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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Jan 13. 2020

직원을 위한 사장은 `거의` 없다.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사장 밑에서 일했었다. 조그마한 디자인 업체(사장은 광고대행사라고 했다)였지만, 깨어있어 보이는 사장과 유능하게 보이는 선배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장은 광고주에게 `끌려 다니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라`며 항상 강조했다. 

언젠간 내 회사의 광고주를 거느려 보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군소 광고주의 일을 하며 업무를 파악해나갈 때쯤 한 광고주가 전화를 했다. 주말, 밤낮없이 전화하는 것에 거리낌 없는 악덕 광고주였다. 안 받으려 했지만 한 낱 직원이 광고주를 불쾌하게 해선 안될 듯하여 받고 말았다.


내용인즉슨, 기존 광고 기사 계약을 변경하는 하는 것이었다. 한 법인의 기사를 여섯 번 진행하기로 했는데, 세 번은 기존 회사로, 나머지 세 번은 다른 회사 기사로 진행하자고 했다. 여섯 번 나가는 걸 나눠서 진행하는 건데, 별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나 계약 시 하나의 법인만 하겠다고 날인했고, 이 내용을 토대로 PR회사와 대행 계약을 맺었다. 해당 요청사항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우리 회사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PR회사와도 문제가 불거지는 `이중 위반`이 발생했다.


공손하게 안 된다고 했다. 광고주는 자기가 돈을 냈는데 왜 안 되냐고 소리를 질렀다. 계약 내용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소용없었다. 외마디 욕설을 내뱉고는 사장과 직접 이야기하겠다며 악덕 광고주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뿌듯했다. 광고주에게 ‘안 된다’라고 말했고, 근거도 논리적이며 합법적이었다. 광고주의 고집을 꺾으며 일을 이끌어가는 유능한 AE로 단시간에 성장한 것 같았다. 사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사장은 볼펜을 집어던졌다. 


“야 이 XX놈!”


귀를 의심했다. “사람이 하는 일에 안 되는 게 어딨냐?!” 사장은 분명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하고 광고주에 휘둘리지 말라고 교육했다. 계약 위반을 요구했고, 나는 안 된다고 했다. 사장은 욕설을 퍼붓고 광고주에게 전화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휴대전화를 받쳐 든 사장은 광고주에게 전화하여 죄송하다며 굽신거렸다. 회사가 계약 위반을 못해줘서, 법을 지켜서 미안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광고주가 불평을 하자 스피커 기능을 켜서 나에게 전화를 건넸다. `욕은 네가 먹어라`는 뜻이었다.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사장은 PR회사 담당자에게 전화하여 광고주가 했던 말 그대로를 내뱉었다. 실랑이는 있었으나 다행히 법적 다툼 없이 계약은 파기됐다. 이후 PR회사와는 거래가 끊겼다. 법을 지키려 애썼고, 가르침 받은 그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장은 내 편이 아니었고, 돈이 나오는 광고주 편이었다. 

회사를 옮겼다. `나의 성장이 곧 회사의 성장`이라고 하는 사장과 일을 했다. `직원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것이 대표의 의무`라고 했다. 나는 절대 믿지 않았다. 몇 해를 함께 일하며 더욱 확신했다. 직원을 위한 사장은 `거의`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는 것이며, 직원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회사 윗사람의 달콤한 말에 흔들릴 때면 그때 기억을 반추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으며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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