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어서 다행이다
11월 말, 서울 집 매매 계약 이후 한 달 반 정도는 내가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써야만 했다. 나의 지적 허영을 채워주던 책들과 DVD들의 양은 생각보다 많았다. 쿠팡에서 보관용 박스를 구매한 후 차근차근 정리를 시작했다. 책과 DVD 정리를 끝내고 나니 더 큰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다. 친구들은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나를 부러워했고, 군더더기 없는 살림살이를 칭찬했다. 그런 우리 집에서 없어도 살았을, 있는 줄도 몰랐던, 알면서도 미처 사용 못 하고 있던 무용지물의 것들이 싱크대며 창고 문을 열 때마다 쏟아져 나왔다. 매일을 정리해도 화수분처럼 넘쳐났다. 가만히 앉아 업무만 보던 때와 다르게 하루종일 움직여대는 나에게 스마트 워치는 활동을 달성했다는 칭찬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저 수납으로 잘 감춘, 미니멀처럼 보이는 물욕쟁이었던 것이다.
주말에는 친구들을 강제 일박 시키며 가져가고 싶은 물건들을 엥겼고, 그 와중에 보관 창고 알아보는 일이며, 해지할 것들, 신고할 것 등의 스케줄들을 메모하고 체크했다. 집을 새롭게 꾸며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사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호하는 편이랄까. 이사하기 전날 호캉스를 간 적도 있을 정도로 보통은 설레고 여유로웠는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힘들었다. 복잡하고 유기적이지도 않았다. 갱년기로 말라붙은 진액을 짜내야 했다. 녹슨 머리를 돌려보려 잘 먹어야 했고, 그래야만 예정된 일들을 누락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셀 수 없는 체크리스트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공수래공수거! 미니멀리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자식들을 위해 많은 것을 지니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든 언제든 죽을 수 있지만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는 내일이 그날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지병이든 사고사든 그렇게 갑자기 일이 생기면 이 지난한 과정을 우리 아이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니 더없이 끔찍했다. 대환장 파티는 한 번으로 족해. 방콕에서의 안식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컨셉 확실하게 잡고 살아보자. 잘 살았는지는 의문이지만, 죽는 건 잘 죽어야겠거든. 굉장한 엄마는 아니어도 ‘우리 엄마 꽤 괜찮았어’ 그 정도로는 기억되고 싶다.
이번 안식년은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평생 몰랐을 수도 있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 뿐, 강물이 흐르듯 같이 잘 흘러가보자. 앞으로의 삶을 관망하며.
잘했다. 아주 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