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네잎클로바

by 은진슬

우리 엄마는 79세로, 약 5년 전쯤에 파킨슨병을 진단 받았다.


우리 사이는, 뭐랄까, 시각장애를 가진 둘째 딸인 나와 '과부 마음 홀애비가 안다는 듯' 서로 힘들고 답답한 일들에 대해서도 직설토크를 서슴치 않으며 쿨하게 지내는 사이다.

"엄마, 갑자기 밤에 약 기운 떨어지면 안 움직여지고 화장실 갈 때 당황스러울 수도 있잖아. 지금 당장 쓰라는 건 아니고, 혹시 모르니 내가 좋은 기저귀 한 팩 사다 놓을까?"

"엄마! 안 보이고 못 움직이면 내가 먹고 싶은 거 못 갖다 먹고, 가고 싶은 데 못 가고, 결국 단독주택 계단 몇 개를 못 넘어가서 고립되는 거잖아. 그러니 우리 그 전에 존엄하게 지낼 수 있는 기업형 요양원 같은 데 미리 알아봐 두자. 내가 여기 금액별, 서비스 장, 단점 등을 고려해서 리스트를 좀 뽑아 왔는데 들어봐."

다른 자녀들 같으면 엄마가 기분 나빠할까봐, 상처 받을까봐, 혹은 껄끄러워서 조심조심 눈치만 보는 얘기들이다.

물론 가볍게, 아무렇지 않은 듯 이런 얘길 던지듯이 한다고 해서 내가 아주 편하고 쿨하게 이런 주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를 가지고 40년 이상 엄마에게 양육되어 온 내가 노년기 질병으로 장애를 갖게 된 엄마를 바라보는 심정이란... 필연적으로 장애를 품은 엄마의 노년을 바라본다는 것, 그 복잡하고 아픈 심정을 누가 알까? 나는 그 어려움, 그 절망감, 그 두려움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극한의 이해와 공감과 더불어 더없이 안타깝고 아픈 맘 가눌 길 없다.

그래도 우리 모녀는 이런 이슈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익숙하고 많은 걸 겪고 견뎌 왔기에 될 수 있는 한 쿨하고 위트있고 위엄있게 장애와 노화를 수용하려고 좌충우돌 노력 중이다.

너무 감사하게도 우리 엄마는 힘든 상황에서도 반짝이는 언어 유희와 위트를 잃지 않는, 제법 유머러스한 분이시다. 그런 마음의 소유자이시니 장애를 가진 나 같은 딸에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존감을 장착해 주실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추석 전 주 주말,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처음으로 이틀 간 주무시고 가셨다.

본인이 할머니 집에 가서 자고 온 적은 있지만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주무시는 게 처음이라서인지 평소 엄마랑 어쩐지 궁합이 잘 맞았던 아이가 신이 났던 모양이다.

아이는 계속 할머니 계신 방에 들어가 초등 고학년 남자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잘재잘 말도 많이 하고,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물도 떠다 드리는 등 더없이 사근사근할 수가 없었다.

외동인 내 아이에게 이렇게 Caring한 구석이 있나 싶을 정도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심지어 할머니 심심하지 말라고 자기 방에 있던 클로바램프까지 뽑아서 할머니 방에 설치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이로서는 나름 매우 대단한 손님 접대였는데 낮시간에 공부할 때도, 밤에 혼자 잠을 잘 때도 클로바에게 자꾸 클래식을 틀어달라, 맘에 드는 오디오클립을 틀어달라는 등 아이가 재미있게 친구처럼 여기며 사용하고 있는 기기이기 때문이었다.


화면 캡처 2022-09-14 145848.jpg 클로바램프


할머니에게 무슨 노래를 좋아하시느냐고 물어보니 나훈아의 영영을 좋아한다고 하시자 아이는 클로바에게 나훈아의 영영을 틀어달라고 말하고, 할머니가 4시간마다 약을 규칙적으로 챙겨 드셔야 한다는 걸 아니까 할머니한테 클로바에게 약먹기 알림 부탁하는 법도 알려 드리는 것이었다.


"할머니, 얘한테 저처럼 뭘 부탁하시려면 처음에 <헤이 클로바>라고 부르시고 그 다음에 <나훈아 노래 틀어줘>, <오후 3시에 약 먹으라고 알려줘>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되거든요. 한 번 해보세요."

아이의 말을 들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세이 클로바(?)!, 세이 클로바(?)!"

그러나 클로바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잘 알다시피 AI스피커는 일단 자신의 이름이 정해진 대로 제대로 불리워져야 하며, 호명된 다음에 비프음과 램프 반짝임 등을 통해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표시한 후에 명령을 해야 제대로 알아듣는다.

그런 규칙과 타이밍을 전혀 알 리 없는 엄마는 나나 내 아이가 부르면 저렇게 잘 대답해 주고 원하는 노래도 척척 틀어주며 약 시간 알람까지 똑똑하게 알려주는 클로바가 자기에게는 대답도 안 해주니 답답하고 약간 빈정도 상하신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클로바에게 맘 상한 엄마가 다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게 아닌가?

"네잎클로바!"

아이와 나는 그 순간 숨 넘어가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엄마는 <헤이 클로바>를 <세이 클로바>도 아닌 <세잎클로바>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이놈의 <세잎클로바>가 대답을 안 해주니 우리 엄마의 세미 유머 모드가 발동하여 큰 소리로 <네잎클로바>를 외치신 거였다.

뭐 엄마의 외침을 듣고 보니 납득이 갔다. 클로바의 종류에는 세잎클로바도 있고 네잎클로바도 있으니까.

아이는 할머니의 착각과 센스와 유머가 신기했던지 이 때부터 자꾸 네잎클로바라고 불렀고, 클로바도 처음엔 대답을 안 하더니 어쨌든 뒤에 클로바가 들어가서인지 자기를 부르나보다 하면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집 AI 스피커 클로바는 <네잎클로바>가 되었다.

약도 4시간 주기로 철저하게 맞춰 복용해야 하고, 자꾸 잊어버리시는 것도 많아지시니 어설픈 친구 삼아,

비서 삼아 AI 스피커 하나 사 드리려고 몇 달 전 드디어 스마트폰으로 바꾸도록 도와드렸었다.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면 어머니 댁에 네잎클로바 하나 놓아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