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들이 이뻐 보입니다.
글을 써 내려간다. 끄적끄적거리던 펜대에 힘이 실린다. 팔이 저리고 손가락이 굳어간다. 자신이 써 내려가는 글에 도취됐음을 뿌듯해하며, 그렇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담배 두대를 피우며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다. 10분 정도의 시간 동안 텁텁한 혓바닥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나의 글은 어느새 타인의 것이 되어있다. 비틀리는 글자들? 여기저기 어색하게 틀린 맞춤법? 그딴 건 조그마한 애교에 불과하다. 발정 난 개처럼 들쑤시기만 한 글, 동정남의 첫 잠자리처럼 강약 조절이 없는 미숙한 글, 나는 또 혼자서 중얼거렸구나....... 어찌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만들어지는 아기만이 내 새끼 일수 있겠는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써 내려간 나의 글 또한 내 새끼인 것을 하지만 이 새끼는 얼굴의 형태조차 갖추지 못했다. 어느 정신 분석학자는 아기의 귀여운 얼굴이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결과물일 뿐이라며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자는 모르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처절함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나의 새끼는 부모의 보살핌조차 거부당할 정도로 아름답지가 않은 것이다. 그만큼 나의 글은 처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몇 달 동안 몇 편의 글을 찢어발겨 왔던가. 괴로움은 점점 쌓여만 간다. 귀엽지 않은 아이라 하여 아픔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버리고 버려지며 나는 피폐해져 간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떠났어야만 했다. 어머니의 넓디넓은 포옹은 생각보다 더 편안한 것이었다. 그 속에 너무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나약해졌음을 이미 오래전에 알았었다. 어머니 나는 떠납니다. 당신의 포옹이 나는 너무나도 싫습니다.
망치는 강력하더라, 남들은 한번 두드리면 되는 것을 나는 두 번, 세 번 네 번 두드려된다. 그만큼 손마디에 전해져 오는 충격은 커져만 간다. 이 충격에 빨리 익숙해지자. 익숙해질 때쯤 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6개, 8개, 10개, 15개 짊어질 수 있는 파이프의 개수가 늘어간다. 오른쪽 어깨뼈를 짓누르는 이 압박감에 빨리 익숙해지자 익숙해질 때쯤 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져 발버둥 칠 때면 주위에서 키득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이 나를 비웃고 조롱한다고?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처절하게 비틀되는 나의 몸짓을 그들은 귀여워하는 것이다. 내 새끼도 그렇게 귀여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 멍청이는 또다시 펜대를 잡았다. 섹스의 달콤함에 끌려 정신없이 흔들어대기만 하는 애처로운 남정네처럼 나는 또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자극받은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개천절 집회를 진행하려는 보수 집단의 움직임에 많은 이들이 비난을 가하고 있다. 나를 자극한다. 브런치 작가인 김지연 님, 그녀는 비거니즘으로서 세계를 바라보며 글을 쓴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권리라는 것은 당사자가 고유하게 존재함을 인정함으로써 그 의미가 있다"라고 이 또한 나를 자극했다. 이러한 자극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서툰 거시기를 흔들어 댄다.
개천절 집회를 진행시키려는 이들을 어르신들이라 명명해도 될런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분명 나이가 젊은 이들 역시 문재인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하기 위해 집회에 참석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을 어르신들이라 칭하려 한다. 나의 경험 나의 시각에는 50년 이상의 삶을 바탕으로 둔 이들만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짧은 시각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글이 쓰였음을 미리 경고한다. 집회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국가를 어찌 민주주의 국가라 칭할 수 있을까? 5년 혹은 4년 동안의 통치를 누군가에게 위임하는 투표를 했다며 당신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 살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차라리 자신의 애완견이 대소변을 가릴 수 있음을 더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흔히 말하듯 투표는 민주주의 국가의 꽃이다. 확실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 때만큼 시끌벅적하며 화려할 때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다이다. 투표란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면 그 역할을 다 수행한 것이다. "나는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환상 하나 심어 줬다면 투표는 성공적으로 치러진 것이다. 투표로 뽑힌 대표자는 그렇게 환상 속에 빠져있는 국민을 다독여가며 권력을 행사한다. 주인에게 사료 한 사발을 대접받은 애완견이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후 허겁지겁 사료를 먹어치우는 모습은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은 고작 그 정도의 가증스러운 짓일 뿐이다. 상상해보자 애완견이 사료가 질린다며 발길질을 해대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이때 애완견에게 주인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더 맛있는 음식을 내오지 않는 이상 굶어 죽기를 각오한 애완견은 더 이상 가증스러운 존재가 아니게 된다. 이 당찬 개는 호시탐탐 가증스러운 목줄을 끊어 내려한다. 사료를 으그적 으그적 삼켜대며 목줄을 끊을 힘을 기르는 개도 있을 것이다. 사료를 주기 위해 접근하는 주인을 물어 죽이려는 개 또한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나라에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을 때 내가 주인임을 명확하게 표출시켜야 한다. 표출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의당은 진보정당으로서 어르신들의 집회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며 작은 목소리로 앵앵거린다. 이로써 한국의 진보적 목소리가 힘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정의당은 작은 제스처 정도만을 취했을 뿐이다. 행동이 없는 주장은 초등학교 전교회장 뽑을 때나 쓰이는 것이다. 의석 6석에 5만 명이 넘는 당원수를 가진 정당에게 어울리는 짓거리는 아닐 것이다. 정의당은 무서운 것이다. 어르신들의 광기가 자신들에게 덧입혀질까 무서운 것이다. 어르신들의 행위가 광기로 정의되고 있는 지금 또다시 민주주의는 위기를 겪고 있다.
