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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잘꾸 Nov 11. 2019

불편함 속의 외로움

하루하루 일기를 쓰듯이 그날의 일과 중 기록해야 할 부분을 영농일지에 기록한다.

감나무 방제를 했다면 그날의 물의 양과 농약의 이름, 섞은 양, 방제방법, 그날의 감나무 병충해 상태 등을 기록해서 후년의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감을 딸 때에도 어느 밭에서 얼마나 많은 수확량이 나왔는지 박스 수량으로 적어 놓고 작년과 비교하여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쓰다 보니 일지의 내용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영농일지에서 갈수록 생활일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모내기 파종 첫 시작], [모판 200개], [상토 30포대], [09~12시 영희네 분량 완료]라고 적었다면 [09시부터 파종 시작인데 영희네 아버지께서 오셔서 사사건건 간섭하신다. 상토를 왜 이걸 쓰고 볍씨가 너무 상토에 덮인다며 말로만 지적하시는데 옆에서 좀 도와주시던지 힘들어 죽겠는데 얄궂은 질문만 골라하신다. 가족들과 이사는 언제 올 건지, 농사꾼의 장점에 대해 입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시곤 아내의 친구가 자기 딸인데 00 지역 공무원으로 이번에 진급을 했는데 나훈아 티켓을 보내줘서 바쁜철에 가지도 못하다가 이번 주 겨우 짬 내서 가게 되었다 블라블라~ ] 이런 감정의 배설 같은 글짓기의 흔적을 계속 남기고 있는 것이다.



얼마 안 되었지만 농촌생활에 적잖이 답답함과 인간관계에 고립감을 느껴왔던 탓일까 나는 우울증에 빠질 것만 같이 정서가 곪아가고 있었다. 두 분과 함께 일하면서 무기력하게 대답하고 적당히 일을 했으며 시키지 않은 일을 손도 대지 못했다. 무언가 쓰고 싶고 털어놓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 대상이 여기는 없다는 것이 혼자 있을 때 이유 없는 한숨을 내쉬게 해 주었고  혼자만의  소중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멍 때려도 좋으니 잠시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출구를 찾지 못해 초록색 병의 알코올로 몸과 머리를 마비시키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눈과 귀를 닫곤 심연의 나와 마주하기 시작했다.



어떤 책에서 보았던 구절이 생각났다.

외로움은 사실 인간을 움직이고 사회를 움직이고 커다란 지구를 굴러가는 원동력인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외로움의 에너지를 자기 발전의 에너지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인데 외로울 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예술활동을 하며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여행도 가고 사람도 만나고 그 모든 것을 해야 할 때라는 부분이 생각이 났다.



" 아아 외로울 때 난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 저자의 말대로 무언가를 하면서 외로운 에너지를 사용해야겠다며 밤에 잠들지 않고 일어났다.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계산해 놓고 라디오에 사연을 쓰기 시작했다. 짧은 사연, 긴 사연, 퀴즈며 문자며 실시간 참여. 전화연결 등 가리지 않고 먼 곳에서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SOS 구조 신호를 보냈다.

최대한 솔직하게 내 마음대로 쓰이는 그대로 가식 없이 보고 느꼈던 생각했던 모든 에피소드를 동원하여 글을 쓰고 사연을 남겼다. 영농일지를 적으며 알맹이 없는 기록으로 빈칸을 채워나가던 내 모습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다시 생기가 돌고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어떤 사람들과 공유하며 풀어나갈지 메모하기 시작했고 때론 진지하고 담백한 글을 때론 삶의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글을 표현하고 싶어 더 많이, 더 오랫동안 글과 라디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위로받는 느낌, 아니 누군가에게 위로받으며 너는 잘하고 있고 주변에 나와 같은 동료가 있으니 외로워 말라는 내 맘대로 해석을 DJ의 멘트 마지막에 갖다 붙이면서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감정의 핏줄을 찔러 외로움 예방 주사를 놓았다.



예방 주사는 바이러스를 이겨내기 위해 우리 몸에 이겨 낼 수 있을 만큼의 양을 투여하여 면역력을 기른다고 한다. 지금은 예방 주사를 맞는다고 생각하자. 나중엔 이 정도 외로움은 끄덕 없이 면역이 생겨 이겨낼 수 있겠지.



사실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데 습관적으로 먹고 거절할 줄 잘 모르다 보니 주는 대로 먹기 시작해서 장모님은 걱정을 하셨다.

 "장인 따라다니면서 술만 느는 것 아니냐?"

"젊었을 때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돼."



고기반찬이 나올 때면 식탁에서 장인어른이 초록색 술을 찾으시곤 했는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들이켜고 있노라면 맞은편에서 장모님의 표정을 이러했다.

"아주 주거니 받거니 술이 달다 달어?"




모내기 전 모판

5월의 모내기를 준비하며 마을분들과 함께 육묘장에서 키워온 모를 모판채로 논에 내어놓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사람과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뻗어 모판을 싣고 온 트럭에서부터 논 안쪽까지 모판을 릴레이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입담이 뛰어난 마을 아저씨 덕에 웃을 수 있었고 남이 싸온 새참이 별 볼 일 없다며 지적질도 하며 농담도 주거니 받거니 서로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일하다가 전화가 오니 입담 좋은 아저씨께서 말한다.

"전화가 이제 오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저씨는 쓱 빠져서 한참 통화하시곤 다시 모판을 건네받았다.





시계와 같은 기능을 오랫동안 유지하던 내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고 전화를 받았더니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몸에는 적잖이 열이 나서 얼굴에도 살짝 땀이 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수화기 너머로 "마동석 퀴즈 신청하셨죠?"




"어디신가요?"

"00 라디오인데 남겨주신 글 보고 전화드려요."

한창 바빠 죽겠는데 전화연결이라니..

난 김혜수 관련 퀴즈를 맞히고 싶다고 했는데 마동석이라니..

0.5초 만에 네 퀴즈 할게요. 대답했고 슬금슬금 전화기를 붙잡고 일하시는 분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면서 논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다행히 내가 여태껏 보았던 영화 관련 퀴즈가 나왔고 마지막 문제는 생각이 안 나서 찍어버렸다. 원래 이걸 노리고 쓴 건 아닌데 전화연결 퀴즈도 나름 스릴이 있고 실시간 참여를 한다는 게 적잖이 떨림을 주게 되었다.




현금 5만 원을 추가로 지불하고 아내의 구두를 바꿔 주었다. 구두 교환권이란 걸 처음 받아 보았는데 교환처 매장이 멀리 있어서 살짝 귀찮음을 느끼며 매장을 찾았다. 라디오 사연과 당첨에 항상 심드렁하고 관심 없고 귀찮아하는 아내의 표정이 살짝 미소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이번엔 내가 심드렁 해진다. 구두보다는 난 뭔갈 써야 돼. 쓰면서 누군가와 소통해야 외롭지 않았고 존재감을 느낄 수 있거든.




근데 외로움이란 놈이 예방 접종한다고 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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