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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샨 Jul 03. 2023

뭉클한 몸  

내 몸을 똑바로 바라보기까지 

작은 눈, 까만 피부, 굵은 종아리, 작은 가슴, 굳은살 배긴 발가락, 굽은 등, 낮은 코, 각진 얼굴, 라지 사이즈를 입어야 하는 몸똥아리, 옷을 살 때마다 위축되던 마음이 웅축되어 나라는 인간을 만들었다. 내가 그만큼 못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내 몸을 미워하는 인간이었던 이유는 다양하다. 통상적으로 예쁘고 날씬하지 않은 여자가 겪는 아주 평범한 일들, 하지만 나에겐 깊이 박힌 상처가 된 말들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접하고서 더 혼란스러워진 이유는 정작 내 생활에선 적용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여성성 그대로 당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죄책감만 깊어갔다. 예뻐지고 날씬해지고 싶은 욕구,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 그런 여자가 되지 못함에 슬퍼지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넌 왜 여전한거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하나만 골라! 하고 내면의 목소리가 비난을 쏟아내도 어느 욕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 있는 그대도 받아들여지고 싶다가도 이대로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대체 그 사랑이라는 건 누구에게 받고 싶은 건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거나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가수 이랑의 노래 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가사가 꼭 내 맘과 같았다. 

난 사실 멋내는 게 좋아.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슬쩍슬쩍 
그런데 누가 멋내는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하루종일 핸드폰으로 옷을 구경하고 관련 동영상이나 게시글을 보는 날이 잦다. 하지만 여리여리하고 예쁜 모델들, 주변에 산재하는 '나보다 예쁘고 마른 친구들'을 볼 때면 뱁새가 황새를 따라한다는 기분에 침울해지곤 했다. 서투르게 몸에 맞는 옷을 걸쳐보지만 남들에게는 내가 이런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겨우? 네가? 같은 말들과 시선이 날라올까 두려우니까. 스스로를 감히 그런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되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뚱뚱한 몸을 날씬한 몸으로 바꾸는 것은 노력의 문제라고 한다. 왜 어떤 '노력'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방향을 따라가야 '진짜 노력'이 되는걸까. 그 사람이 삶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애초에 바꾸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 일은 참으로 비참하다. 뭘 먹었지? 얼마나 먹었지? 남들은 잘만 빼고 건강하고 '정상적'인 것 같은데 난 왜 이러지? 내 몸은 왜 울퉁불퉁하기만 할까. 외모 통증을 심하게 앓는 날은 밖에 나가는 것조차 두렵다. 바꾸지 않고 살아갈 순 없을까. 

한쪽에서는 바디 포지티브, 자기 몸 긍정주의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있는 그대로 날 사랑한다니! 한번 따라해보자. 다이어트를 그만둬 본다. 내 몸을 기능으로 바라보려고, 아니면 이대로도 예쁘다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다독인다. 어쩌면 다이어트보다 더 어려운 길일지도 모르겠다. 퍼센테지가 적기 때문에 맞서야 하는 시선도 많을뿐더러 존재를 직면하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심지어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몇 년 째 자존감, 사랑이라는 단어에 몸이나 마음을 기대려 했으나 얇은 천조각처럼 쉽게 빠져나갔다. 이른바 겨자씨보다 얇고 부피가 좁은 내 자존감은 둥글렸다하면 바스러지길 반복했다. 난 여전히 좀 날씬했으면 좋겠고, 살이 찌는 게 두렵다. 


글을 쓰면서 그리고 몸을 긍정하려 노력하며 내가 확 바뀌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 비교하지 않고, 타인의 불안감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생각하기에 매력 있는 모습이 되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고는 있지만 아직 사랑한다는 감각에는 서투르다.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때때로 몸은 그대로 뭉클하다. 조건 없이 사랑해주지도 못하고, 누군가와 비교하며 미워하고, 맘 같지 않음에 안타까워하지만, 몸을 생각하면 왜인지 뭉클하여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득 거울 앞에 선다. 살결을 따라 손을 비벼보고 거진 삼십년 동안 사용한 뼈와 근육을 따라 눈을 움직여본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는 채로 눈앞에 보이는 둥글고 각이 지고 파랗고 까맣고 하얀 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제까지 본 몸이 아닌듯 생소하게 느껴진다. 몸을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 오직 미의 기준점을 통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만 집중했었다. 하나하나 떼어 볼수록 더욱 나로써 존재하는, 존재하게 하는 몸이 희미한 뭉클함을 준다. 여전히 '사랑받는' 몸으로 존재하고 싶지만, 주어진 몸과 살로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모습 그대로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존재한다. 타인의 욕망에 귀기울일 때보다도 어쩌면 더 크고 확실한 욕망이다. 계속해서 충돌하고 자기혐오에 빠지다가도 다시 사랑하려 노력할 내 모습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뭉클한 몸을 다시 바라보고, 애틋해하고 보듬어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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