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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Dec 05. 2021

게으른 일요일의 잡생각

'결혼 안하는 우리 애'의 입장에서 <우리 애가 결혼을 안해서요>를 읽고

오늘 하루는 아주 게으르게 보냈다. 침실로 과자를 가지고 오거나 화장실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후 3시까지 누워 있었다. 그러면서 도입부를 읽다가 덮어두었던 일본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여기서 ‘일본 소설’이란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본 작가가 쓴 소설들 중에서 아무 부담없이 술술 만화책 읽듯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이제 그런 소설들만 나오는 것인지 우리나라에 번역돼 들어오는 것들만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서점 매대의 일본 소설들은 읽는 데 힘이 드는 것들이 거의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물론 그 시절의 나는 다크한 예술가 지망생이었으므로 유행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일본 소설은 취급도 않고 미시마 유키오니 아베 코보 같은 작가들을 빨았다.) 상대적으로 남학생들이 잘 읽었던 오쿠다 히데오나, 여학생들의 사랑을 받던 에쿠니 가오리나 읽는데 힘이 드는 소설은 아니었다. 느낌상 내가 십대였던 오쿠다와 에쿠니의 시대보다 요즘은 더더욱 가볍고 사변적인 소설이 많아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 권 읽는데 아무런 힘이 들지 않고 마음에 아무런 흠집도 남기지 않는 부드러운 소설들, 그러면서 종잇장을 넘기며 집중해 글자를 읽어내리는 데서 오는 기쁨은 그대로 있다. 주말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은 소설인 셈.

오늘 읽은 소설은 <우리 애가 결혼을 안해서요>라는 제목의 책으로, 중년의 부부가 20대 후반인데도 제대로 된 연애 경험 없는 딸이 때를 놓쳐 결혼을 못할까 봐 안달복달하며 맞선을 보러 다니는 이야기였다. 1인칭 화자인 엄마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었는데, 그녀는 월급도 능력도 평균 이하고 똑부러지지도 못한 딸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 헤쳐나가지는 못할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딸을 어떻게든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밀어넣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겪어온 결혼생활의 부조리(맞벌이여도 가사와 육아는 여자의 몫)와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아들 방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며느리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남자측 부모를 보며 ‘과연 이 길이 딸을 위한 길인가’ 고민에 잠기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친구 딸, 독신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친구, 결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고 스스로와 자신의 딸을 자발적으로 상품화하는 맞선 시장의 다른 엄마 등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책을 읽을 사람들도 있을 테니 결말에 대한 스포는 잠시 넣어두도록 하겠지만,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결혼시장의 속물성을 뱃가죽까지 뒤집어 까발린 소설이었다. 참고로 이 책에 등장하는 28살의 딸은 소름끼치게도 나와 동갑이었다. (내가 한국나이로는 서른이지만 만 나이로는 28이기 때문에) 다다음주엔 내 생일인데 딸이 책의 후반부에서 29살 생일을 맞는 것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상하게도 나는 책속의 딸과 같은 나이인데도, 내 가족들은 책 속 부모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내 가족들은 내가 기왕이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나, 정 결혼을 해보겠다면 도와주겠다, 정도의 태도다. 신세대적인 가족들을 둬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책 속 부모들처럼 맞선 시장에 나가지 않는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됐다. 분명히 그런 집들도 있을텐데 말이다.


나는 최근들어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 나름대로 심사숙고해 결론을 내렸다.

1년에 15번 정도 되는 시댁 제사를 치르러 가서는 손이 부르트게 일을 하던 엄마 등등,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경험 플러스, 한글 뗀 여덟살 이후 22년 동안 읽어온 책에서 습득한 짧은 지식에 의하면 결혼이란 여자가 한 남자의 사유재산이 되는 제도다. 그것을 여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싸움이 나고 시월드라는 단어가 생기고 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듣자마자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분들은 내가 결혼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해 노처녀로 늙어 죽을 확률이 높아 콤플렉스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시고 너그로이 넘어가 주시면 된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이성애 커플의 결혼이란, 여자가 남자의 사유재산이 되는 것이 맞다. 비문명화된 곳에서 사람을 납치해 파는 노예 제도가 아직까지 존속한다고 치자. 그 제도를 아무리 현대화해 납치한 노예를 멀미나는 더러운 배가 아닌 비행기에 태워 옮기고, 쉬는 시간을 보장하고, 월급을 준다한들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결혼이란 재생산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자(자궁이 있는 쪽이 애를 낳을 수밖에 없으니)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니 내 경우엔 뭐랄까, 뭔가 약점이 잡혀 협박을 당하거나, 희생과 맞먹을 만한 이점이 있지 않고서야 어지간해서는 그 제도 안으로 들어갈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무엇이 부럽냐면, 새로 산 집을 리모델링하고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 부럽고, 예물로 비싼 물건(명품백등)을 죄책감없이 사고 최신식 가전제품과 그 밖의 많은 물건들을 아낌없이 지르는 것이 부럽고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부럽다. 그러니까 그 한 시기 만큼은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게 부러운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다들 그때까지 (본인 혹은 부모가) 차곡차곡 모아오거나 빚을 내거나 한 돈을 그 시기에만 마음먹고 쓰는 것이고 그 뒤에는 남편 밥차리기와 양가 부모 용돈 분배하기 등의 비교적 캐쥬얼한 태스크부터 시작해 출산, 육아, 베이비시터 구하기, 이유식 해먹이기 등등으로 이어지는 머리 아프고 아랫배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다. 결혼할 때 돈을 많이 쓰는 이유는 그 뒤로 해야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결혼 제도 안에서도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여자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배려 받기보다는 먼저 배려하는 게 편한, 좋게 말하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 나쁘게 말하면 호구 혹은 시녀병 중증은 무리다. 완벽주의 성향과 시녀병 때문에 일도 하고 가정에서도 완벽한 여자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다 골병 나서 요절할 것 같다. (참고로 새 가전 제품과 명품백은 사회에서 내게 결혼을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 나이가 되면 마음껏 질러보리라 마음먹고 적금을 만들었다. 인생에 한 번 뿐인 돈 펑펑 쓰는 시기는 스스로 만들면 그만.)

혹시 단순히 돈쓰는게 부럽고, 결혼에  씌워진 각종 판타지들 때문에 결혼하고 싶은  나이대 여성이 있다면, 서점에 들러 이유식  코너에 가보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수능 교재, 토익 교재, 공무원 시험 교재?   대씩 세게  두께의 벽돌책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그게 , 애를 낳으면  애한테 해먹일 이유식 레시피들을 메뉴당 한두 페이지씩만 수록해둔 책들이다.(소름)  이유식들을 차리기 위한 도구와 식재료도  따로 있으며(소름X2) 맞벌이를 하면서 남편 먹을 밥은 따로 차려야 한다는  포인트다.(소름X3)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주일에 하루 정도 요리를 해주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부지런함을 필요로 한다.

어쨌든 나와 동갑인 여자애를 결혼시키려고 안달이 난 이야기를 몇 시간동안 읽다보니, 괜히 쓴 소리 몇 마디를 적어보고 싶었다.

오늘도 자신을 갈아 넣어 인류의 번영에 이바지했을 유부녀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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