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맡는 쑥향
콧 속으로 어떤 냄새가 훅하고 들어오면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 적 있지 않은가요?
봄이 반가운 이유는 따뜻해지는 기온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냄새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가움에 몇 달간 눌려 땅속에 박혀있던 냄새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미는 게 반가운 계절이다.
이제는 피부결을 뚫지 못해 쓰다듬고 지나가는 봄바람 냄새,
얼었던 것이 녹아 폭신해진 땅이 풍기는 쿰쿰한 흙냄새,
풋내가 여물지 않아 덜 향긋한 봄꽃 냄새까지.
봄은 따뜻함과 함께 다채로운 냄새를 가지고 온다.
몇 년 전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에서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는 겨울이었다.
총 영사관 요리사로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라탔다.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좋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설렘만 차지하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는 아직 10월인데도 함박눈이 내리고 발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디딘 첫 발이라 더욱 시렸을지도.
그 후로 몇 달간은 적응하느라 온 정신을 팔았다.
원하는 식재료를 찾기 위해 알파벳 하나 몰랐던 러시아어를 웅얼거리고,
손만 들어서 세우면 모든 차가 택시가 되는 낯선 문화 속에서 녹아들려 애를 썼다.
거기에 매번 방문하는 VIP들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는 건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의전이라는 것을 여기서 처음 경험했다.
음식 외에도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생김새가 그곳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겨서인지 인종차별은 없었다.
사실 언어를 몰라서 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을 뿐이지만.
그렇게 몇 달을 지나고 보니 어느덧 수습기간은 지나 있었고,
겨울 내내 쌓였던 눈도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함께 쌓이고 있던 스트레스는 그제야 한계를 넘어선 듯했다.
전부 알아듣지 못해도 이제 러시아어가 두렵지 않고, 대통령 만찬까지 치러보고 나니 의전도 더 이상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한국을 향해 틀어지고 있었다.
흔하디 흔한 향수병이었다.
어릴 적부터 혼자 살아서 외로움에는 무던했고,
한식을 취급하는 일이라 음식이 그립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집이 생각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기회를 몇 달 만에 포기할 수 없어서 꾸역꾸역 참아내고 있었지만
매일매일 눈뜨는 게 싫고, 의욕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결정한 것이 운동.
과격한 운동은 할 수도 없어 무작정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갔다.
답답함을 떨치려면 멀리 가야 하는데, 멀리 갈 수 없으니 높이 올랐다.
높은 산이 넘쳐나는 카자흐스탄에서 등산은 꽤 매력 있는 취미였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오르막길을 운동화 하나 신고 오르기 며칠.
등산으로는 큰 심경의 변화는 오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무언가 콧 속으로 훅 하고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쑥향.
한국에 있을 땐 쑥향을 좋아하지도 쑥으로 만든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타지에서 쑥향을 맡으니 군침이 먼저 돌았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쑥으로 만든 음식이 그리웠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하나 둘 잊었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적 강가에서 작은 과도를 들고 쑥을 캐던 엄마의 모습을 시작으로 시원한 무가 잔뜩 들어가 소고깃국 끓이는 냄새, 압력밥솥의 추가 요동을 치며 내뿜는 고소한 밥 냄새, 그리고 고동살과 참기름이 섞인 강된장이 올라간 데친 호박잎쌈 냄새까지.
그날 전 산에 오르는 걸 멈추고 벤치에 앉아 쑥향을 실컷 들이켰다.
좋아하지도 않던 쑥향 하나로 수많은 옛날 기억들이 살아났다.
그것을 곱씹기에도 부족해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떠올랐던 수많은 옛날 추억들이 현재의 공허함을 채워주었다.
길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우연히 맡은 쑥향 덕분에 카자흐스탄의 봄을 2번이나 더 경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