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로 가 본 응급실.
며칠 전 일이다. 전날 밤부터 몸살 기운이 도나 싶더니,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배가 극심하게 아팠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직접 배를 눌러보니 윗배에 압통이 있었다. 단순한 위염이나 장염이라기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췌장이나 담낭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의사도 아프면 혼자서는 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그날 하루 병가를 내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내가 일하는 벽지의 보건지소에는 택시도 들어오지 않고, 통증 때문에 직접 운전을 할 수도 없었다. 이에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향했다.
시내에 있는 응급실에 도착했다. 2차 병원에 딸린 작은 응급실이었다.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매우 한산했다. 지난 몇 년, 집보다 응급실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기에, 아픈 와중에도 그곳 풍경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응급실 전체가 출입구에서 한눈에 보이는 구조였는데, 체류 중인 환자는 네다섯 명 정도였다. 그나마도 중해 보이거나 모니터를 달고 활력징후를 감시 중인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실제로 직원들도 한가해 보였다. 사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내내 그렇잖아도 바쁜 응급실 사람들을 더 괴롭게 할까 하여 걱정했었다. 그런데 이 정도면 나 한 명쯤 더 있다고 크게 부담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진료 경험은 최악이었다.
먼저, 선별 구역 간호사는 간호초진을 보는 내내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배가 아픈 환자를 분류할 때 응당 확인해야 할 복통의 강도, 위치, 가슴 통증과의 감별을 위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복벽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 정도였고, 때문에 의식적으로 얕고 빠르게 숨을 쉬는 중이었다. 분당 호흡수가 적어도 20회는 넘었으리라. 그럼에도 초진 간호사는 자동 혈압계로 혈압과 심박수를 쟀을 뿐, 호흡이 빠른 환자에서 중요한 활력징후인 산소포화도는 측정하지 않았다. 호흡이 가쁘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체온을 재는 방법도 엉터리였다. 고막 체온계를 귓구멍이 아닌 귓불에만 슬쩍 댄 것이다. 환자를 바라보기는커녕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체온계를 다뤘으니 어설픈 게 당연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나는 숨이 차지도 않았고, 이송 직전 구급대원이 (정확한 방식으로) 재 준 고막체온은 정상이었다. 원래 간호초진은 시간을 오래 들여가며 정확한 평가를 하기보다는 빠르게 중한 환자를 선별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몇몇 필수적인 절차가 빠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놓친 게 없으니 문제 삼을 건 아니었다. 빠른 초기 평가라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으니까. 그러나 선별 구역 간호사가 보여 준 태만은 뒤이어 일어날 일들의 복선에 불과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날 내가 병원을 찾은 것은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날의 복통은 평소 장염이나 위염에 걸렸을 때에 비해 훨씬 심했다. 나도 나름 의사인데, 진통제 주사나 맞겠다고 응급실을 찾지는 않는다. 검사를 받고 큰 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공중보건의사는 벽지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장염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밤중에 혼자 있는 시간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아닌가.
때문에 나는 뒤이어 나를 진찰하러 온 의사가 필요한 검사를 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내가 앉은 자리로부터 3m쯤 떨어진 곳에서, “배가 아파서 온 게 맞냐”는 것과 “그 외에 다른 증상이 있냐”는, 단 두 개의 질문을 했을 뿐, 그것이 끝이었다. 문진이 끝난 게 아니라 아예 진찰 자체가 끝이었다. 신체검진도 하지 않았고, 이제부터 뭘 하겠다느니 무슨 약을 주겠다느니 하는 말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검사를 하겠다는 얘기가 없었다. 그가 처방한 검사라고는, (아마도 약을 함부로 쓰기 어려운 장마비 상황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을) X-ray 복부 단순 촬영 하나가 전부였다.
처음부터 검사를 해 달라고 요청하면 되는 일 아니냐? 그럴 수 없었다. 나를 진찰한, 아니, 내게 질문 두 개를 했을 뿐인 그 의사는 배 아픈 것 외 다른 증상이 없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떠나 버렸다. 검사를 해 달라고 요청할 틈은 없었다. 나는 그가 어련히 알아서 기본적인 혈액 검사 정도는 처방했겠거니 하고 기다렸지만, 얼마 뒤 주사를 놓기 위해 온 간호사는 정맥로를 확보했을 뿐 채혈은 하지 않았다. 내가 간호사에게 큰 병이 아닐까 걱정이 되니 검사도 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예의 담당 의사에게 얘기해 두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시간이 더 지나도록 채혈을 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내가 배정받은 침상은 응급실 한 구석에 위치한 데다가, 사람을 호출할 수 있는 부저 따위도 없었다.
알고 보니 담당 의사는 검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진통제와 진경제를 하나씩 처방했을 뿐이었고, 효과가 있는지 보겠다며 무작정 기다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아무 효과도 없었다. 그러자 의사는 조금 다른 성분의 진통제와 진경제를 추가로 하나씩 처방했다. 여전히 효과는 없었고, 여전히 검사 처방도 없었다.
