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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림 Jul 07. 2023

[나의 응급실 이야기] 가방 두 개.

익숙해지기 어려운, 익숙한 속상함.

 야간 당직 근무를 마쳤다. 땀으로 흥건해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로 가는 계단 바로 옆에는 소생실이 있다. 소생실은 여느 때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와 응급구조사들의 격앙된 목소리, 그리고 가슴 압박 빈도를 맞추기 위해 켜 놓은 메트로놈 소리가 들렸다. 심폐소생술이 한창이었다. 곧 누군가가 살아남거나 죽으리라.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퇴근하여 주린 배를 채우면 그만이었다.


 소생실 앞에는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흰머리가 나 회색 빛이 돌기 시작한 머리와 생기다 만 얼굴 주름에서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형광을 내는 연두색 등산복 차림이었고, 진흙이 묻은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등산복과 색깔을 맞춘 듯 한 가방도 하나 매고 있었다. 한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주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등에 맨 것 외에도, 손에 가방을 하나 더 들고 있었다. 문득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고 말았다. 그 아주머니, 그리고 그와 함께 응급실에 와 지금은 소생실에 누워 있는 그 사람에게 예상치 않은 불운이 닥친 것이었다. 그의 표정에 드리워 있던 당혹감이 나마저 덮쳤다. 내가 앉아 일하는 자리로부터 소생실 앞 복도를 지나 탈의실로 들어가기까지는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불과 몇 초만에, 평범한 아주머니에 지나지 않던 그의 존재가 내 삶 깊숙이 파고들고 만 것이었다.


 바로 그때, 소생실 문이 열렸다. 나는 소생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심정지 환자를 담당 중이던 후배 전공의였다. 후배는 나를 보고 고갯짓을 한 번 꾸벅하고는 예의 아주머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모르게 그가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담당하고 있지 않은 환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윤리적으로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심폐소생술의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후배 전공의의 말을 듣지 않아도 결과는 짐작 가능했다. 쉴 새 없이 째깍거리던 메트로놈 소리가 멎으면 응당 뒤따라야 할, 의료진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ROSC(Return of spontaneous circulation)가 되면, 즉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면, 가냘프게 뛰는 심장을 안정적으로 뛰게 하기 위해 본격적인 검사와 처치가 시작된다. 심폐소생술 도중보다 더욱 분주해져야 정상이다. 그 분주함이 없다는 것은, 심폐소생술의 결과가 ROSC가 아닌 TOR(Termination of resuscitation), 즉 더 이상 가망이 없어 심폐소생술을 끝낸 상황임을 의미한다. ROSC 상황이라면 메트로놈이 멎은 그 시점에 누구보다 바빴을 소생실 담당 전공의가, 소생실 밖으로 나와 보호자를 면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내 짐작을 뒷받침했다.


 후배 전공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내 짐작대로임을 확인했다. 이제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은 그 아주머니의 남편이었다. 아주머니는 가족을 잃은 사람이 보일 만한 평범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이나 느낀 적 있는 ‘그 기분’을 느꼈다. 익숙해지기 어려운, 익숙한 속상함. 누군가는 생사의 고비에 놓여 있고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잃기 직전인 그 상황에서, 아침으로 뭘 먹을지 따위나 생각하고 있던 나의 뇌를 저주하며, 소생실 앞 복도를 마저 지나 탈의실로 향했다.    




 지인으로 두면 좋지만, 지인으로만 두고, 만나지는 않아야 좋은 사람이 둘 있다. 하나는 변호사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이다.


 매 순간의 기쁘거나 슬픈 정도에 점수를 매겨 그래프로 그린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변동 없이 이따금 조금씩 오르내리는 정도의 구불구불한 선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간혹 학창 시절 배운 ‘불연속 함수’처럼 급격하게 변하는 그래프를 그리는 경우가 있다. 대학에 합격하거나 구직에 성공하거나 청약이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하여 상승곡선을 그린다면 상관 없겠지만, 소송에 걸리거나 지인이 죽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하여 하강곡선을 그리는 경우는 아예 생기지 않는 것이 좋다. 변호사나 의사는 지인으로만 두고 만나지는 않아야 좋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질병 혹은 부상이라는, 평온한 일상을 망가뜨린 갑작스러운 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응급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응급실에서 그 목표를 이루고 돌아간다. 깨끗하게 완치를 받고 가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개는 당장의 통증을 조절하고, 원하는 약을 얻고, 소독을 받고, 상처를 꿰매어, 응급실에 오기 전보다는 회복된 모습으로 응급실을 나선다. 그들에게 있어 응급실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회복의 관문이다.


 그러나 응급실이 모든 사람에게 회복의 관문인 것은 아니다. 골든 타임을 놓친 사람은 물론, 제 때 응급실에 온 사람들조차도 적지 않은 수가 후유증을 갖고 응급실을 나선다. 의료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손 쓸 도리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보통 사람은 평생에 서너 번이나 겪을 누군가의 죽음을, 정말이지 수도 없이 겪었다. 그때마다 ‘그 기분’, 익숙해지기 어려운, 익숙한 속상함을 느꼈다.


 오늘 이야기의 그들 또한 그날 아침까지는 함께 등산을 나온 평범한 중년 부부였을 것이다. 어딘지 모를, 신발에 진흙이 묻을 만한 그곳에서, 한 사람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삶에 닥친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편의 등산 가방을 내려놓지 못하고 겁에 질려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언젠가 익숙해질 수 있을까.




 오해가 없으셨으면 한다. 응급실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누군가의 불행이나 죽음에 관한 경험을 풀어놓지만, 그런 경험을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실제로 그런 안타까운 일들을 허구한 날 겪고 들을 뿐이다.


 사람들은 천수를 누리는 삶을 기본값으로 생각하고, 치료에 실패하거나 골든 타임을 놓쳐 응급실에서 죽는 등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경우는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응급의학을 전공하고, 수년간 직접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나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응급실에서 그야말로 피와 땀을 쏟아 가며 일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결과를 약속할 수 없다. 누군가는 죽을 위기를 운 좋게 피해 가지만, 또 누군가는 미처 피하지 못할 따름이다. 내 글을 읽는 몇 되지 않는 분들이나마 알아주셨으면 하는, 날 것 그대로의 응급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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