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하면서 허구한 날 감기에 걸려 온다. 이따금 콧물을 흘리고 기침을 좀 하나 싶어 체온을 재 보면 과연 열이 난다. 워낙 활동적이고 놀기 좋아하는 녀석이라, 40도에 가깝게 열이 나는데도 장난감과 과자를 찾고 밖으로 나가겠다고 떼를 쓴다. 아파서 끙끙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놀려는 모습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럴 때면 정말 응급실에 데려가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데려가 봤자 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열이 나기 시작한 당일에 응급실에 온 아이를 가리켜 의사들은 ‘원 데이 피버(1 day fever)’라는 용어로 부른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이지만, 그것 하나만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투 데이 피버, 쓰리 데이 피버 등의 용어는 잘 쓰지 않는다. 그 말만 그렇게 고유명사처럼 쓰인다는 것은, 열이 하루 나서 응급실에 오는 아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 데이 피버로 응급실에 오는 아이들은, 숫자도 숫자이지만, 대처가 어렵다는 게 더 문제이다. 응급실에서 울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고되지만, 원 데이 피버 아이와 그 부모를 상대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중한 환자를 상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의 어려움이다. 여타의 아이들과는 다른, ‘일반적이지 않은 진료’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아의 발열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그 중 대부분은 감염 질환이다. 감염 질환은 감염을 일으킨 원인 병원체에 따라 바이러스성, 세균성, 진균성 등으로 분류한다. 소아의 감염 질환은 대부분 바이러스에 의한 감기 혹은 장염이다. Rhinovirus, Enterovirus, Adenovirus, RSV 등 일반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이름부터 Influenza, Coronavirus 등 친숙한 이름에 이르기까지, 감기나 장염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대부분 바이러스이다.
감염의 원인이 세균이나 진균이 아닌 바이러스라는 사실은 불행이기도 다행이기도 하다. 세균이나 진균 감염의 경우에는 병원체를 직접 공격하는 항균제나 항진균제가 있다. 반면 증식력이 강하고 쉴 새 없이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경우, 몇몇 특별한 바이러스 외에는 대개 항바이러스제가 없다. 즉, 감기나 장염을 치료하는 약은 없는 셈이다. 하지만, 바이러스 감염은 세균이나 진균 감염에 비해 병세가 덜 심하고, 기간이 짧으며, 본인의 면역력만으로 낫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행인 측면이 더 크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바이러스 감염의 치료는 그냥 두는 것이다. 병원에서 해 줄 것이 별로 없다. 심지어는 열이 나더라도, 놀 거 다 놀고, 과자든 뭐든 먹으려 하는 아이라면, 열을 꼭 잡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열 때문에 뇌가 녹아내리니 머리가 나빠지니 하는 것들은 다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다. 반면 세균 감염이라면 성능 좋은 항균제가 있기도 하거니와, 본인의 면역력만으로 낫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병원에서 도움을 줄 부분이 꽤 있다.
이처럼 치료가 다르기 때문에, 감염 환자를 진료할 때는 세균 감염과 바이러스 감염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바이러스나 세균 감염 시 나타나는 특징적인 소견, 질병의 진행 경과, 아픈 기간, 혈액 검사 수치 등을 종합하여 구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막 열이 나기 시작한, 원 데이 피버에서는 그런 구분이 어렵다는 점이다. 감염에 의한 특징적인 소견이 나타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질병의 진행 경과나 아픈 기간도 하루 만에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감염에 맞서는 몸의 면역 반응 또한 이제 막 시작된 참이기 때문에, 혈액 검사에서도 별다른 소견이 없다.
그렇다면 구분을 하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전부 다 치료하면 어떨까? 세균 감염까지 염두에 두고 치료를 시작하면 되는 일 아닌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모든 약은 독이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항생제는 뭔가를 죽이기 위해 만든 약이다. 부작용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내성이라는 개념도 있다. 세균들은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발전’한다. 항생제를 자꾸 먹으면, 그 항생제에 저항력이 있는, 즉 내성을 가진 슈퍼 세균이 생긴다. 그 지경에 이르면 치료 방법도 별로 없다.
그러니 응급실에서는 원 데이 피버 아이들은 검사를 많이 하지 않고, 약도 잘 주지 않는다. 검사를 하고 치료를 받기 위해 응급실에 온 부모들의 기대와는 다르다. 앞서 이야기한 ‘일반적이지 않은 진료'라는 게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이다. 부모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가 아파서 응급실에 왔는데, 검사도 하지 않겠다, 이미 집에 있는 해열제 말고는 줄 약도 없다는 얘기를 들으니 화가 난다.
그런 부모를 설득하려면, 오늘 글에서 쓴 바이러스가 어떠니 항생제가 어떠니 하는 설명을 해야 한다. 소아응급실 근무에 들어가면 하루에도 수십 명의 원 데이 피버 아이들을 보기 때문에, 매일 수십 차례 저 장황한 설명을 반복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설명을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이가 검사를 받게 하고 약을 처방해 달라는 부모가 많았다. 그런 부모들과 싸운 일도 적지 않다.
이 글은 부모들에게 아이의 원 데이 피버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썼다. 하지만 열이 나는 아이를 둘러업고 응급실을 찾아오는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아이가 아파서 끙끙대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도 아프다. 큰 병은 아닐까 하여 걱정이 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만이 전부가 아니다. 일단 아이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다. 일어난다기보다는 잠에서 깬다. 그것도 심하게 짜증을 부리면서 깬다. 몸이 뜨거운 듯하여 열을 재 본다. 열이 난다. 다른 아이들에게 옮길까 하여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한다. 졸지에 온종일 홀로 아이를 돌보게 되어, 부모의 하루 계획이 틀어졌다. 그뿐인가. 감정 조절이 서툰 아이들은 아프다고 표현을 하기보다는 짜증을 부린다. 장난감을 집어던지고, 정성껏 요리한 음식이 담긴 그릇을 뒤엎으며, 설탕이 가득한 과자와 음료만 먹겠다고 난리를 친다.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 부모는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응급실을 찾는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오느라 이미 지쳤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마주한 의사 앞에서 아이는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다. 말 안 듣는 아이의 고개를 붙들고 입을 벌리도록 통제하느라 진이 다 빠진다. 그런데 웬걸, 의사는 누가 봐도 ‘귀찮은데 왜 왔지’ 하는 얼굴로, 별 일 아니니 그냥 집에 돌아가서 지켜보라는 말만 한다. 약도 해열제 말고는 줄 게 없단다. 분통이 터진다.
한때는 원 데이 피버로 응급실을 찾아오는 부모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호들갑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내 아이가 아픈 일을 몇 번 겪으면서, 나도 변했다. 이제는 애타는 마음으로 응급실에 온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퉁명스럽게 굴었던 과거의 모습을 반성한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럴 필요가 없는 아이들의 여린 살갗에 주사기를 들이대거나, 쓴 약을 먹기 싫어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항생제를 먹이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루 만에 응급실을 찾지는 않으셨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래도 그들이 겪고 있을 마음의 괴로움과 현실적 어려움에는 공감한다. 같은 부모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