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이고 소소한 상처들
이번 겨울은 물욕의 계절인 것 같다. 최근 나는 유례없이 많은 돈을 썼으며 그런데도 돈을 더 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예전 같으면 죄책감에 절대 사지 못했을 동물의 털이 든 패딩과 동물의 털로 만든 코트를 샀다. 둘 다 십만원이 넘는 옷이다. 3만원이 넘어가는 구두는 5년 넘게 신어본 적이 없는데, 출시가가 십만원이며 세일가가 5만원대인 구두도 사서 신었다. AHA라는 각질제거 성분을 한 번 써보고는 피부가 매끄러워지는 효과에 홀딱 반해 손바닥 만한 한 통에 2만원이나 하는 바디로션도 샀다. 내게는 큰 결심이 필요한 소비였다.
나도 안다. 이렇게 대단한 듯 써놓은 소비들이 남들에게는 소소하고 별것 아닌, 혹은 지극히 보통의 소비라는 것을. 지나치게 궁상을 떨며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소비에 대해 어떤 죄책감 같은 걸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 사는 행위를 떠올리면 나는 마음 한 켠이 약간 아프다. 어쩐지 내가 버림받는 듯한 기분이다.
몇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첫 번째 장면은 8살 때의 모습이다. 나에게는 하굣길마다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가는 길에 있는 슈퍼에 나를 데리고가 항상 과자나 사탕을 사달라고 했다. 엄마는 매일 내게 천원씩 용돈을 줘서 나는 그 친구와 함께 먹을 간식을 사 나눠 먹으며 집에 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오늘은 돈을 놓고 왔어. 슈퍼에 못갈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말하자 친구는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눈을 찌푸렸다.
“나 그럼 너랑 안 가.”
친구는, 아니 ‘그 아이’는 나를 덩그러니 두고 혼자 가버렸다. 그 애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
두 번째 장면은 고등학생 때다. 그 때 우리집은 형편이 꽤 좋은 편이라 가방이나 옷, 화장품 따위가 떨어지면 디자이너 브랜드의 이월상품을 파는 프리미엄 아웃렛에 들러서 쇼핑을 하곤 했다. 엄마는 내게 책가방을 고르라고 했고, 나는 브랜드 같은 건 잘 몰라서,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다 가장 귀여워 보이는 가방을 가리켰다. 엄마는 선뜻 그 가방을 내게 사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마크 제이콥스였다. 모든 소비가 그런 식이라, 그 당시 내가 무심코 사용하는 물건들은 모두 명품 브랜드였는데 정작 나 자신만 그것들이 다른 물건들보다 비싸게 측정된 것들이라는 걸 몰랐다. 학교 친구들은 그걸 알았고, 졸업하고 한참 후에나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내가 엄청난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고 한다. 진실은 내가 쓰는 이월 상품 명품들은 다른 친구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품질이 나쁘지 않은 브랜드들의 신상품들과 크게 가격 차이가 나지 않았고, 나는 그냥 운 좋게 프리미엄 아웃렛과 가까운 동네에 사는 지방 아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집이 지방이었기에 다른 친구들에 비해 주거비가 저렴해 상대적으로 삶의 질이 높은 건 당연했다.
세 번째 장면은 대학시절의 연애와 관련된 기억이다. 그 때 나는 가난한 남자아이를 만났었다. 사실 연애라기 보다는 어린애 소꿉장난과 비슷한 놀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에게 조금 미안하다. 그 때, 지방 고소득자의 딸이었던 나는 부모의 신용카드를 쓰며 내가 먹는 한 끼가,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얼마인지 전혀 계산하지 않는 복 받은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그랬기에 경제권은 모두 부모님이 가지고 있었고 나는 옷 한 벌 내 마음대로 골라입지 못하는 신세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가난이 뭔지 몰랐던 나는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나이 차이가 나는 커플은 남자가 밥을 사고 여자가 커피를 사는 거라고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했다. (그 남자애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그 때는 그게 어마어마한 나이 차이로 느껴졌었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홍대에서 길을 걷다 봉제 인형 하나를 사달라고 해 선물 받기도 했다. (3만원 짜리였던가.) 얼마 안 있어 그 애는 내게 이별을 고했는데, 나는 그걸 전혀 예상하지 못해 한동안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 애는 그 전날 까지만해도 내게 천사같이 아름다는 둥(우웩), 사랑한다는둥(우웩X2) 달콤한 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나를 끌어내 준건, 내게 따라붙은 어떤 소문이었다.
