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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잘꾸 Nov 11. 2019

꺼벅꺼벅 일만 하지 말고..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까워서였을까? 장인 장모님이 한날은 물어보셨다. 

"자네는 어떤 농사나 품종 혹은 관심 가는 영농 관련 일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해보니 무엇을 하고 싶던가?"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혹은 "우리 회사 지원동기를 말해보게." 같은 질문의 강도에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이 없구먼 아직.." 

그렇다. 지금까지 걸어왔지만 앞사람 뒤만 보고 스쳐가는 풍경만 바라보았을 뿐, 이 길 끝에 무엇이 있고 어느 방향의 길로 나아갈지 혹은 버스를 타고 갈지 택시를 타고 갈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길을 걷다 신발끈이 풀리면 잠시 않아 끈을 꽉 묶고 내 앞에 가던 장인어른의 짐이 무거워 보이면 나누어 들어야겠다는 생각 이상을 품어 보지 못한 체 농사를 논하며 살고 있으니 문제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농업기술센터 교육을 받으러 가도 형식적인 교육만 받았을 뿐 어떠한 마음에 울림이 느껴지질 않았다. 처음엔 낯설어서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큰 변화가 안 느껴져서 "나만 이상한 건가?"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하며 고민을 해오고 있었다. 


















바쁜 모내기철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기 시작할 무렵 처갓집을 잠시 떠나 일을 하러 갔다. 차 타고 몇십 분 거리에 떨어진 다른 지역에 농사를 크게 짓고 있는 영농조합법인이 있는데 그쪽 대표님과 장인어른 지인이 아는 사이기에 다시 내가 그 틈에 비집고 들어가 일당 받고 농사도 좀 배우라는 불편한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소개팅을 연결해주고 누군가를 소개해주고 그 끝이 해피엔딩이 되지 않으면 엄청한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하는 일과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처갓집으로 소식이 들어간다고 상상하니 언제까지 해야 할지 혼자 가늠해 보곤 했다. 

드넓은 밭농사를 짓고 있는 광활한 땅에 마늘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tv에서나 보던 마늘을 캐고 담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소개로 왔기 때문일까 따뜻한 대접을 받고는 있지만 마음은 굉장히 불편해지고 있었다. 사장님으로 있는 그분의 넘겨짚기 태도 때문이었다. 

정부 지원의 멘토 사업이 있었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영농조합법인 소속의 직원으로 계약을 하면 월급을 받고 일을 하며 영농기술을 배우고 일을 시키고 알려주는 멘토 쪽은 정부에 일정한 지원금을 받는 것이다. 


중소기업과 구직자를 연결해주는 청년인턴 사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청년인턴 사업은 구직자를 고용하면 회사가 정부 지원금을 받고 구직자도 일정 금액을 정해진 기간에 받는 것인데 일회성 정책이라고 말들이 많았다. 취업률을 올리기 위한 정부의 통계 프로그램에 일조할 뿐이라고..


그분의 태도는 이러했다. 서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개해준 분들끼리만의 인맥으로 나를 동일하게 보고 거리감을 조절했고 몇 달 뒤에 있을 멘토 지원에 마치 내가 관심 있고 하기로 했다는 것 마냥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나를 소개하더니 장인어른과 지인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실낱같은 끄나풀을 소개해주면서 말했다.

"멘토 사업 얘도 할거 같으니까 지원서 한 장 더 뽑아놓고 이 친구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면 돼!" 

"저기 밭 보이지?" 

"나중에 네가 맡아서 경작할 수도 있어!" 

"길이 헷갈리니까 잘 봐 두라고!"


처갓집에서 느끼지 못한 불편함이었다.

내가 언제 당신 밑에서 일한다고 했었나?

