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츄르 Dec 04. 2021

Touching narcissism of the old

'시대'를 키워드로 한 주관적인 감상_ 웨스 앤더슨 <프렌치 디스패치>

함께 술 마실 사람이 없다면, 심야 영화를 보는 것만큼 금요일의 마무리로 적합한 일은 없다. 그 영화가 좋을 경우엔 말이다.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히 들뜬 분위기에 취해볼 수도 있고, 영화가 끝난 한밤중에도 거리가 반짝거려 무섭거나 외롭지 않다.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몸을 던지고 영화 속 아름다웠던 장면들을 곱씹으며 내일에 대한 걱정없이 달콤하게 잠들 수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 덕에 어제 나는 금요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은 웨스 앤더슨이라는 이름을 들어도 별로 흥분하지 않지만 십대 시절에는 달랐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흥행이 그의 이름을 온통 파스텔 핑크 톤으로 덧칠해 발렌타인데이용 호텔 침구처럼 만들어 버리기 전인 고등학생 시절, 나는 웨스 앤더슨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어쩌다보니 굉장히 잘난 척 하는 듯한 말이 되어버렸는데 오해 마시길. 내 세대(90년대 초반 언저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웨스 앤더슨에게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전에도 <로얄 테넨바움>(2002)라는 대중적으로도 꽤 알려진 작품이 있었다. 대중의 손 때가 타기 전에 내가 먼저 좋아했어, 라는 뜻은 결코 아니며, 나는 핑크색을 꽤나 좋아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관련된 핑크색 굿즈들이 너무 예뻐서 한 두 개 사기도 했다.

전부 기억나지는 않지만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시작해, 국내에서 한글 자막을 구할 수 있는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봤었다. 그의 다른 영화보다 더 좋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왜인지 자꾸 보고 싶어 몇 번이고 돌려봤던 건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그리고 <로얄 테넨바움> 속 나무 손가락을 탁탁 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기네스 펠트로는 내 우상이었다. 그렇게 '퇴폐적이고 아름답고 천재적인 언니'가 되고 싶었는데 아주 철저하게 실패했다.     


나는 웨스 앤더슨 영화의 어떤 점이 그토록 좋았던 걸까?

그 시절 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심각하고 내가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아도취자였으므로, 웨스 앤더슨 영화 특유의 60수 호텔 침구처럼 보드랍고 사각사각한, 컬러풀한 영상미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제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면서 그 시절의 '좋아하는 마음'을 다시 갖게 되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1920년대부터 1975년까지 발행된 가상의 잡지로, 영화는 그 잡지 속에 실린 칼럼들을 문화예술, 정치, 미식 등의 섹션으로 나누어 현실 속 과거에 파스텔 톤 컬러를 입혀 우화적으로 비튼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집필진이 각자 본인이 깊이 연루되어 있던 시대나 사건, 인물에 대한 칼럼을 읽어주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형식이다.     


예술 섹션에서는 감옥에 갇힌 살인자가 전위적인 천재 현대미술가로 발굴되는 이야기로, 그를 발굴한 이들이 ‘수요를 창출해’ 그의 작품을 비싸게 팔아치우는 과정을 그린다. 더 비싸게 팔 다음 작품을 빨리 그려내라는 갤러리의 요구에 화가는 감옥 벽에 엄청난 작품을 그려냄으로써 절대 가져갈 수 없게끔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가져갈 수 없음에도 그 작품은 값비싸게 팔리고, 훗날 그 감옥 자체가 갤러리로 바뀐다. 이렇게 요약하니 미술시장을 비꼬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데 영화 자체는 그저 그런 현실을 해학적으로(고등학교 국어시간에나 쓰던 단어를 다 커서 쓰게될 줄이야) 바라볼 뿐이다.      


정치 섹션에서는 6.8혁명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국주의적’ 전쟁에 징발되는 학생들, 어른들의 규율에 맞서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며 저항하는 학생들. 이 시절을 살아왔거나, 혹은 이 시절의 감성을 갖고 있는 (백인) 어른들이 사실상 현 시대의 문화권력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그러한 종류의 감성. 그 어른들이 내 세대에게 해준 것은 그들이 살아왔던 똑같은 세상에 약간의 가식을 더해 준 것밖에는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6.8 혁명 무렵의 시대를 떠올리면 대학 전공 시간에 다루었던 작품 <미국의 송어 낙시>가 떠오른다. 이 시절에 나온 아주 전위적인 소설로, 문창과 전공 시간에는 그리스 비극만큼이나 필수적으로 다뤄지는 작품 중 하나다. 그 작품은 그 당시 같은 시대를 공유하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자기 자식 이름을 <미국의 송어 낚시>로 짓는 용감한 부모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고 언뜻 약 먹고 휘갈겨 쓴 것 같은 앞 뒤가 맞지 않는 헛소리들로 가득 한 소설인데, 읽는 사람에 따라 자본주의 비판, 정치 비판, 문화 비판, 생태주의적 관점 등에 맞추어 갖가지 방법으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어쨌든 다시 영화로 돌아가, 정치 섹션에는  반문화적인 저항 운동에 깊이 동참하는  대의 남학생이 등장하며 그를 추억하는 칼럼니스트는 중년의 비혼 여성이다. 감성이 풍부하고 매력적이지만 살짝 머리가 나빠 보이는 남학생은 저항 운동의 중심에  젊음을 불태우다 어이없는 사고로 추락사하고, 훗날 저항 운동의 아이콘이 되어 ‘영웅이 되고싶어 하는 젊은이들에게 풍선껌처럼 팔려나간다.’

이에 대해 화자인 칼럼니스트는 이런 문장을 적는다.

Touching narcissism of the young!

나는 이 문장을 통해 이 영화 전체를 보았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지난 시절의 낭만적인 면모들이 지닌 감동적인 자아도취Touching narcissism 그 자체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보이는 어둡고 저열하고 우스운 부분들도 약간 안쓰러우면서 사랑스러울 뿐, 해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Touching narcissism of the old!


극장을 나오면서 이제 막 수능을 치른 듯한 어린 커플을 보았다.

“무슨 말 하는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영상미는 정말 끝내줬어.”

“응 그러게, 너무 좋더라.”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충격에 빠졌다. 시대가 어쩌고 웨스 앤더슨의 전작이 어쩌고, 내가 읽어온 몇 권의 책과 쌓아온 좁은 식견에 맞추어 나는 이 영화를 어떻게든 해석하고 이해하려 애썼는데, 이 젊은 커플은 그냥 그 자체로 영화를 즐기고 나온 것이다.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그 자체로, 아무 생각 없이 즐길 가치가 있는 아주 아름다운 영화였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진짜 갖고 싶은 건 지금 가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