알고보니 그 남자애는 뒤에서 나를 ‘된장녀’라고 욕하고 다녔고 그것은 그대로 나의 평판이 되어 그 뒤로 나는 선배에게 오천 원 짜리 돈까스 하나를 얻어먹어도 ‘된장끼 논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 남자애가 왜 나를 미워했고, 뒤에서 내 평판을 엉망으로 만들었는지,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복수하듯 이별을 고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한다. 가난은 때로 사람을 정말 작고 비참하고 또 치졸하게 만들고, 그 애는 그냥 어린 애일 뿐이었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그 애가 내게 큰 맘 먹고 사주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점심식사 때다. 그 애는 그 레스토랑에서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방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스푼에 포크를 대고 파스타를 돌돌 말아올리며 그 애의 말을 경청했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만원대 중반 파스타와 피자를 파는 대중적인 레스토랑은 내게 너무나 익숙했고, 그애가 내게 큰 맘먹고 사주는 식사는 두 사람 몫에 후식까지 합쳐도 부모님과 주말 외식할때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먹는 1인분보다 저렴했다. 나는 4천원짜리 학식이나 6천원짜리 한스델리 파스타를 먹을 때와 다름 없는 태도로 그 식사를 마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식사는 그 애에게 며칠 치 생활비였고, 하루치 노동의 대가였을 것이다. 아르바이트 세 개를 병행하며 겨우 학교에 다니던 그 애의 상황을 지금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어렸고, 그 애도 어렸다. 그리고 나는 그 애가 미워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 애가 미워하기 가장 쉬운 사람이었다. 인간은 상처를 받았을 때 자신에게 상처를 준, 바꿀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욕하기보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처지에 있는 가까운 사람을 미워함으로써 아픔을 덜어낸다. 바로 다음 장면의 나처럼.
다음 장면의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한 취업 준비생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토익 공부를 하고 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할지, 먹고는 살 수 있을지 막막하고 미래만 생각하면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미고 먼저 취업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도착한 친구가 사준 밥을 얻어먹고, 친구와 함께 반짝이는 홍대 거리를 걷는다. 친구는 어느 처음 보는 가게 앞에 멈춰서더니 잠깐만 들렀다 가자고 한다. 컬러풀한,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신발들이 진열된 신발가게다. 나는 소파에 멍하니 앉아 대 여섯 켤레의 신발을 신어보는 친구를 구경한다. 20분쯤 고민한 뒤 친구는 신발 한 켤레를 구입한다. 친구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서 직원이 부르는 신발의 가격을 듣는다. 그것은 내 편의점 아르바이트 한달 월급과 맞먹는 가격이다.
그 순간 나는 그 친구가 견딜 수 없이 미워진다. 굳이 나를 데리고, 그 가게에 들러 꼭 그 신발을 샀어야만 했을까? 밥까지 얻어먹은 주제에 나는 자격도 없이 친구를 미워한다.
그 날 이후 몇 년 동안이나, 나는 홍대에서 그 가게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 순간 그 친구를 미워한 못난 자신이, 나를 된장녀라고 욕한 대학시절의 그 남자애와 다를 바가 없던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럽고 또 미워서.
돈에 대한, 소비에 대한 상처받은 기억은 이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오늘처럼 매일 글을 쓸 소재가 떨어진 날 풀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