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첫 아침, 사무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부산항의 풍경은 늘 그렇듯 분주했다. 크레인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컨테이너를 옮기고, 거대한 화물선들이 항구를 드나들며 세계 곳곳으로 우리의 물건들을 실어 나른다. 그런데 올해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든다. 마치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조용히 밀려오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맴도는 것 같다.
물류업계에서 십여 년을 보내면서 수많은 변화를 목격해왔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근본적이다. 바로 EU 탄소국경세라는 새로운 규칙이 게임의 판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2023년 10월부터 시범 운영되어 온 이 제도가 2026년부터 실제 과세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류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 아침에 마시는 커피부터 저녁에 켜는 전등까지,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트럭이 도로를 달리고, 배가 바다를 건너며, 비행기가 하늘을 가른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탄소들이 대기 중으로 스며든다.
EU 탄소국경세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탄소들에 이름을 붙이고 값을 매기는 제도다. EU로 수입되는 제품들의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고,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것이다. 시멘트, 철강, 알루미늄,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품목으로 시작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들이 이 새로운 잣대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경쟁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수십 년간 쌓아온 물류 노하우가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변화는 언제나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쪽은 두려움이고, 다른 한쪽은 희망이다. 탄소국경세라는 새로운 규칙은 분명 우리에게 새로운 부담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며칠 전, 한 제조업체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이제 우리는 제품을 만들 때 탄소 배출량까지 고려해야 해요. 마치 재료비나 인건비처럼요." 그의 표정에서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결연함을 읽을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는 의지 말이다.
실제로 2023년 10월부터 시작된 시범 운영 기간 동안,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탄소 배출량을 정확히 측정하고 보고하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간접 배출량 계산은 더욱 복잡하다. 공장에서 사용하는 전력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탄소가 배출되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의 경우 상당 부분의 전력을 화석 연료에 의존하고 있어 이 부분에서의 탄소 배출량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이지만, 동시에 개선의 여지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에너지 효율성 향상 등을 통해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공간이 넓다는 뜻이다.
물류 현장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변화는 바로 '측정'의 중요성이다. 지금까지는 시간과 비용이 가장 중요한 지표였다면, 이제는 탄소 배출량이라는 새로운 지표가 추가되었다. 운송 수단별, 경로별, 화물량별 탄소 배출량을 정확히 측정하고 기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GPS 기반 운행 데이터, 연료 소비량, 차량 제원 등의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로 도입해보니 예상치 못한 효과들이 나타났다. 운송 경로가 최적화되고, 연료 소비량이 줄어들며, 전체적인 효율성이 향상되었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는 노력이 결국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친환경 운송 수단으로의 전환도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전기 트럭, 수소 트럭 등이 속속 도입되고 있고, 초기 투자 비용은 높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고 있다. 특히 정부의 지원 정책이 확대되면서 중소 물류기업들도 친환경 운송 수단을 도입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물류 네트워크의 최적화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불필요한 운송 거리를 줄이고, 공차 운행을 최소화하며, 화물 적재 효율을 높이는 것. 이런 노력들이 모여 전체적인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AI 기반 물류 최적화 시스템을 도입한 후,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같은 양의 화물을 운송하면서도 탄소 배출량을 20% 이상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사와의 협력이다. 제조업체나 수출업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전체 공급망의 탄소 배출량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운송 서비스 제공을 넘어서 종합적인 탄소 관리 컨설팅 서비스로의 사업 영역 확장을 의미한다.
정부도 다양한 지원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CBAM 대응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을 위한 컨설팅 지원 사업도 운영하고 있다. 특히 탄소 배출량 측정을 위한 MRV 시스템 구축 지원 사업은 많은 중소 물류기업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앞으로의 전망을 생각해보면, CBAM은 시작에 불과하다. EU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55% 감축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적용 범위도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현재 6개 품목에서 시작된 적용 범위가 화학제품, 플라스틱, 자동차 부품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EU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일본 등 다른 선진국들도 유사한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어 글로벌 무역 환경이 전반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한국의 물류기업들이 단순히 EU 시장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 전반에서 요구되는 탄소 관리 역량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변화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새로운 규제에 적응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답은 우리 주변에 있다. 점점 더 자주 나타나는 이상기후, 해수면 상승, 생태계 파괴 등의 환경 문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성장 방식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지구가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탄소국경세는 바로 이런 경고에 대한 인류의 응답이다.
물류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하는 일, 즉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이제는 정확히 측정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것은 부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명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몇 달간 탄소 배출량 측정 시스템을 도입하고, 친환경 운송 수단을 늘리며, 물류 네트워크를 최적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가장 큰 깨달음은 환경을 보호하는 것과 사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결코 상반되는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두 목표가 서로를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변화는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진다. EU 탄소국경세라는 새로운 파도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는 이 파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대신 이 파도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서핑 보드를 준비하면 된다.
그 서핑 보드는 바로 지속 가능한 물류 시스템이다. 탄소 배출량을 정확히 측정하고, 친환경 운송 수단을 도입하며, 물류 네트워크를 최적화하고, 고객사와 협력하여 전체 공급망의 탄소 관리를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만의 서핑 보드를 만들어낼 것이다.
오늘도 부산항의 바다는 푸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바다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바다는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터전이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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