숙해 보이는 학생에게 애꿎은 손가락질을 해대며 교복을 입으라 말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얼마나 나약한 주장인가. 자신보다 힘이 약하고 못생긴 친구를 괴롭히는 일진들의 찌질한 행동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선보이고 싶은 양비론이다. 학생들을 미성숙하다 하는 너 자신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를 견디지 못하는 순간 미성숙해지니 그 입 다물 기를 바란다.

이제 나이 지긋이 먹은 어르신들도 새파란 젊은이들도 모두 미성숙해질 수 있음을 동의했다면 우리는 그 다음으로 즉 미성숙한 이들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찬욱은 미성숙한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았음에도 끝내 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류와 동진은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며 그 싸움에서 이긴 동진 역시 죽음을 당한다. 박찬욱 감독은 비밀조직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면서 까지 아이러니함을 포기한 미성숙한 동진을 죽인다. 이는 박찬욱이 포용하기를 포기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박찬욱이 미성숙한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봤다 하는 것은 동진의 죽음을 최대한 아이러니하게 연출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슴에 꽂힌 자신의 사형 선고문을 읽으려고 눈을 깜빡이는 동진은 박찬욱 나름의 선물을 선사받은 것이다. 죽기 전까지 인생의 아이러니함에서 풍기는 희극을 느꼈으니 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죽어가는 동진의 어버버 되는 신음소리로 끝을 맺는다. 이는 박찬욱이 동진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것임을 말해준다. 이 따뜻한 시선이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 씨'까지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을 포용하려는 박찬욱의 시도는 실패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으로 그들을 포장하는 정도는 해낸다. 그래서 박찬욱의 영화는 뒷맛이 찜찜하거나 단순히 킬링 타임용 영화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 하지만 박찬욱의 따뜻한 시선은, 그의 애잔한 시도는 적어도 내 가슴에 남게 되었다.(참고로 나는 박찬욱의 영화가 뒷맛이 찜찜하며 킬링타임용 영화임을 싫어하지 않는다. '박쥐' 이후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러한 평을 듣지 않는데, 어떤 이들은 그렇기에 '박쥐' 이후 박찬욱 특유의 색깔이 많이 옅어졌음을 안타까워한다. 나는 '박쥐' 이전, 이후 두 스타일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다 생각하는 편이다. 빠른 시일 안에 '박쥐'이후 박찬욱 감독이 어떻게 변했는지 글을 적어 보겠다.)

이제 우리는 자메즈 17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일진을 미화했냐느니 폭력을 조장했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논란보다 어떻게 이들을 포용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자메즈는 일진을 포용하려는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포용할지 고민하는 그 첫 단계를 수행한 것이다. 그 정도는 우리 모두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응노의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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