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쁜공감 Nov 17. 2021

화내기와 혼내기

마흔 넘어도 여전한 성장통

나는 '화'를 통해 나 자신을 면밀히 들여다볼 기회를 갖곤 한다. 한번 다가올 때 나를 통째로 흔들 만큼 강력하게 휘몰아치긴 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라서 내가 나 자신에게 골몰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아이들을 훈육할 때면 남편은 '화'내지 말고 '혼'내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의구심을 가졌었다. 아니 솔직히 그보다는 일단 기분이 별로였다. 결국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단 지적 같아서이다. 싸늘한 눈빛이며 언성 높인 목소리며 다 거기서 거기이거늘 너는 '혼'이고 나는 '화'라고? 그 말에서조차 발끈했던 건 당연히 내가 '화'라는 내 자신과의 문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화'는 내 인생의 화두였다. 소심했던 탓에 그 때문에 크게 일을 그르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화에 허덕이기 일 쑤였고 그것을 스스로 삼키려 애쓸 때마다 숨이 막혔다. 결국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대학원에 진학하며 진로를 바꾸게 된 계기도 되돌아보면 그 때문이었다.



대학원 여름방학 때 명상을 제대로 배우겠다고 절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내 화를 식혀버릴 방법이 무얼까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짧은 분석과 독서와 순간의 깨달음으론 도저히 극복이 어려웠던 탓이다. 당시만 해도 템플스테이란 말 조차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다지 간이 크지도 않은 내가 절에 들어가 먹고 잘 생각을 했다니 절박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젊었기에 가능하기도 했겠고.



지금은 내가 그런 문제로 고뇌하며 시간을 보냈단 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긴 시간 동안 여러모로 내가 깎이고 다듬어진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내 '화'가 사라져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극한의 순간에 결정적인 사람들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곤 했다. 다들 가족들에겐 그러고 산다고 여기고 싶었는데  '화'라는 걸 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 지!



지금은 내 안에서 '화'를 없애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마저 사랑하겠다 뭐 그런 건 더욱 아니다. 강박과 달리, '화'는 어떤 방향으로든 나를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수긍하는 부분은 내가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과 완벽할 순 없어도 노력을 통해 개선해나갈 수 있기에 줄기차게 애써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그에 대해 노력해왔다는 사실과 그렇기에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결국 지금의 나를 끌어주고 있는 건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인데, 그것만큼은 조금 과해도 문제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때로 사춘기 딸이 내 믿음 따윈 다른 세계로 날려버릴 듯한 기세로 나를 흔들긴 하지만 그래서 더 뻔뻔해질 만큼 당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야 그녀도 엄마가 스스로를 얼마나 믿고 사랑하는지 그거 하나는 확실히 알 것 아닌가 싶다.  



사실 남편이야 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껏 나는 그것을 어떻게든 그의 결핍과 연결시켜 직면시키려 애썼다. 사실 그건 직면을 가장한 비난이었다. 아마 그의 그런 모습 가운데 내게 상처로 연결된 부분들이 있어서일 거다. 어쩌면 직업병 때문이기도 하겠고. 하지만 요즈음의 나는 굳이 속을 파헤치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보이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쪽을 택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훨씬 많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대로 내게 보이고 느껴지는 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인 거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가식 안에도 일정한 진실이 숨어있고 과장 속에서도 사실은 묻어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내 틀에서 보이는 허구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순도 백 프로의 진정성일 수도 있음을 알아간다.



믿음이 있는 한 내 안의 '화'도 조금씩 그 온도를 낮춰가리라 생각한다. 내가 나이 드는 속도보다 조금 더 빨리 노쇠해지길 바란다. 20대의 쌩쌩한 나를 그 들끓는 여름, 안성의 황룡사로 가게 만들었던 당시 연구소의 인턴 선생님은 내게 소감을 물었었다.  나는 내 속에 들어있는 '화'의 정체를 알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투덜거렸다. 그랬더니 수 년동안 명상을 하셨던 그분은 당신 역시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셨다. 그냥 나 자신이 무로 돌아가는 찰나의 경험만이 남아 있다고. 그런데 그 당시의 어렸던 나도 뭔가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만 같은 느낌이었었다. 그때 명상을 줄기차게 해댔으면,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절에 가서 경행과 좌선을 반복했다면 나는 내 '화'의 그림자라도 찾아냈을까.



내가 깨닫게 된 남편의 '혼'내기와 나의 '화'내기의 차이 점은 짜증이 섞여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그는 때로 무섭게 야단치지만 결코 짜증 내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빠를 더 무서워하면서도 아빠를 더 잘 따른다. 그러니 그가 아이들을 훨씬 더 잘 컨트롤할 수밖에 없다. 나는 처음부터 무섭게 몰아세우진 않지만 짜증으로 발동을 건다. 나중엔 이 '화'의 포커스를 나 자신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내 서러움이 북받쳐 나 자신을 추스르기가 힘들어진다.



그에 비해 남편은 아이들을 그렇게 울리고도 조금도 맘 아파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을 걸고 자기 할 일을 한다. 물론 아이들을 풀어줄 땐 오버하면서 장난을 치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빠에게 안겨 앵앵거린다. 아이들이기에 의당 같은 잘못을 반복하긴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조금씩 새겨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엄마에게선 그 상황을 모면해야겠단 생각이 먼저인 것 같고 그렇다 보니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엄마의 기분이 포커스가 되어버리는 듯하다. 그러니 상황은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분명한 내 잘못이다. '혼'내지 않고 '화'내서일 테지.



'화'내기가 아닌 제대로 '혼'내기가 되기 위해서는 내 '화'가 먼저 수그러들어야 할 거다. 하지만 영원히 그 불씨를 사그라 뜨릴 순 없을 테고 그 순번을 기다리다 아이들의 유년시절을 홀랑 날려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보다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노력해보기로 한다. 일단은 남편 말대로 짜증으로 발동 걸지 않아 보기로. 견딜 수 없으면 처음부터 그냥 질러버리는 편이 낫다는 게 그의 지론. 그래야 더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고 마무리가 된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화와 짜증은 너무 쿵작이 잘 맞는 벗이긴 하지만 이제는 서서히 등 돌리게 해야겠다.



이러나저러나 나를 단련시키는 건 아이들이고 부모라는 책무다.



아빠에게 혼나고있는 꼬꼬마시절의 남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