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린 것들
그녀는 한때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아름다움을 보았었다. 그 아름다움이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미소 지을 때면 거울 속 아름다움도 같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을 봤었다. 그녀는 한숨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요즘은 거울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그럼에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얼굴뿐이라 짙은 화장을 해야 한다고.... 그녀는 여전히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우수에 젖어있다. 때로는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그녀의 집구석에서 책을 읽으며 그녀가 화장을 지우는 모습을 힐끔거린다. 그녀가 화장을 지울 때면 일에 지쳐 축 처진 그녀의 어깨는 그만큼 더 축 처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얼굴에 묻은 장난스러운 분가루들이 지워질 때면 그녀의 가슴은 쫙 펴지고 내려갈 만큼 내려간 어깨가 들썩인다. 조심스럽게 힐끔거려 봤자 소용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며 듬뿍 사랑을 해줄 그런 내가 있음을 그녀는 영특하게도 항상 알아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따위 할 필요가 없음을 항상 알아채는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나에게로 온다. 그렇게 그녀는 그 저주스러운 얼굴을 나에게 부비적 댄다. 만성적 우울증과 불면증의 흔적인 미간에 키스를 해본다.
나를 나답게라는 이글에 나는 스스로를 의식한다는 의미를 배제한다. 고독에 몸부림칠 때, 질투심에 휩싸일 때, 몸에 통증이 느껴질 때면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다. 그렇게 나의 내면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의식을 멈추지 못했을 때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그 편안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러한 한숨은 나를 나답게라는 이 당차고 활기찬 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다움이란 깊은 곳으로 음습해가는 내면적인 것이 아닌 주체할 수 없는 운동성에 비틀거리는 외적인 것이다. 쿵쿵 거리는 비트에 맞춰 흥얼거리는 선율들은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들고 요상한 발재간을 이끌어내 몸을 비틀거리게 만든다. 그렇게 음악에 심취해 춤추는 자들은 자신을 잊어버린다. 열광, 몰입, 도취, 집중할 수 있는 것들, 이 기분 좋은 것들은 자신을 지워버리는 무엇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 내가 가득 채워질 때 나다움이 발산하게 된다. 나다움이란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잊었을 때 성립된다.
안타깝게도 이 사회는 온전히 나답게 사는 인생을 권장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초래하는 혼돈은 사회에 있어 위험요소 중 하나이다. 자제력, 자기 검열, 통제력이 부족한 사람의 행위가 이뻐 보일 리가 없다. 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을 하며 배척한다. 포용하기 위한 사회가 존재라도 할 수 있을까? 사회란 기본적으로 배척을 전제하에 성립되는 듯하다. 단적으로 국민의 4대 의무만 보더라도 그 안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배려조차 되지 못한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국민의 4가지 의무를 보며 도취할 자는 없다.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때 배척될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이 압박해 온다. 이러한 폭력적 논리를 사랑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우리의 삶은 꽤나 빠른 시기부터 강탈된 것이다. 장난스럽게 뻗어대는 손짓, 목적 없이 비틀대는 발걸음, 숨김없는 얼굴의 일그러짐 처음엔 그렇게 다들 모두 발산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것들을 찾기 위해 발산했다. 자신의 인생을 주인으로서 살아간다는 자신감이 모든 몸짓에 베여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강탈된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이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허우적 되던 손은 배꼽으로 공손히 모인다. 발걸음은 무뎌지고 무표정이 익숙해져 간다. 갖가지 역할들이 육박해온다. 미취학 아동, 학생, 남자, 여자, 군인, 엄마, 아빠, 직업인 등 온갖 잡것들이 나를 강탈해간다. 그렇게 나는 지워지고 역할에 맞게 움직이는 힘없는 무언가로 살아간다.
다행히도 그러한 삶이 힘들지만은 않다. 주어진 역할들에는 나름의 올바른 길들이 존재한다. 사회가 원하는 요구사항들이 꽤나 명확하게 제시된다. 그렇기에 수없이 많은 모범사례들이 나열되어 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혹여 따라 하지도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괜찮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들 주변에는 격려라는 달콤한 가면으로 덧씌워진 질타와 비난으로 올바른 길을 일깨워 줄 자들이 넘치고 넘치니 말이다. 그렇게 역할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편함을 느낄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의 대다수가 군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가리 박아’ 한마디에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아가게 되는 그 혁신적인 시스템은 편한 것 이상으로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강요된 역할이 부당할 수 있다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습관을 들인다. 곧 익숙해질 것이다. 철부지 없는 대한민국 남자들을 단 2년 만에 군인 사회에 적응시키는 계책과 훈련이 놀랍지 않은가. 이 사회는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역할에 손쉽게 익숙해지기 위한 방안을 고려해 왔다. 우리는 그 정교하며 교묘한 시스템 안에 살고 있다. 그러니 곧 익숙해질 것이다.
