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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림 Jun 09. 2023

[나의 응급실 이야기] 다른 병원 가세요.

필수의료의 붕괴를 마주하며.

 “도대체 몇 시간을 앉혀만 놓는 거죠?”


 응급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말이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다는 투정. 하루에도 십 수 번은 듣는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은 사람들은 종종 응급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 응급 상황이라서 빠르게 진료를 받기 위해 응급실에 왔는데, 처치를 빨리 해주기는커녕 대기실에서 기다리게만 한다고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 사이 의사나 간호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검사만 계속 받게 한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응급실 대기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는 환자의 대부분은 온갖 검사를 다 받으면서도 3-6시간 만에 진료를 마친다. 길다고 생각하는가? 외래나 동네 의원에서는 검사 결과를 며칠 후에나 받아보게 된다는 걸 생각해 보자. 3-6시간 만에 검사를 받고 결과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X-ray나 CT 등 영상 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촬영한 당일에 판독을 듣고 집에 가는 건 외래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혹 몇 시간마저도 아쉽다는 분이 있다면, 그건 할 수 없다. 영상 검사는 의사가 한 장 한 장 확인하고 판독하기 때문에, 촬영을 마치고 몇 시간 정도는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


 의사나 간호사를 보기 힘들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외래 한 세션에만 백 명 이상의 환자가 몰려, 의사가 물리적으로 환자당 수 분 이상을 할애할 수 없는 상황과 비교해 보자. 응급실에서는 초기 진료를 받을 때와, 검사 결과 설명을 들을 때, 퇴원이나 입원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 등 최소 두세 번은 의사를 만난다. 간호사 역시 입실 시와 퇴실 시에 적어도 두 번 이상 혈압을 비롯한 활력징후를 체크하고, 검사가 많거나 투약할 약물이 있으면 몇 번씩도 만나게 된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거나 하여 예정에 없던 추가 검사나 투약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의사나 간호사가 재차 설명을 하러 온다.




 몇몇 사람들은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라며, 응급 환자이기 때문에 더욱 빠르고 더욱 면밀하게 진료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 말은 맞다. 응급 환자를 진료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은, 응급실에 온다고 해서 모두 응급 환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응급실 진료 순서를 중증도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의사나 간호사가 제멋대로 짐작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 체계(KTAS)를 따른다. 이 분류 체계에서는 곧 생명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중한 등급으로 평가한다. 고통이 심하다거나, 앉아 있기 힘든 점 등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불편할 따름인 요소는 부차적이다. 구급차를 타고 왔는지의 여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응급실 진료를 빨리 받고 싶다는 이유로 중하지 않은 증상임에도 119를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잘못된 행동이다.


 응급실에서는 중한 등급으로 분류된 환자나 체류 도중 악화된 환자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빠르고 면밀하게 진료한다. 응급실에서 한 번쯤 사방에서 시끄러운 방송이 나오고는 의료진이 죄다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진짜 응급 환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응하는 게 정상이다. 다시 말해 검사마다 대기 시간이 상당하고 의사 얼굴을 보기 힘들다면, 그 환자는 응급 환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응급실은 응급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있는 공간이므로, 응급이 아닌 환자를 진료하는 일에 있어서까지 같은 수준의 노력을 쏟을 수는 없다.




 그럼 현재의 응급실에 문제가 전혀 없나? 그건 아니다. 아무리 핑계를 대려 해도, 환자들의 불만은 실제 상황이다. 외래나 동네 의원에 비해 낫다 뿐이지 더 나아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응급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응급 환자는 물론 응급이 아닌 환자까지도 조금이라도 더 빠르고 잘 진료하기 위해 그동안 무수히 많은 방법을 시도해 왔다. 기존의 타과 의사들이 주 근무지에서 응급실로 내려와 진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1989년 응급의학과를 창설한 것부터, 접수 절차와 검사 절차를 단순화하고, 검사실 이동 동선을 줄이고, 응급 환자와 비응급 환자 진료 구역을 겹치지 않게 편성하고, 의사와 간호사의 근무 스케줄을 최적화하는 등 수많은 혁신을 통해, 현재의 응급실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빠르고 효율적인 곳이 되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 탓에, 아무리 설비와 체계를 뜯어고친들 한계가 있다. 