나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음을, 대한민국의 방역이 성공적이라 하여 코로나 바이러스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전염병은 언제나 인류에게 크나큰 위기였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어르신들의 집회는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탄핵시키기 위해, 국민으로서 지닌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어르신들은 집회를 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문재인 정부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K방역이라 불리는 문재인 정부의 업적에 흠집을 내기 위해 어르신들은 광장으로 모인다. 자신들의 동선을 숨기기 위해 휴대폰을 끄는 치밀함, 보건복지부의 지시를 거절하는 단호함,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는 가족을 위험에 노출시킬 정도의 비장함까지 어르신들은 처절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려 하는 것이다. 뻣뻣했던 허리를 굽혀가며, 새파란 젊은이들이라며 거만하게 치켜떴던 눈을 아래로 아래로 조아리며 몇 시간이나 문재인 탄핵 청원서에 서명을 받아낸다. 나이가 들수록 추위가 아프다는 사실을 몇십 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음에도 비를 맞아가며 집회 참석을 촉구하기 위해 우두커니 팻말을 든다. 정신 나간 것들이라는 따가운 눈총 따위는 같은 목표를 지닌 동무들의 결연한 눈빛으로 이겨낸다. 좋은 일이다. 어르신들이 예전에 비해 건강해졌다. 나이를 먹은 만큼 먹었다는 자부심에 눈을 부라려보지만 눈동자는 흔들렸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이 가치가 없을 리 없다는 확신에 말을 뱉어 냈지만 혀는 안으로 말렸다. 인연을 맺는 행위가 젊은것들의 특권 일리 없다는 확신에 손을 덥석 잡아보지만 손가락은 자꾸만 손바닥을 파댔다. 그랬던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건강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야한 농담을 성큼성큼 해댄다. 보건 복지부에 전화를 걸어 또박또박 욕을 질러댄다. 눈동자는 특정한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렇게 권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만 한다는 감각이 어르신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제 여기서 "권리라는 것은 당사자가 고유하게 존재함을 인정함으로써 그 의미가 있다"는 김지연 작가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권리라는 것은 본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그 의미가 생긴다. 우리 사회는 어르신들의 고유한 존재를 인정해 왔다. 그뿐이었다. 살날이 젊은것들에 비해 얼마 되지 않다는 은근한 압박에 어르신들은 든든하게 존재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 어르신들은 돼먹지 못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죽을 날을 속삭여야 했다. 우리 사회는 돼먹지 못하다 하여 죽이는 그런 사회가 아님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연명하였다. 자신이 쟁취하지 않은 권리가 주는 안정감, 편안함에 눈꺼풀은 쳐져갔다. 그랬던 어르신들이 뻘겋게 상기된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서야 우리 사회는 어르신들의 얼굴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뻘개질 수도 있구나 하며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는 꼴이다. 정광훈 목사의 선동 때문에 멍청한 행위를 하고 있다며 애써 어르신들의 달아오른 얼굴을 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결국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강함은 과시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울타리는 또다시 썩은 악취를 풍기고 있다. 어르신들의 행위를 깔보며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네요"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마치 자신들은 더 성숙한 이들인 척하며 말이다. 부끄러움은 그런 잔인한 말이 결코 아니다. 전시작전 통제권 관련한 연설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호통을 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끄러움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장교가 전시상황에서 국민을 지킬 의지조차 갖지 않았음을 떳떳하게 밝힐 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말이었다. 부끄러움은 포용해야만 할 것을 포용하지 못할 때 샘솟는 것이다. 또한 포용하겠다는 수줍은 결의가 담긴 것이다. 부끄러워하며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얼굴을 봐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빨개진 볼, 비명을 내지르듯 터진 입, 결의에 차 단단해진 눈을 갖추고 있다. 애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부끄러워하는 이의 얼굴 역시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인 그대들은 현재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냐.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못하는 차가운 볼과 어떠한 말조차 건네지 못하는 닫힌 입과 어떠한 것도 담아내지 못하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러움을 배척하기 위한 준비운동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한심한 꼴을 보이고 있다. 차라리 어르신들에게 나가죽으라고 솔직하게 내뱉는 이들이 더 좋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나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어르신들이 문재인 정권을 탄핵시키려는 논리가 거짓되고, 너저분한 것임을, 코로나 때문에 빚을 지고 장사를 접는 이들의 비참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어르신들의 집회를 보고 싶다. 정치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이기는 곳이다. 누가 더 처절하게 느껴지는지는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