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이 없는 아이? 호기심이 있는 청소년? 결국 부모와의 소통방식이다.
"잘 선택해라. 지금 한다 그러고서는 몇 달 안 가서 또 안 한다고 그러면 안 돼. 네가 책임져야 해."
"됐어요. 됐어. 그냥 지금 안 할래요."
"얘가 아직 잘 못하는데, 남들에게 피해만 주면 어쩌지요?"
"좀 더 기다렸다가 잘하면 그 때 해 보게 할께요."
"B도 이 수업에 들어오면 좋을 것 같도요."
"그 수업에 A와 C도 들어 오나요?"
"네, 다 있어요."
"다른 친구들은 잘하는데 B는 처음 시작이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B에게는 즐거운 기회일 수 있어요."
"............"
"B와 의논해 보셨어요?"
"반응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네요. 고민이 되네요."
그냥..... 아무 조건도 붙이지 말고..... 그냥 기회를 한 번 주면 안 되는걸까? 다른 아이들 보다 내 아이가 뒤쳐진다면, 내 아이가 1등할 상황이 아니라면,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확실한 성공만을 원한다, 많은 부모가.
"일단 한 번 해 보자."
"내가 제일 못 할텐데?"
"그게 무슨 상관 있어? 네가 거기서 배우면 되는거지. 너만 상관 안 하면 돼. 우린 다른 얘들이 잘 하고 못하고 같은건 상관 없어."
"해 봤는데도 안 되면 어쩌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말면 되지, 뭐. 해 봤는데도 안 되면, 그건 네 길이 아니거나, 타이밍이 다음이겠지."
"해 볼까?"
"그럼. 네 맘대로. 해 보고, 아님 말지 뭐."
"그래, 그럼 그냥 일단 한 번 해 보는거야."
부모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래도 이 세상에서 결과에 관계 없이 나에게 박수를 쳐주는 누군가가 있다는데, 무엇이 겁날 것이냐. 안타깝게도 많은 아이들이 점 점 더 시도를 안 하려고 한다. 새로운 것을 왜 해야 하냐고 묻는다. 그거 하면 시험에 나오는 것이냐고 묻는다.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결과가 뚜렷해야지만 비로소 해야 할 이유가 된다. 쓸데가 명확하지 않으면 핸드폰으로 시선이 넘어 간다.
시도해 보는 것은, 실험해 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실험은 작동하는 공식을 발견할 때까지, 즉 실험하고, 실패하고, 또 다시 실험하고, 다시 실패하고, 또 실험하고........ 계속 시도하고 결국 실험은 성공한다. 이 과정을 실패라는 단어만으로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내 아이에게 무슨 실험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는가? 아니, 실험을 허락하기는 하는건가?
왠지 해 보고 싶은 것들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다 있고,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들은 더 많다. 왜 하고 싶은지는 말로 설명하기가 자기 스스로도 아직 힘든 일들이 있다. 그런데 자꾸 끌린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이다. 무엇이 나를 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끌림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는 것은 저항하기 힘든 일인 듯하다. 이 과정은 직관을 키우는 시간이다.
실패가 없는 성공을 바라는 것은 흰자위가 없는 달걀을 원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