두 번째 약의 투약까지 끝나고, 간호사가 약물 주머니를 제거하기 위해 왔을 때에도, 나의 복통은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나는 이제 간호사에게, 나 또한 의사이고 이래저래 해서 걱정이 되니 담당 의사를 만나고 싶으며 검사도 받고 싶다고 전했다. 그렇게 내가 의사라는 것을 밝힌 후에야 비로소 일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를 받을 수 있었고, 복부 CT 검사 처방도 났다. 그제야 처음으로 내 바로 옆까지 다가온 담당 의사는, 어느 병원에서 일하시고 어느 과를 전공하셨느냐 하는 형식적인 인사치레와 함께, 원래 요즘은 신체검진을 잘 하지 않고 약부터 주는 게 트렌드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결과적으로는 장염이었다. 복부 CT 상으로도 그냥 아주 심한 장염이었다. 일단 그걸로 안심이었다. 복통은 여전했지만, 최소한 야밤에 비명횡사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최악의 진료 경험에 실망이 컸던 나는, 다른 진통제를 써보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그냥 내가 기존에 갖고 있는 진통제를 먹으며 요양이나 할 요량으로 퇴원했다. 그렇게 지난 며칠을 끙끙 앓다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어느 정도 회복했다.
의사에게는 꼭 지켜야 할 전문가로서의 직업윤리가 있다.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대부분의 의사들은 직업윤리를 잘 지킨다. 그러나 다른 모든 직역에서 그렇듯이, 직업윤리를 지키지 않는 의사들도 분명 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그 몇몇 몰상식한 사람들이 의사 집단 전체를 욕보인다.
각종 매체에서 보이는 몇몇 의사들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모습과,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제네바 선언 등의 영향으로, 의사라는 직업의 직업윤리는 다른 직업인들의 그것에 비해 더 크고 중요하다는 옳지 않은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의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일을 하기에 다른 직업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의사도 자기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의사들에게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양심적이거나 헌신적인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양아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 또한 모든 직업에서 마찬가지이다. 직업인이라면 자기가 하는 일에 있어 적절한 수준의 전문성과 직업윤리를 갖추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그날 응급실에서 나를 담당했던 그 의사에게는 전문성과 직업윤리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환자와 말 두어 마디 섞는 정도로 병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화 기술은 결단코 없다. 신체검진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초음파나 CT와 같은 다른 최첨단 검사 장비를 동원할 때 이야기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경험이 많은 의사라도 눈대중만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법은 없는 것이다. 나보다 적어도 연필 한 다스만큼은 더 사셨으리라 생각되는 그 선배 의사에게 민원을 넣거나 싸움을 걸 생각은 없지만, 그가 한 번쯤 자신의 진료 태도를 돌아보고 반성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은 든다.
한편으로는 이번 경험을 타산지석 삼아, 다른 수많은 훌륭한 선배들처럼 나 또한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원칙을 지키는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최소한 양아치는 되지 않겠다. 나를 두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낭만론만 펼치는 피터팬이라 하셔도 좋다. 누가 뭐래도 난 내가 옳다고 믿는 그대로 살 생각이다. 설령 내가 세운 원칙이 나를 배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 듯하여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려 한다.
요즘 각종 매체를 통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거나 치료를 받았음에도 운이 나빠서 사람이 죽고 마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많이 접한다. 일반인들은 이런 일들이 의사가 부족해서, 혹은 의사들의 수준이 낮아서 벌어지는 비극이라고들 이야기한다. 반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러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 의사들에게는 잘못이 없는데, 병이 심하지 않음에도 불구 대학병원부터 찾고 보는 환자들의 습성과, 필수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현실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일반인들은 다시 의사들을 향해 밥그릇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종자들이라고 욕한다.
나 또한 의사이고, 필수 의료의 최전선에서 꽤 오래 일했던 사람이기에, 일반인들이 의사들을 너무 나쁘게 본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일반인들이 의사와 병원들을 욕하는 게 무리는 아니구나 싶다. 당장 환자와 보호자들이 마주치는 의사들의 모습이 친절하지도 예의바르지도, 그렇다고 원칙을 지키는 것도 아닌데, 누가 얼마나 좋아해 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의과대학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은 필수 의료 공급 부족을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의사 집단 전반의 전문성 저하와 직업의식 해이로 이어져, 이번에 내가 겪은 일과 비슷한 질 낮은 의료 행위의 성행을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의사들이 허구한 날 입바른 소리를 해 봐야, 정치인들이 그런 실제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그들에게는 뭐가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현실적인지, 효율적인지 따위보다는, 다음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할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즉, 민심이 정치인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의사들은,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들을 설득해야 한다. 정말 옳은 방향으로의 의료 개혁을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악법을 저지하려 하는 것임을 보여줘야 한다. 그동안 그렇게나 열심히 사수해 온 알량한 자존심 곧, 우리만이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콧대를 좀 낮추고, 일반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매일같이 환자와 보호자들을 상대하는 현장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불친절한 데다가 기본적인 원칙조차 무시하는 행태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 “내가 잘 아니까 너희는 따라만 오면 돼” 식으로 환자와 보호자들을 얕잡아보는 행태를 그만두고, 인간 대 인간으로, 동등한 눈높이에서 상대를 존중하며 진료해야 한다. 교과서대로, 학생 시절과 전공의 시절에 배운 그대로 말이다. 그게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다소 피터팬스러운 이유 외에도, 사람들의 지지 곧, 민심을 얻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