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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린다 Apr 01. 2024

눈치 안보고 예술하기

뒤샹의 샘과 <달과 6펜스>

뒤샹의 샘을 마주했을 때 참 당혹스러웠습니다. 루이비통 미술관의 마지막 전시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마티스의 그림에서 적잖은 감동을 느끼고 현대 미술 전시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캔버스를 시뻘겋게 칠해놓고는 저도 작품이라고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검은 점이 찍힌 캔버스도 있었죠. 혼란스러운 작품 가운데 변기가 놓여있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매직으로 날려쓴 듯한 사인이 되어있는 변기를 보고 저는 뭘 느껴야했나요? 이걸 보고 뭘 느껴보려는 제 모습이 민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변기 그 친구도 민망하긴 마찬가지 였을 겁니다. 나는 왜 이 '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가? 사람들은 왜 돈까지 내고 날 보러 올까? 난 그냥 변기인데... 변기한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네요. "변기야 나도 그 마음 이해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넌 뒤샹에게 이용당했어." 길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다가 한쪽 구석에 사인하고 <산> 이라고 제목을 붙였어도 별반 다르지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 전시관에서 변기를 뚫어져라 쳐다볼게 아니라, 뒤샹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 이라는 명제에 반기를 들었던 뒤샹의 예술을 감상해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뒤샹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저에게 주입된 뒤샹의 명성에 불과합니다. 예술가는 명성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꼬리표 마냥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따라붙습니다. 답답한 건 내가 나의 명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겁니다. 명성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냅니다. 유명인들이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게된 건 순전히 운이라고 겸손 떠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보다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작가의 숨은 의도라며 추켜 세워주면, 운이 좋았다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명성이라는 건 허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명성은 허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끔찍한 죽음을 앞두고도 태연했던 건 자신이 정의한 삶의 목적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찰스는 예술을 살고 죽었습니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닙니다. 사람이 삶의 의미를 정의하고 그것을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의 결과물이 심미적으로 아름답거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예술가라 칭합니다. 예술가 찰스의 삶은 그가 죽고나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그림은 잿더미가 되어 아무도 볼 수 없기에 예술가로서 드높은 명성을 얻습니다. 찰스가 죽음을 초월했다는 개념만 남아있습니다. 그 덕분에 대중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찰스에 대해 깊게 알아가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며 기뻐하지요. 만약 우리가 그가 삶의 의지를 표현한 마지막 그림을 마주한다면, 제가 뒤샹의 샘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 있습니다. 제가 뒤샹에 대해 아는 거라곤 변기에 사인한 아저씨 정도가 다입니다. 더 알아볼 수도 있지만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예술의 정의에 반박한 인물로 기억하고 싶고 그렇게 저의 예술 욕구를 자극하는 인물로 남아있길 바랍니다. 뒤샹이 죽을 때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길 바랍니다. 그랬을 거라 상상합니다.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남들이 생각해주지 않는다면. 그게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그런건 운에 맡기고 내 쪼대로 살다 가야겠습니다. 내가 정의한 삶의 목적을 이루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온전히 내 영혼과 육체에 몰입하며 살겠습니다. 몰입은 세상에 대한 저항같은 대단한 것에서 나오는 힘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아니더군요. 몰입은 세상 눈치 안 봄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눈치 안보고 사는 삶이 예술이고, 그 삶이 끝나면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삶에 나름의 해석을 붙여가며 예술 욕구를 불태웁니다. 이게 예술의 모순이자 멋입니다. 육체가 죽고 영혼만 남았을 때는 남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제 삶을 상상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자극을 받아도 상관 없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았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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