등 떠밀려서 억지로 오긴 했지만 적당히 일 도와주고 경영하는 것 좀 어깨너머로 보면 될 것인데 이 분은 막무가내였다. 주말부부여서 주말엔 집에 내려간고 말했지만 토요일, 일요일에 바쁘다면 스케줄을 멋대로 잡고 업무 지시를 했으며 마치 벌써 자기 직원인양 말하고 지시하는 태도가 쉽사리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외적으론 수많은 농기계와 스케일이 다른 큰 규모의 밭농사를 하는 대농이자 영농조합법인 대표이자 베테랑 농부였지만 일을 하면서 계속 만날수록 이상하게 사람을 엮어버리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가마니로 볼 거 같아서 내 입장을 단호히 말했다. 소개로 왔지만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차피 일하고 돈도 받으니까 열심히 일할 거고 멘토 사업은 생각 없으니 안 물어봐도 된다고 말이다.


나중에 생각이 바뀔 거란다..


일손은 거의 외국인 인력을 통했지만 말이 잘 안 통하고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되니 대표는 짜증을 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한국 사람인 나를 앞세워 중간 관리자처럼 부리려 했는데 자신의 권한을 일부 나눠준 것처럼 지시하고 일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이틀째 일하러 갔더니 이런 식이었다. 퇴근 무렵에는 나머지 일을 마무리시키기 편했는지 자꾸만 잘 대해주면서 퇴근 시간은 늦곤 했다. 외국인 인력은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였고 내일의 일할 준비와 오늘의 마무리 작업은 마치 소속된 직원처럼 하다가 밤늦게 퇴근하곤 했다. 그러고선 차 기름이 모자라면 채워가라고 선심 쓰듯이 이야기하는데 차에 기름을 넣었다가는 영영 엮일 것만 같기에 괜찮다고 딱 잘라 말했다. 노동의 강도는 '강'이었고 성격상 적당히 농땡이 피우며 요령껏 하는 게 잘 안 되는 타입이었기에 육체적 피로는 강하게 다가왔다. 마늘이 끝나니 양파가 기다리고 있고 양파가 끝나가니 감자가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일하러 떠나오기 전 장인어른의 말이 기억났다.

"가서 어떻게 경영하고 일을 시키고 농사를 짓는지 그걸 잘 보고 오라고!"

"가서 일만 꺼벅꺼벅 하지 말고.."


그렇다 나는 주어진 일만 꺼벅꺼벅 하는 사람이었다.

성격도 순해 빠져서 이런 말도 듣곤 했는데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자기 것 잘 챙기고 약아빠지고 요령도 알아야 하는데 자네는 너무 순딩해서 걱정이야!"


언제쯤 난 순딩하지 않고 약아빠지며 적당한 요령도 알고 남에게 당하기보단 자기 것도 잘 챙기고 살 수 있을까?

[꺼벅 꺼벅 일만 하지 말고]란 장인어른의 말에는 많은 물음을 던져 주기에 충분했다.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 눈치가 없는 사람, 요령 필 줄 모르는 순딩이, 사회경험의 부족?,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지금껏 생각해보니 무슨 일이든 주체적으로 해 나갈 때 기회와 함께 스스로 남는 게 있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일, 내가 해야겠다고 느끼는 일, 가보고 싶다고 하는 장소, 어떤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지 마음을 굳게 먹고 선택했을 때 결과도 보상도 경험도 기억도 무엇이든 남게 되고 새로운 의미를 던져 주었다.

 

조금 더 주체적 선택과 행동을 하기 위해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기로 했다. 

밥을 더 줄까?라고 묻는 장모님의 물음에

무슨 말인지 몰라? 라며 다그치는 장인어른에게 

넌 대체 무얼 하고 싶은데? 라며 묻는 마음속 자신에게

자기 직원인 양 대하며 일을 시키려는 이곳 대표에게

끝없는 오지랖으로 장인어른을 통해 나를 이곳에 보낸 지인에게도


 나는 NO라고 말할 권리가 있었고 내 생각대로 주장을 펼치며 YES라고 말하며 살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YES랑 NO는 내가 정하고 만약 후회를 한다 해도 책임은 내가 지고 다시 새로운 선택도 내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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