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정보화 Apr 1. 2026 brunch_membership's
이사를 할 때가 되면 비로소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회사 이전을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구석구석 숨어 있던 오래 묵은 짐들부터 정리했다. 정리를 시작하자 그동안 쌓아두었던 실패한 프로젝트들의 흔적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때도 실패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수습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준비한 물품들은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기대와 다른 결과를 마주하면서도 완패는 아니었다고 우기고 싶은 마음, 언젠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이미 들인 비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집착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보류해 둔 실패’처럼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특정 시즌을 겨냥해 제작했던 패키지 박스가 있었다. 당시에는 꽤 공을 들였고, 어느 정도 반응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작업이었다. 디자인과 구성품 제작에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였지만 시즌이 끝나갈 무렵까지 기대한 흐름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제야 방향이 어긋나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바로 정리하지 못했다. 다음 시즌에는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구성만 바꾸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일단 한 자리를 마련해 보관해 두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시즌이 지났고, 이제와 정리될 처지가 되었다.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았다. 급하게 오픈했지만 완성도가 부족해 이틀 만에 판매를 중단한 제품의 패키지, 이벤트용으로 제작해 두고 쓰지 못한 판촉물, 사이즈나 재질을 잘못 선택해 사용하지 못한 포장재,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각종 물품들까지. 사용하기에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정리하지도 못한 채 쌓여 있었다.
이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나는 점점 비효율에 익숙해져 갔다. 동선을 가로막고 작업 속도를 늦추는 환경 속에서도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를 보완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불필요한 불편함을 감내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청소를 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걸 쓸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 고민은 단순한 선택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방향을 흐리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보다 이미 만들어둔 것을 어떻게든 살려내는 데 집중하게 만들었고, 정작 고민해야 할 것들은 뒤로 밀려났다. 결국 수습에 가까운 고민에 시간을 쓰는 구조로 이어졌다. 정작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은 뒤로 밀리고, 수습에 가까운 고민에 시간을 쓰는 구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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