 그럼 더 나아질 방법은 없을까? 사실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하다. 응급실 개수를 늘리면 된다. 당연한 말이다.




 응급실 개수를 늘리면 된다.


 좀 더 풀어쓰겠다. 응급의료체계가 직면한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응급이 아닌 환자들이 대학병원 응급실에 잔뜩 체류하며 정말 응급한 환자에 집중할 여력을 빼앗는 상황이다. 그러니 이제는 대학병원 응급실을 뜯어고칠 것이 아니라, 그 못지않은 수준을 가진 동네 응급실을 늘려야 할 때이다. 이미 우리 주변에 동네 응급실들이 많다. 그런 응급실들을 개선하여 더 많은 환자를 수용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정말 응급 상황임이 자명하거나 합병증 가능성이 많은 기저질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대학병원이 아닌 동네 응급실로 방문하게 하는 것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이 진짜 응급 환자를 진료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금 덜 급한 환자는 동네 응급실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사실 어지간한 질병은 응급실이 아닌 동네 의원에서도 검사와 치료가 가능하다. 일단은 동네 의원에서 의사를 만나고, 그 의사들이 자기 전문 영역을 벗어나거나 급한 진료가 필요할 것 같으면 응급실로 가도록 연결시켜 주는 체계가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며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당에, 검사도 며칠씩 걸리고 야간에는 열지도 않는 동네 의원부터 가보시라고까지는 못하겠다.


 동네 응급실은 적절한 타협안이 될 수 있다. 응급실이라는 이름을 걸어놓은 이상, 365일 24시간 의료진이 상주하기 마련이고, 온갖 혈액 검사와 영상 검사 결과도 단 몇 시간 만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동네 응급실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이미 최소 5년 간 수련을 받은 바 각종 술기에 능하며 온갖 응급 상황에 익숙한 사람으로, 대학병원 응급실의 최전방을 책임지는 전공의들에 비해 실력도 더 좋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렇게 다양한 검사 장비를 갖추고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채용하고도, 동네 응급실 중 상당수가 '영양제'를 맞으러 오는 할머니들에게 수액 달아주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만큼 한산하다. 어떤 지인으로부터 24시간 근무하면서 환자를 4명 보는 응급실 이야기도 들었다. 정작 응급실다운 기능을 하는 응급실은 부족한 것이다. 오는 사람이 적어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직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수익을 내야 하는 병원장 입장에서는 응급실에 비싼 장비와 인력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더욱 동네 응급실을 기피하고 대학병원으로 향한다. 응급의료체계의 붕괴로 이어지는 끔찍한 악순환이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낼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동네 응급실을 '응급실다운 응급실'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오래 걸린다고 투정하면서도 대학병원을 찾는 것은 그 편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동네 응급실에 먼저 갔다가, 정작 중요한 검사는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학병원으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검사를 받는 일을 겪고 나면, 그 사람은 다음에도 그냥 대학병원으로 가지 동네 응급실 문을 두드려 보지 않는다. 그런 일을 줄여야 한다. 다시 말해, 동네 응급실들이 대부분의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 역량을 '확실히' 갖추게 해 줘야 한다.




 동네 응급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살려야 할 때이다. 첨단 검사 장비와 시술 장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의료진이 충분한 보수를 받으며, 법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진료에 열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반대로, 응급하지 않은 증상으로 대학병원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입구에서 선별하여 동네 응급실을 방문토록 돌려보내거나, 현재보다 더 많은 응급의료관리료를 부담하게 하는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환자들 주머니를 털어 제 주머니를 채우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하시려나 싶다. 하지만 나는 동네 응급실 의사도 아니거니와, 지혜와 지식이 짧아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시장 논리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물론 환자들 개개인이 기본적인 건강 상식과 응급실 이용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정말 응급한 증상이 아니면 자발적으로 동네 응급실부터 방문한다면, 지원금이나 응급의료관리비 증액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건 교육만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수도 없이 응급이 아닌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다음에도 비슷한 증상이 있으면 동네 응급실부터 가보시라고 말씀드렸지만, 그 말을 곧이듣는 분은 몇 없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응급실에 오는 것을 안다. 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응급의학과 의사의 일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오지 않을 사람은 오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정말 응급실에 와야 할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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