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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잘꾸 Nov 11. 2019

처가살이는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불편함은 직시하면 그뿐!


처가살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가슴속에 올라오는 한마디는 따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집에 살고 있다기보다 어정쩡하게 한 다리만 걸쳐서 살고 있는 느낌으로 생활하는데 지쳤기 때문일까 급하게 혼자 살 원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원룸 가격도 예전 동네보다 높았고 매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서일까?

원룸을 알아볼수록 이 돈 내고 혼자 편하게 생활하는 게 맞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원룸을 알아보다가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떤 원룸을 보러 갔더니 주인분이 말했다. 월세라고 하면 매달 일정 금액의 월세를 내면 끝이었는데 12달치 월세를 이사할 때 한 번에 내고 살라고 집주인이 말해주었다. 게다가 꼬박꼬박 월세 안 밀리면 마지막 한 달치 분의 금액은 돌려주겠다는 나름대로의 파격적인 프로모션을 제안하셨다.  이 지역 모두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데 정말 몰랐었다. 근데 그렇게 계산하면 그게 월세인가? 이 동네 전세와 매매가 없는 이유가 단순히 매물이 부족하고 지방이어서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일을 함께 해도 생활은 분리하고 싶었다. 예전 직장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해보았는데 퇴근해도 방문 하나 열면 눈앞에 바로 회사가 있으니 잠만 자는 것이지 집이라는 안락한 공간이 더욱 생각나곤 했다. 몸은 쉬었지만 마음은 쉬질 못하는 느낌적인 느낌..






원룸 한 곳을 계약하고 싶어서 계약금을 걸고 집으로 돌아온 후 두 분께 말씀드렸더니 단호하게 정색하신다.

" 뭣하러 돈을 쓰느냐."

"아직 기다려봐라."

"너무 성급하다."


깊게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밀어붙이고 싶었는데 두 분이 너무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처음 농사를 배워 보려 마음먹었을 때도 가장 발목을 잡았던 집이라는 공간의 어려움을 혼자 해결해보려고 알아보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잘 때는 좀 두 다리 뻗고 자고 싶었다.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현실적 대안이 더 이상 없었기에 독립하여 따로 생활하는 부분은 포기하고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가족과 떨어져 누군가와 함께 일하고 살아간다는 것, 그 주체가 처갓집이고 장인 장모님이라 것 은 쉽지 않은 문제와 불편함으로 남아 있었다. 주말에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야릇한 설렘이 좋았고 반대로 다시 처갓집으로 올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그리워지는 건 가족과 집이었다. 


화장실 소변을 볼 때도 묻어날 수 있으니 앉아서 소변을 보면 어떻겠냐며 권유하시던 장모님과 무엇 하나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고 칭찬은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까다로운 장인어른과 사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겠지만 계속 부딪히며 살다 보면 언젠가 더 편해지겠지 하며 머리를 벅벅 긁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려 애쓰고 말았다.



 


아빠 왜 내 집에 안 와?





한 달째 집에 못 가고 농사일이 바빠서 집에 전화를 했을 때 우리 딸이 대뜸 하던 말이다.

어떻게 통화를 이어가야 하나 고민이 10초 정도 되다가 다시 아무 말도 못 하고 10초가 흘렀다.

"으음.. 아빠 곧 갈 거야." 

"언제?"

"아직 일이 많아?"

"아빠 오면 00 하려고 준비 다해놨단 말이야."

"그래 금방 갈 거니까 만나면 같이 하고 놀자."


딸이 보채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이참 언제 오는 거야?"

"집에 안 올 거면 아빠 오지 마!"


