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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규영 Jul 02. 2019

묘사 - 5

그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

     [그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
     복잡 미묘한 이 조건은 세부적으로 파헤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방법은 어휘력에도 상관이 있겠지만 개연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둘 다 술부를 잘못 선택할 때 어긋나게 된다.


     [그 시공간에서]란, 장면 속 인물이 어떤 행위를 하는데, 정말로 그 인물이 그곳에 있느냐는 말이다. 물속에 있다면 물속에 있으므로 [변화]가 제한된다. [어제], [건설현장]에서의 일을 묘사하는데 오늘 병원에 있었다면 [어제] 때문에 [변화]가 제한된다. [변화]란, 당신이 서술한 술부, 캐릭터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조건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에 제약을 거는 조건이다. 그 시공간이 판타지라면 판타지에 걸맞은 세계관이 부여되고,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면 갑자기 초인적인 영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행위에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장면이 넘어가기 전에는 말이다. 장면이 넘어간다면 어떤 개연성이든 깨져도 상관없다. 집에 있던 캐릭터가 장면이 넘어가서 우주에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장면이 넘어가지 않고서 캐릭터의 행위가 갑작스럽고 부자연스럽다면, 실수다.
     이전 장에서도 언급은 했지만, 이것은 소설이기 때문에 용인되면서 누구나 하는 실수 중 하나다. 용인된다는 것은 '그래, 실수는 할 수 있지'라는 말이지 당연하다는 것은 아니다. 쉽게 하자면,

     전봇대 수리공 k는 트럭에서 내려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만리동 고개 전봇대에서 내려다본 서울. 그는 땅에 발을 딛고서도 그 풍경만큼은 잊질 못한다. 그게 그의 첫 일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입에 볼펜을 물고서 사무실에 박혀 있기만을 하더라도 그 열정만큼은 남아있었다. 그는 사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3년 차 전문 인력을 왜 사무실에만 박아놓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 앞 믹스커피를 뜯었다. 커피를 두 잔 탄 그는 사장에게 커피를 건넸다. 사장님. 고맙네. 사장은 K의 책상에 있는 명패를 쓰다듬었다. 자네. 네? 우리 딸 만나 볼 생각 없나?

     여기서 개연성 있게 움직인 거라고는 3년 전을 회상했다가 처음으로 넘어간 것뿐이다. 트럭에서 내려서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간 것은 그럴 수 있다. 이 정도는 '서사물'의 허용범위 안이다. 그다음 장면으로 서울이 나오고, 오르내리는 장면 같은 것은 한 푼도 없이 다시 땅에 발을 디뎠다. 그래, 여기도 이해할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정수기 앞'으로 순간 이동하고, 커피는 뜯자마자 종이컵 안에 있고, 물은 타져 있으며,  커피를 타자마자 사장 앞으로 순간이동했고, 사장은 어떻게 K의 자리까지 이동했나?

     사실 이 정도는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기는 하다. 서술과 서술 사이를 상상으로 메꾸는 것은 독자의 기본 능력이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 서술이다. '명패를 쓰다듬다.'이것만큼은 허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마지막 전 장면으로 가자면, 커피 두 잔을 손에 든 K앞으로 사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사장이 서서 돌아다니는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사장은 앉아있었으니까 커피를 타 주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서술과 서술 사이를 너무 띄엄띄엄 적어둔 탓에 '분명히 이렇다 할' 장면이 주어지지도 않았으므로 우리는 사장이 서있는지 앉아있는지도 모른다. K의 자리는 사장의 자리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어찌 되었든, 사장에게 커피를 주는 장면 다음으로 나온 장면이 무엇인가? 사장이 K의 자리에 있는 명패를 쓰다듬는다는 장면이다.

     99% 확률로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어 K의 자리로 가서, K와 비스듬하게 서서 명패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려 K에게 "자네"라고 하는, 그런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거의 정확하다. [사장이 앉아있거나 사장 자리에 있는 지금]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드라마였다면 NG 또는 옥에 티라고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소설은? 그 사이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용서받고 넘어가면 그만일까? 아니, 당신이 작가라면 그 상상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만 한다.

     이는 사장의 시공간을 충분히 인지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는 사고다. [그 시공간에서]를 충분히 숙지하지 않은 탓에 [변화]를 똑바로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라는 말을 살펴보자. [할 수 있는]이라는 것은 [시공간에 제한된]이라는 말이다. 사장이 사장석에 있는 그 시간,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이 제한될 것이다.

     앉아있었더라면 골프채를 휘두른다든가, 포옹한다든가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장석에 있었으니까 갑자기 K의 자리에 있는 물건을 쓰다듬는 것도 불가능하다.

     [최선의]라는 말은 많은 행동들 중 가장 개연성 있는 행동을 말한다. 개연성이란 당연히 이야기의 흐름에 맞는 행동을 말한다. 이야기의 흐름이란 캐릭터의 성격, 배경, 환경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소심한 성격이라면 소심한 나름의 결과물이 있어야 하고, 어떤 사건을 겪어서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면 소심하지만 용기를 낸 결과물이어야 할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그것이 술부의 품사라는 것을 말한다. 즉, 행위로 하여금 장면이 움직여야 한다. 장면이 움직인다는 것은 인물이나 사물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 예문에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 "커피에 온수를 붓고 휘저은 그는, "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K로 자리로 갔는데, " 같이 꼬리를 붙일 것인가? 그건 기피대상이 아닌가? 우리는 문장이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나? 애초에 왜 싫어하는지는 알고 있는가? 문장이 장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으려면 길어지기 마련인데 왜 줄여야만 좋을까? 그건 다른 단원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게 느낌상 별로 안 좋기 때문이다. 저렴해 보이고, 허접해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애초에 저렇게 꼬리가 붙지 않도록 장면을 이어지 써야 한다. 인물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지 쓰는 게 좋다. 그 노하우는 딱 한 가지. 정말로 장면을 상상하며 쓰면 그만이다. 주인공이 손을 뻗었으면 정말로 뻗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써라. 당신의 주인공을 정말로 TV 화면 속에 넣어서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면'을 넘겨서 인과를 깨트리면서 주인공을 갑자기 순간이동시키는 것도 자연스러워지고, 장면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움직임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행동을 서술하려거든, 그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자. 가장 극단적인 예로, 판타지 작품의 전투 장면을 한 번 써보겠다. 한 장면에서 움직임이 부드럽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한다. 어떤 장면이 좋을까. 두 고수의 살 떨리는 접전으로 하자. 이름은? 어차피 장난으로 쓰는 거니까, 롤리타와 험버트로 하자.


