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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Dec 01. 2021

진짜 갖고 싶은 건 지금 가져요

물욕을 너무 오래 묵혔을 때 일어나는 일들

지금까지 나는 현재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기약없는 미래로 미루는 삶을 살아왔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연애와 충분한 휴식, 몸 치장 따위를 미뤘고 성인이 된 후에는 좋은 물건을 사는 일을 미뤘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당장 사지 않고 비슷한 모양새에 훨씬 값이 싼 다른 것을 사거나 미루고 또 미루다 '이것조차 갖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 죽을 것 같을 때 큰 마음을 먹고 겨우 마련했다. 


대표적인 물건으로는 미도리 트래블러스 다이어리가 있다. 나는 그것을 사는 일을 거의 5년가까이 미뤘다. 사치란 다이소에서 만원 쓰는 것이었던 내게는, 다이어리에 십 만원을 쓰는 게 2년 할부로 명품백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그 덕에 한창 그 다이어리가 유행할 때는 그걸 쓰는 또래들을 실컷 부러워만 하다가 마침내 나 자신을 위한 신년 선물로 그 다이어리를 샀을 때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나있었다. 그래도 가지게 된 것에 감지덕지하며 1년을 썼지만 어쩐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예전만큼 그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더이상 그것을 쓰는 것이 5년 전만큼 멋있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이어리를 보고 있으면 남녀 모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성차별적인 속설이 떠올랐다. 연인 사이에 여자 측이 섹스를 미루면 미룰 수록 남자는 훗날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그 사이 들였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그 여자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는 속설이다. 

여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어이가 없다. 뭐 여자에게는 권태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먼저 정이 떨어져 떠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데, 마치 연인 관계에서 여자만 남자가 떠날까봐 안달복달한다는 가정이 전제돼 있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아닌가. 

남자 입장에서 봐도 어이없을 것 같다. 서로 좋아서 하는 스킨십을 마치 여자가 남자의 시간과 노력을 대가로 받고 판매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만약 그 속설이 사실이라면 게이 커플이나 레즈비언 커플, 그 외의 이성애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다른 커플들에게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항상 포유류중 가장 오래된 가축이 짖는 소리라고 여겨왔던 얘기인데, 이상하게 미도리 다이어리를 볼 때마다 떠올라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그 이야기 속의 남자가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들인 시간과 애탔던 마음이 아까워 사실 예전만큼 그것을 원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나는 이걸 원해, 최면을 걸고 있었던 거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그 즉시 다이어리 사용을 중단했다. 그리고 이미 여러개의 다이어리를 갖고 있지만 미도리도 한번쯤 써보고 싶어하던 엄마에게 줬다. 


물욕을 오래 묵혔던 또다른 물건으로는 디즈니 베이비돌이 있다. 내가 20대 중반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데 다 큰 성인 여성들 사이에 디즈니 베이비돌이 열광적인 인기를 누렸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디즈니 베이비돌은 한국에 제대로 수입되지 않아 아주 비싸게 유통되었고 미국 여행의 대표적인 기념품으로 여겨져서 아마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글동글한 얼굴의 그 예쁜 인형들이 나는 너무나 가지고 싶었지만 미루고 또 미루다 직장생활 4년차인 28살이 되어서야 그 인형을 갖게 됐다. 이 인형의 경우 미도리 트래블러스와는 정반대로 내가 너무 빠져버려 문제였다. 그 때가 되어서는 그 인형이 젊은 여성들 사이 예전과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또 그게 유행하던 시절 인형을 열심히 사모으던 직장인들은 이미 베이비돌이 아닌 리얼 베이비의 주인이 되어 있어서 내 또래 사이에는 그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사이 하락한 인기만큼 가격도 떨어져 예전에 10만원, 20만원은 줘야 살 수 있었던 인형들을 잘만 하면 3만원대에도 구입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밥을 굶고 신발은 밑창이 떨어져나가게 신을 정도로 궁상을 떨면서도, 그 인형을 사고 사고 또 샀다. 나중에는 인형의 눈 부분을 파내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아크릴 눈알을 넣는 커스텀에도 빠져 한참 몰두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그렇게 커스텀한 인형의 눈알이 틈만 나면 뚝뚝 떨어져 머리통 안쪽으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눈알을 잃은 인형의 모습이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머리통 안쪽에 손을 넣어 눈알을 다시 고정시키는 과정이 너무나 번거로운 바람에 인형을 사는 일도 커스텀을 하는 일도 그만 두었다. 결국 소중한 친구들이 선물해 주었거나 너무 예뻐서 팔 수 없는 것들만 옷방에 장식해두고 나머지는 모두 처분했다. 요즘도 가끔 예전에 팔아버린 베이비돌 중 미녀와 야수 벨을 다시 구입해 이번에는 순정으로 가지고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옷방에 갈 때마다 요즘은 왜 놀아주지 않는거냐며 투명한 아크릴 눈을 번쩍이며 나를 쳐다보는 인형들이 있어 차마 사지 못한다.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미안해서.

이 상반된 묵은 물욕의 물건들이 내게 주는 교훈은 하나다.

"진짜 갖고 싶은 건 너무 미루지 말고 사라."

정말 원하는 것을 제 때 가진다면 이미 마음이 식었는데도 미련 때문에 안써도 될 돈을 쓸 일이 없다. 집착을 동반한 과소비도 안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았을 때, 내 또래 많은 이들이 누리는 것을 나는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다. 그게 뭐라고, 수십 수백만원짜리도 아닌 것을 돈 아까워 사지 못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정말 갖고 싶은데 미루지 않고 산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밖에 없다. 물론 1년간 주택담보대출을 갚아왔음에도 아직도 60%는 빚이고 호재가 없는 서울 변두리의 구옥 빌라일 뿐이지만 나는 이 '참지 않고 저지른 소비'를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이 집을 사지 않는다면 월세로 냈을 돈으로 대출을 갚고 있으니, 어찌 보면 남줄 돈을 저축하는 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방이 세개인 넓은 집을 혼자 독차지한데다 채광이 좋아 주말 낮에 멍하니 햇살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해진다. (물론 이것은 이 집에 이사오기 전 4년동안 온갖 궁상을 다 떨어가며 반지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 이러저러한 자기계발에 수시로 도전하고 이런 소소한 얘기도 써볼 수 있는 건 다 미루지 않고 구입한 보금자리 덕분이다. 번쩍이는 신축 아파트가 아니라도 내 몸 누일 내 공간이 내 소유이기에 성년기 이후 내 인생을 갉아먹어왔던 삶에 대한 불안이 예전만큼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현생에 한 번 뿐인 30대의 이 시절, 이제는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꼭 하나 정도는 제 때 사서 나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것이 아무리 쓸데없고 무의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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