주말마다 아빠가 집에 왔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니까 주말마다 아빠가 오는구나 라고 생각한 거 같은데 그보다 길게 집에 가질 못하고 매일 전화만 하니 어린 딸의 입장에서도 도대체 아빠가 왜 집에 오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딸애가 태어나고 우리는 둘째를 가지지 않기로 결정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태어나기 전 CCAM 판정을 받고 폐에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발병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고 했는데 그 당시 임신 중 판정을 받고 적지 않은 충격을 감내해야 했다. 의사의 말로는 10,000명의 1명 꼴로 발병이 되는데 거의 수술 후 정상 활동에 전혀 지장은 없으며 급성폐렴만 조심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딸애가 세살이 되던 날 서울의 큰 병원에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불행히도 타이어 펑크가 나며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운이 좋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중고타이어로 갈아 끼고 입원을 하고 수술 날짜가 되고 수술실에 아내가 따라 들어가며 1명의 보호자 외엔 들어가지 못하기에 [수술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서 침대가 들어가고 문이 쾅 닫힐 때 그만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회색빛의 한쪽 벽에 기대어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어린 녀석의 몸에 칼을 대고 엄마 아빠의 잘못으로 고통을 받는 것만 같아서 죄책감을 심하게 느꼈다. 내가 술을 먹어서 일까? 잘못된 습관 때문일까? 아내가 임신했을 때 내가 곁에서 부족했던 결핍이 너를 아프게 하는 것일까에 대해 혼자 생각이 들면서 남자치고는 많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 따위 감추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부모님 생각이 났다. 내가 아플 때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 슬퍼하셨겠지 란 생각이 저절로 들면서 자식이 생기니 부모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그렇게 위로했다. 



딸의 아픈 기억




아내는 훗날 얘기해주었다. 수술실에 마취를 하고 딸애의  두 손이 축 늘어질 때 눈물과 함께 공포감이 엄습하여 겁이 나고 어쩔 줄 몰라했다고 말이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현재까지 검사도 이상 없이 건강히 자라 주었다. 몇 년 후에 검사가 예약되어 있지만 지금껏 폐는 잘 자라 주었고 운동하거나 생활에 있어서 문제도 없었다. 한 겨울에 심하게 감기가 걸릴 때면 기침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빨리 낫지 않으면 아내와 둘 다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형제 없이 혼자 크다 보니 지나가는 어르신들은 모두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혼자는 외로우니 하나 더 낳아라." 

"둘은 있어야 나중에 커도 외롭지 않지."



확실히 집안에서 혼자 크니 형제가 없는 부분을 부모가 채워줘야 하는데 엄마보다는 아빠를 더 편하게 생각하고 놀고 싶어 하기에 작은 놀이나 장난감으로도 실컷 놀아주기 위해 애쓰고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딸애는 점점 커지고 어린 시절의 모습을 이젠 사진으로만 본다고 생각하니 항상 좋은 추억,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아 스케치북과 색연필은 항상 다 쓰기 전에 사주고 싶었고 학원을 다니고 학습지를 구독하는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보내주지 못해 속이 쓰려왔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가살이하는 내 현실이 사는 게 아니라 기생하는 것 같다고..

함께 사는 게 아니라 더부살이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 처지가 너무 한심하게 다가온 적도 많았다. 

나라는 주체는 점점 옅어지고 있었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점점 먼 곳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너무 외로워서 가족이 그리워서 혼자 슬며시 메모했던 혼잣말


딸이 보고 싶은데 마음밖에 못 가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실적 모든 상황을 제쳐놓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족을 만나고 싶다. 밤에 자려고 불 끄고 누우면 너무 외롭다.

쓸쓸함이 이런 기분 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시간만 재촉해본다. 제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기 막막하지만 그래도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면 그 자리에 다시 선다면 잠시 마음을 놓고 몸도 쉬고 싶다. 이제 돌아왔구나. 그동안 힘들었구나. 잘 돌아왔다고 되뇌고 싶다. 

딸과의 통화 중 내게 묻는 한마디.. 아빠 집에 언제 올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슬프다. 힘들다 마음이 텅 빈 거 같아서. 난 이런 감정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업이 맞을 거 같다. 그래야 시너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처가살이는 적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극복해내야 한다. 

분명 어렵고 불편한 문제이며 정답은 없다. 


처가살이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지 않는다면 결국 괴로운 건 나구나


누구라도 내 인생에 허락 없이 엮이고 간섭이 들어오면 그 순간 엄청 피곤해지고 복잡해진다. 나한테도 분명 독이 된다. 






가슴속에 아직도 남는 물음은 쉽게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과정이 답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거칠 것 없이 인생을 반짝반짝 살고 싶다. 살아있다고 두근거린다고 가슴속 설렘을 뿜어내며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올라오자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묻는 질문들!


나란 놈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누구를 만날 때 가장 기쁘고 즐거운가? 이 두 가지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을 때 내 인생을 잘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건가? 그걸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만약,  그게 아직 늦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


처가살이를 버티기 위함이 아닌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처음부터 시도할 만하 일은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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