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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슬 Jul 01. 2022

시각장애엄마의 비시각적
쇼트트랙 관전기

- 자랑스러운 아들의 첫 쇼트트랙 전국대회 출전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아들의 생애 첫 쇼트트랙 전국 대회.

예체능 출신 엄마답게 전날부터 내가 더 긴장되었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니 도대체 링크장에서 얼마나 대기해야 할지도 모르고 아이는 무언가를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는데 그렇다고 긴장되어 막상 뭔가를 잘 먹기도 어렵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그래서 그냥 내가 연주나 콩쿨 때 하듯이 초콜릿, 핑거푸드형 과일과 착즙과일주스 등을 아이스박스에 넣어 늦은 아침 링크장으로 갔다.

약 4시간을 기다리며 겨우 스케이트만 신고 걷기도 버거운 꼬꼬마 C조 유치원 아가들 경기부터 벌써 포스부터 남다른 A조 시범경기까지 극과 극의 경기들을 지켜보았다.

참고로, 쇼트트랙에서 링크장 A조, B조의 의미는, A조는 특정 기록 이상에 도달하여 교보생명 대회 출전 자격 이상의 기록을 가진 선수 준비생, 소위 전공생들을 의미하며 이응이가 속한 B조는 취미로 쇼트트랙을 즐기면서 배우는 아이들, 마지막 C조는 아가아가한 친구들에게 대회 출전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해 취학 전 유아들을 따로 분류해서 만들어 놓은 분류 기준이다.

C조 경기는 아가들이 스케이트를 신고 잘 걷기만 해도 그저 오구오구 대견하고 귀엽고, 아가가 넘어지면 너무 안타깝고 그런 분위기로 모든 관중들이 엄빠의 마음으로 흠뻑 감정 이입하여 환호하고 탄식하며 관전했다.

아, 진짜 엄빠들이지!ㅋㅋㅋ

반면, A조 아이들의 시범 경기는...

벌써 스케이트 날 나가는 사운드부터, 링크장 속 아이들이 움직이는 속도감에서 남다른 포스를 보여준다.

빠름 빠름 빠름!

한편, B조 아이들의 경기는 역시 취미로 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랜덤으로 편성된 조별 경기여서인지 편차가 매우 컸다. 어떤 조는 아름아름 비슷비슷 우열을 가리기 어렵게 비슷했지만, 또 어떤 조는 1등과 2등과의 차이가 한 바퀴 이상이 나기도 했다. 

음악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어떤 조 경기는 안단테 쯤의 템포로 진행되면서 승부가 결정 나고 또 다른 어떤 조 경기는 프레스토 템포로 진행되면서 승부가 결정 났다.ㅋㅋㅋㅋㅋㅋ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모두 유사한 트리코를 입고 헬멧을 썼으며 너무 빠르고, 경기는 순식간에 끝나니 난 누가 누군지도 안 보이고 좀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몇 시간 동안 앉아서 다양한 수준, 다양한 나이의 아이들이 스케이트 타는 것을 듣고 있다 보니, 안 보이니 지루할 줄만 알았던 쇼트트랙 경기에서 나름 청각적 정보의 의미와 일관성, 나름의 패턴 등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점점 체감할 수 있는 비시각적 정보들이 늘어갔다.

일단 스케이트의 날과 빙상의 마찰 사운드가 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빠르고 느림의 정도로 잘 타는 조와 못 타는 조, 넘어질 것 같은 아이, 어느 정도 안정된 자세로 스케이트를 타는지 여부 등을 아이들의 쇼트트랙 질주 사운드 통해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득 내가 어느 강의에서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소개했던, 미국 최초 칼리지 레벨 시각장애 수영코치가 생각났다.

그 사람은 학생들이 수영하는 사운드만 들어도 그 사람의 수영 자세와 패턴 등을 알 수 있어 누가 누군지도 구분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시각장애를 갖고도 칼리지 레벨 수영 코치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었다.

같은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쇼트트랙 경기를 주의 깊게 관람하면서 그 말이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고나 할까?ㅋㅋㅋㅋㅋ

드디어 이응이 차례가 되자, 당연히 관중석의 나와 이응이는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으므로(내 애가 출발선에 서 있어도 나는 절대로 볼 수가 없으니) 원격으로 이응이 한 팀 앞에서 오늘을 빛내주신 활동지원사 이모께서 카톡으로 알려주셔서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뭐라도 보려고 안 보이는 눈과 소머즈급 수퍼파워 귀를 집중하여 초긴장 모드로 경기를 경청했다.

처음엔 스타트 전부터 마구 라이브포토를 예상되는 지점에 들이대고 눌러서 두 컷 사진을 건지고는 다 관뒀다. 

달려가는 이응이

나름 우리 코치님 취향이 특이해서 색깔이 좀 남다른 트리코랑 블랙 핼멧을 줌으로 당겨 찾아보려 노력도 해봤지만 도저히 구분 불가였다.

이때부턴 그냥 다 집어치우고 짧은 시간 초 집중했다.

'오! 일단 안 넘어지고 있고, 속도감은 사운드 상 1위와 2위는 약간 편차가 있는 것도 같고... 모든 아이들이 사운드 상 평이해 보이고... 누가 1등인진 몰라도 일단 아무도 안 넘어지고 안정적으로 경기가 끝났다.'

결과도 모른 채로 경기가 끝나고 아이를 만나는 순간의 자괴감은 어쩔 수 없었다.

경기를 관전한 엄마 아빠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경기를 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이는 어떻게 내면화하며 소화하고 받아들였을까?

물론 경기 전부터 엄마 아빠는 뒷북관전인거 알지, 하며 농담도 던졌었지만...

아이는 은메달이라며 크게 아쉬워하지 않고 결과에 나름 만족도 한 것 같았다.

별로 떨지도 않았으며 약간 아쉬운 것도 사실이지만 다음엔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집에 오면서 들으니 앞의 애가 B조 치고는 상당히 빠르다고 생각해서 끝나고 물었더니 교보대회 출전 경험이 있는 A조라고 이응이에게 말했고, 그것으로 나름 실력 차를 조금은 납득한 것 같았다.

종종 A조 아이들 중 기록이 부진하거나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B조 대회에 나오기도 한다는데 바로 그 케이스였던 모양이다.

아이는 초등 졸업할 때까지는 코로나도 나아졌으니 기회가 있다면 몇 번 더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은메달을 목에 건 이응이
링크장 앞에서 기념 사진

나는 중학교 가기 전까지는 충분히 도전하며 즐기라고, 콩쿨이나 경기, 각종 대회는 나가면 나갈수록 대처 능력도 더 좋아지고 마음도 대범해지며 실제적 능력도 늘게 되어 있다며 격려해 주었다.

나는 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큰 대회에서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침착하게 스케이트를 탄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했다고 생각했다. 예체능 전공자라면 결과에 대한 기준치가 워낙 높아야 해서 나 역시도 그런 경우였다면 조금 다른 태도로 평가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전공자가 아니니 편안하게 과정을 즐길 수도, 새삼 여유로운 맘을 가진 너그러운 엄마도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웃픈 스토리 하나 더!

아이 경기 당시 우리 아이 헬멧이 블랙이었기에 열심히 카메라로 확대를 해 가며 블랙 헬멧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블랙 헬멧을 쓴 아이는 보이지 않아 당황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뛰는 트랙 라인 색깔에 따라 경기 전에 헬멧에 래핑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ㅠㅠㅠㅠㅠ

아! 안 보여서 끝까지 웃픈 시각장애엄마여.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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