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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림 May 30. 2023

[나의 응급실 이야기] 응급 환자 안 받습니다.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응급의학을 공부하여 응급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응급의학이란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신경과 등 기존의 세부 의학 영역에서, 응급 상황에 해당하는 질환들을 모아서 하나의 학문으로 엮은 과목입니다. 더불어 응급의학과 의사는 소생술, 중환자 진료 등 병세가 심각한 환자를 진료하는 업무도 맡습니다. 때문에 응급의학과 의사는 소생의학이나 중환자 의학과 같은 자기 전문 영역을 갖고 있으면서도, 내과나 외과와 같은 다른 전문 진료과의 영역에 대해서도 얕게나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의사 또한 Generalist와 Specialist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과나 외과 의사처럼 좁지만 깊이 아는 사람들을 Specialist라고 하고, 응급의학과 의사처럼 넓고 얕게 아는 사람은 Generalist라고 합니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얕게나마 넓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응급실에서 어떤 환자를 만나더라도 진료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응급의학만의 전문 영역도 있기 때문에, 응급의학을 전공한 사람은 Generalist이면서 동시에 Specialist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응급의학과 의사에게는 Generalist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응급의학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항상 의사인 의사’ 즉,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자에게나 의사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의사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의사의 이미지와 가장 가까운 일을 하는 전공 과목을 선택합니다. 학생으로 실습을 돌고 인턴으로 일하면서 여러 선배 의사들의 삶을 간접 체험한 뒤, 그중 '이런 일을 하는 의사가 멋지더라.’는 생각을 품고, 그 머릿속 모습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손을 써서 병에 걸린 조직을 떼어내고 건강한 조직끼리 이어 붙이는 일이 좋은 사람은 수술을 하는 진료과로, 아이들을 만나고 돕는 일이 좋은 사람은 소아과로, 영상을 판독하거나 초음파를 다루고 싶은 사람은 영상의학과를 선택하는 식입니다. 저는 언제 어디서 어떤 환자를 만나더라도, 그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꿈과 가장 가까운 길이 바로 응급의학과 의사의 길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환자를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4년은 길었고, 전공의 과정은 힘들었고, 현실은 제가 꿈꾸던 모습과 달랐습니다. 응급의학은 야전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응급의학과 의사 역시 다른 전문 진료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응급실이나 응급실 의료진과 같은 진료 기반이 없으면 기량을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응급의학과 수련 과정을 통해 제가 꿈꾸던 모습에 어느 정도는 근접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까지는 아니지만, 어떤 환자를 만나더라도, 무슨 검사가 필요하고 무슨 치료를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봉합술이나 농양 배액 등 간단한 처치는 직접 할 수 있는 의사가 된 것입니다. 감기에 걸린 사람에게 기침약을 주고, 찰과상을 입은 사람의 상처를 드레싱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호흡이 어려운 사람을 진찰하여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일과 심장이 멎은 사람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까지. 저는 그야말로 모든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접합니다. 아파서 응급실에 갔고, 치료를 받았지만, 뭔가 잘못돼서 결국 죽고 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수도 없이 죽음을 겪어 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언론은 죽은 사람과 그 가족들의 안타까운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죽음에 관여한 의료진들을 헐뜯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입니다.


 언론에서 의료진의 잘못이랍시고 제시하는 상황 설명을 보면, 어떻게 저게 잘못이 되나 싶은 상황이 많습니다. 물론 의사나 간호사의 역량이 평균적인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도 더러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두 말할 것 없이 의료진의 잘못이고, 의료진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죽은 환자를 진료한 의사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단지 운이 너무 없었을 뿐인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의사가 무슨 짓을 했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 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의 과실이 다소 있는 경우라도 다른 더 급한 환자를 진료하느라 여유가 없어서, 혹은 누구라도 놓쳤을 만한 사소한 징후를 놓쳤을 따름인 경우들입니다. 현장의 의사는 분초를 다투며 진료하는데, 그의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은 그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서 수 명의 전문가가 모여 온갖 전문 서적들을 참고해 가며 의무기록을 꼼꼼하게 검토하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식이면 전혀 아무런 문제 없이 완벽하게 진료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사람의 몸은 다 똑같지 않습니다. 단순히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로 갈리는 수준이 아니라, 세계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한 서로 다른 몸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이는 치료에 대한 반응 역시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들은 혈액량을 늘려 혈압을 높이기 위해 생리식염수를 투약하는데, 수액을 투약하면 혈압이 오르기는커녕 숨을 못 쉬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균을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항생제나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쓰는 진통제는, 어떤 사람에게는 피부에 닿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과 쇼크를 일으키는 독극물입니다.


 그러한 개인차의 영향은 응급 상황에서는 더욱 극대화됩니다. 약물을 사용하는 상황을 예로 들면, 일반적인 환자에서는 어떤 치료가 효과를 볼지 부작용만 생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에도, 우선 적은 용량 정도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치료 효과가 있으면 용량을 높이고, 부작용이 나타나면 중단하는 식으로 용량을 조절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응급 환자를 진료할 때는 약물 용량을 줄이거나 높이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뿐더러, 이미 병으로 인해 생리적인 균형이 무너진 상황이라서 조그만 부작용만 더해지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응급 환자를 진료하는 일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공을 드리블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일입니다. 의사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고, 아무리 많은 경험을 축적했고, 아무리 정신을 단련했다 하더라도, 이따금 치료의 결과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치료에 실패하여 죽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현대 의학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언론은, 의사가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더욱 나빠지게 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문제 삼습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사실 정말 뭔가를 탓해야 한다면, 의사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완벽하게 살려내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학문, 현대 의학 그 자체를 탓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응급 환자를 진료하려 하겠습니까?




 저는 의사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는 의사에게 잘못이 없어도, 의사가 교과서와 가이드라인대로 잘 진료했음에도 놓칠 수밖에 없는, 치료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 없는 상황에서조차, 의사와 병원의 책임을 묻습니다. 심지어 경찰 조사 결과 과실이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법원에서는 무과실책임주의 판례를 인용하면서, 과실은 없지만 일정 부분 책임은 지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기까지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관행이 계속될수록 책임을 질 일이 많은 일을 하려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의사들은 필수 진료과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소아과 의사 품귀 현상이 심각하다고 들었습니다. 응급실들은 응급 환자를 덜 받기 위해 응급의료센터 정부 지원금을 포기합니다. 대신 동네 응급실 간판을 내걸고 수액 장사에만 열중합니다. 반면 소송의 위험성이 적은 비필수 진료과 전공을 지원하는 사람은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갑니다. 


 혹자는 의사의 수를 늘리면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머릿수를 아무리 늘려봤자 미용과 성형 등 소송의 위험이 없고 돈 벌기 쉬운 영역만 과포화될 따름이고, 걸핏하면 소송에 걸려 인생이 풍비박산이 나는 필수 진료과에 지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사도 사람입니다. 더구나 의사가 되기 위해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부터 전문의가 되기까지, 적게는 20년에서 많게는 30년에 달하는 시간을, 남들이 다 누리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공부만 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그런 일을 하려고 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항상 의사인 의사이고 싶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자에게나 의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응급 환자를 살리려다 자칫 실수하여 그를 살려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 실수로 인해 나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 나의 아내, 나의 부모님의 삶마저 무너져 내릴까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 선뜻 나서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갖고도, 환자가 조금이라도 응급해 보이면 "나는 자신이 없으니 다른 큰 병원을 찾으셔라."고만하는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남의 목숨을 살리기 이전에, 저와 제 가족의 안녕부터 먼저 고민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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