혹시 그대 사랑받고 싶은가? 역할에 충실해져 보자 사랑은 자연스럽게 받게 될 것이다. 삼시세끼 영양가 있는 밥을 제공하며 허드렛일을 척척해내는 따뜻한 어머니가 어찌 사랑을 받지 못할까. 피곤함에 만성적으로 붓는 얼굴, 노동에 절어 굳는 손가락 따위 가뿐히 견뎌내는 든든한 아버지가 어찌 미움을 받을까. 역할에 충실한 자들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받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숨이 막힐 정도로 명언이다.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역할에 충실했는지 따위를 확인하기 위해 미리 스스로를 사랑해본다니.... 이 얼마나 순애보적이며 순수한가. 이렇게 우리들은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진다. 사랑받는 삶이 무섭도록 권장된다. 그럼에도 우리들 주변에는 비틀린 자들이 끊임없이 반기를 든다. 사랑받기를 거부하는 요상한 존재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들은 말한다. 곰국 한통 거하게 만들어 놀러 다니는 어머니가 더 사랑스럽다고 빨개진 얼굴로 호탕해진 아버지가 더 사랑스럽다고. 역할을 잊어버린 자들, 순간 삶의 주인이 되는 자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감각, 내적으로 옹골 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발산하는 무엇이 나 다움이라는 감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 그렇게 나다운 삶을 찾게 된다. 강탈된 것들을 다시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눈은 비틀될지언정 두려움은 없다. 나로서 살아가는 삶의 주인들이 무엇을 두려워할까. 두려움을 모르는 자에게는 언제나 질투가 쏟아진다. 이들의 몸부림에는 당연하다 듯 질타와 비난이 쏟아진다. 그 같은 비난을 이겨내지 못할 때면 이들 역시 스스로를 사랑하는 안타까운 꼴을 보이기도 한다. 그때는 더 이상 주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망나니가 될 뿐
땅콩 회황 사건으로 유명한 조현아 씨가 그 예중 하나이다. 조현아 씨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감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자들의 질투 섞인 비난을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지 못한 자들이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만약 그 사건 당시 조현아 씨와 같이 탑승했던 자들 모두가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었다면 비행기가 회항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조현아 씨는 법적 절차를 밟기 전에 그 자리에서 얻어터졌을 것이다. 아니면 마카다미아에서 시작된 그녀의 투정은 파리의 날갯짓보다 의미가 없었기에 철저히 무시당했을 것이다. 기장은, 객실 승무원은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조현아 씨가 받은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의미에서 조현아 씨를 비난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그녀가 주인답게 사는 모습은 숭고할 정도지만 그녀는 그녀만을 사랑했기에 나는 비난한다. 승무원에 대한 사랑 조금, 같은 비행기를 탑승하게 된 자들에 대한 사랑 조금, 그 조그마한 사랑조차 베풀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그녀만을 사랑했다.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 고작 자신만을 사랑하였기에 그녀는 그러한 패악질을 행한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무서웠기에 그녀는 옹골차게 자신만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스스로를 사랑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대는 자위를 하면서 사랑했노라고 말하는가? 자위 후에 느껴지는 공허함, 외로움은 느끼지 못했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깊은 곳으로 음습해가는 내적인 것이 아닌 주체할 수 없는 운동성에 비틀거리는 외적인 것이다. 노래를 사랑하는 내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니... 그녀를 사랑하는 내가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니... 그대들은 사랑하는 행위 조차 올바른 길이 제시되는 역할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인가? 사랑하는 것에 올바른 방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랑하는 행위를 검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은 결국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검열로 이어진다.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한 자는 자신이 훌륭한 부모임에 매료된다. 그런 자는 자식을 사랑했지 한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자식이 더 이상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비참하게 부모-자식이라는 역할극을 고수할 것인가? 그쯤 되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 한다. 역할극으로서의 사랑을 그만두자. 그 역할에 매료되는 짓 역시 그만두자.
그녀를 사랑할 때 나는 나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물주도, 개그맨도, 남자 친구도 아니라 나로서 그녀를 사랑했다. 모든 역할 들을 비틀되며 외친 ‘사랑해’라는 말에 나 자신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그 비틀되던 말이 올곧게 되었을 때, 남자 친구로서 혹은 동거남으로서 라는 올바른 길을 찾게 되었을 때 나다움은 사라졌으며 그녀 역시 떠나게 되었다. 너 또한 나에게 비틀거렸냐고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