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유럽, 그리고 우리의 선택

by GLEC글렉

어느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EU에서 날아온 새로운 소식을 접했다.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 줄여서 CSDDD라고 불리는 이 규제는 단순한 법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비즈니스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글로벌 공급망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일해왔다. 수많은 기업들이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 흩어진 파트너들과 손을 잡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쳤을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럽연합이 2024년 내놓은 이 지침은 연간 매출 1억 5천만 유로 이상의 기업들에게 공급망 전반에 걸친 인권과 환경 리스크 관리를 의무화한다. 숫자로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생각보다 깊다. 이는 EU 시장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새로운 현실이다.


특히 물류와 운송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이 변화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매일 수많은 화물이 대륙을 넘나들고, 바다를 건너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그 모든 여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을 정확히 알고 있을까?


보이지 않던 연결고리들

처음 이 규제의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며 놀랐던 것은 그 포괄적인 범위였다. 기업들은 이제 자신의 직접 공급업체뿐만 아니라 2차, 3차 공급업체까지 포함한 전체 공급망을 들여다봐야 한다. 마치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모두 파헤치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나는 문득 몇 년 전 만났던 한 중소기업 대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제품이 유럽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정작 그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저 솔직한 고백으로 들렸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공급망 전체에 대한 실사 의무는 단순한 서류 작업이 아니다. 운송 경로상의 모든 파트너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그들의 탄소배출량은 얼마나 되는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는 마치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이웃집, 그리고 그 이웃의 이웃까지 모두 살펴봐야 하는 것과 같다.


기후변화 관련 의무사항은 더욱 구체적이다. 파리협정 목표와 일치하는 기후 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이때 Scope 3 배출량까지 포함한 전체 가치사슬의 탄소발자국을 관리해야 한다. 처음에는 복잡해 보였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원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체계적인 접근의 필요성

실사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은 6단계로 나뉜다. 마치 집을 짓는 것처럼 차근차근 기초부터 다져나가는 작업이다. 첫 번째 단계인 실사 정책 수립에서는 최고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명확한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류 기업의 경우, 이 정책에는 반드시 탄소중립 목표와 구체적인 배출량 감축 로드맵이 포함되어야 한다. 막연한 목표가 아니라, 언제까지 얼마나 줄일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단계인 리스크 식별 및 평가는 가장 섬세한 작업이다. 운송 분야에서는 운송 수단별 탄소배출량 차이부터 시작해서 운송 경로 최적화, 연료 사용량 및 대체 에너지 활용 현황, 그리고 운송 파트너사들의 환경 관리 수준까지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리스크를 식별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개선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 마치 건강검진을 받고 나서야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계는 리스크 예방 및 완화 조치와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시간 배출량 추적 시스템과 공급업체 평가 체계가 필수적이다. 특히 물류 기업들은 배송 경로별, 운송 수단별 탄소배출량을 정확히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찾는 답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CSDDD 준수를 위한 실행 계획도 단기, 중기, 장기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단기 계획인 6개월 이내에는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주요 공급업체와 운송 파트너사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각각의 환경 관리 수준을 평가해야 한다. 또한 기존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며 인권 및 환경 관련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계약 조건을 개정해야 한다.


중기 계획인 1년 이내에는 구체적인 실사 시스템 구축에 집중해야 한다. 공급업체 평가 기준과 절차를 수립하고, 리스크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며,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고충처리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일들이 포함된다.


장기 계획인 2-3년에서는 시스템의 고도화와 지속적인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AI 기반 리스크 예측 시스템이나 블록체인 기반 공급망 추적 시스템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 이런 기술들은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지만, 미래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항들도 많다. 공급업체 실사 완료율, 환경 및 인권 리스크 식별률, 개선 조치 이행률, 이해관계자 고충처리 건수,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 달성률 등이 그것이다. 특히 물류 기업들의 경우, 월별 배출량 데이터 수집율과 친환경 운송 수단 도입율을 핵심 지표로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


기회로 바라보는 시각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며 나는 한 가지 확신하게 되었다. CSDDD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기회라는 점이다. ESG 경영이 글로벌 표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실사 체계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리스크 관리 능력 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이 변화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면, EU 시장에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에서 신뢰받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길이지만, 그 끝에는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그 변화에 떠밀려가느냐, 아니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느냐이다.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도전을 성장의 기회로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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