     둘은 동시에 검을 꺼내 들었다. 롤리타의 커다란 대검이 땅에 푹 박혔고, 험버트의 레이피어가 쇳바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롤리타의 육중한 신체만큼이나 커다란 대검은 사람이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힘과 기술의 대결"이라며 험버트의 승리를 예측했다. 레이피어가 분명 저 딱딱한 근육 덩이를 뚫어버릴 거야. 롤리타도 이젠 끝이군. 개새끼, 잘 됐다.

     확실히, 롤리타는 돈 때문에 제국의 개가 되었다. 돈이라면 노인도, 아이도 사정없이 죽여버렸으므로 그를 좋아하는 이 따위는 없었다. 관중들은 험버트의 승리를 기원했다. 성직자 험버트! 성기사 험버트! 부디 예수님의 가호가!

     험버트가 검 끝을 조금 내리더니, 모자를 살짝 들어 인사를 올렸다. 그 시선은 불타고 있었다. 검끝과 미간이 롤리타의 튼튼한 가슴팍을 향하고 있었다. 롤리타는 콧김을 뿜으며 검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 "시작하지."

     선공은 험버트의 몫이었다. 가벼운 레이피어가 살모사처럼 바람에 날리며 그를 따라 잔상을 남겼다. 다섯 보 정도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그의 가죽신이 떠난 곳에 먼지가 일기도 전에, 그의 찌르기 일격이 뻗어졌다. 롤리타는 거대한 철 덩이를 들고서도 몸을 틀어 찌르기를 피했다. 그러나 그 회피 또한 험버트의 범위 안이었다. 그는 채찍을 휘두르듯 검을 휘둘렀고, 찌르기는 베기 일격으로 바뀌어 롤리타의 탄탄한 가슴팍을 베었다. 얇은 상처, 핏방울이 튀기도 전 험버트는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리라 상상했다. 그때, 그의 눈앞에는 시꺼먼 쇠의 잔상이 보였다. 그것이 곧 자신을 두동강내리라. 지레 겁먹은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내던져 굴렀다. 롤리타의 패기인 것이다. 그가 구른 자리에는 정말로 대검이 푹 박혀 있었고, 뒤늦게 그의 살의가 느껴졌다. "쥐새끼 같으니라고." 험버트는 그가 검을 뽑는 시간 동안 그를 죽여야 한다고 직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저 검에 찢겨버릴지 모를 일이다. 그는 쓰러졌던 몸을 스프링처럼 일으켜 롤리타에게 돌진했다. 그리고는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롤리타는 대검 뒤에 몸을 숨겼고, 자신의 공격이 헛손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내뻗어버린 손은, 훈련된 롤리타의 체술에 멈추어버렸다. 대검 반대편에서 나타난 롤리타는 험버트의 손목을 잡아 그의 턱을 주먹으로 갈겨버렸다. 손을 잡은 채로 한 대, 한 대, 험버트의 머리, 옆구리, 뒷덜미를 가격했다. 아찔해진 험버트는 무기조차 놓쳐버렸다. 세상은 돌았고,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험버트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지만, 롤리타가 이미 검을 뽑은 뒤였다. "아, 안돼!" 험버트의 몸은 두동강나버렸다.


     등장인물의 전사(前史)를 설명하기 위해 좀 뭉뚱그린 초반부 말고는 등장인물의 행동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0.5초도 안 되는 시간들의 매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들이 나란히 이어지는 것이다. 판타지의 격투 장면은 대충 이런 식으로 이을 수 있고, 문학에서도 어느 정도 인과성은 지켜주어야 한다. 그게 '상상할 수 있음'의 법칙이다.

     이렇게 우리는 '술부'라고는 했지만, 사물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TV 드라마,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것들의 장면 전환을 많이 참고하면서 인물의 움직임이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참고하는 게 좋다. 전봇대 수리공의 경우는 '이해할 수 있다'고는 적어뒀지만, 그것은 '소설 전체'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즉, 프로의 작품과 수많은 습작들, 장난으로 쓴 것, 취미로 쓴 것들 모두를 포함해 "이것이 소설일 수 있는가"로 따졌을 때 "그럴 수도 있지"를 말하는 것이지, 추천하는 게 아니다. 부탁한다.

     묘사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가만히 있는 것들, 혹은 굳어진 이미지에 대해서는 '명사', <표면-비 표면 이미지>를 이용하고, 움직이는 것, 변화, 행동에 관해서는 <두 가지 조건 적용시키기>를 배웠다. 물론 이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시키지 않아도 무난한 장면 또한 차고 넘친다. 그러나 당신의 글이 더 심도 깊게 느껴지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묘사법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상징을 넣거나, 더 역동적이고 멋진 글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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