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LO Jul 16. 2024

길 위에 있을 때가 좋아서

[12일 차] 포르토마린 공립 알베르게 출발

포르토마린의 공립알베르게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에 내가 어떻게 일어났고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지난날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 없이 하루의 여정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똑같이 반복되는 사건을 굳이 기억하지 않는다. 마치 컴퓨터에서 똑같은 이름과 형식의 파일을 같은 폴더에 넣으려고 하면 '덮어쓰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인식이라는 차원에서 하나의 카테고리에 의미와 형식이 같은 여러 사건은 하나로 퉁쳐진다.


조금 특별한 기억이라면 내 맞은편 2층 침대를 사용한 한 남자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베르게를 떠난 7시가 넘어서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점이고 떠나기 전 전날 널어두었던 빨래를 걷으러 야외로 나갔을 때 그 빨래들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는 점이었다. 서리에 의해서인지 야간에 비가 왔던 탓인지 건조라는 목적이 무색하게 속옷과 양말이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사실 자기 전에 널어둔 빨래가 이렇게 축축해져 버린 것을 몇 번 즈음은 경험을 했었는데 왜 반복적으로 동일한 사건을 겪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었는데 내 것을 제외한 다른 빨래들은 모두 수거된 상태였다는 점에서 그 명제를 나 홀로 부단하게 증명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출발할 채비를 모두 마친 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며칠의 트랙킹 동안 내가 무엇인가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는 자각을 한 이후에 들었던 생각인데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서두르는가? 또는 무엇이 나를 서두르게 만드는가? 이 여정에서 가장 자유롭고 충만한 순간은 '걷는 시간'인데 서두름은 그 시간을 단축시키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공립알베르게 위주로 잠자리를 정하는 것이 나에게 서두름을 제공하는 요인이었다. 따로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순례자를 받는 시스템이다 보니 다음 도시의 알베르게가 언제 마감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재촉하고는 했다. 물론 자리가 없어서 공립알베르게에 들어가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혹여 누군가 보장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렇지 못할 경우의 상황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었다.


공립알베르게의 최대 장점은 값이 저렴하다는 점과 시설이 깔끔하고 표준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둘을 합치면 가성비가 좋다는 뜻이 된다. 반면 언제 만석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날의 발걸음을 부추겨야 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사립 알베르게는 호텔스닷컴 등의 앱으로 대부분 예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트랙킹에서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롯이 자기 자신의 페이스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있었다.


포르토마린 공립알베르게의 1층 거실에 앉아 스마트폰을 켜서 당일의 행선지인 '팔라스 데 레이'의 사립 알베르게들을 검색했다. 앱을 통해 여러 알베르게들을 둘러보았는데 문득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공간에서의 반복적인 생활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알베르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공용의 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만 조금은 사생활이 보장됐으면 하는 마음이 피어났다. 파란색 커튼으로 침대가 완전히 가려지는 한 알베르게는 그런 면에서 내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설은 언듯 보기에도 깔끔하고 쾌적해 보였다. 그래서 그 알베르게를 그날의 거처로 낙찰하였다. 떠나는 날 아침에 당일의 숙소를 결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공립알베르게의 이용 가격은 10유로 정찰제였다. IMF처럼 오를 때로 오른 환율 덕분에 10유로를 원화로 환산하면 거의 15,000원에 육박했다. 이에 반해 예약한 사립알베르게의 가격은 24,000원 정도였는데 9천 원의 차액이 여유로운 마음을 구매하는 비용이되는 꼴이었다.


어떤 서비스나 재화를 구매하는 것의 가치는 그 서비스와 재화를 넘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상태까지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보험상품에 가입하면 서비스를 이용할 확률보다 이용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 반대라면 보험회사는 모두 문을 닫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비스 이용과 무관하게 안정감이나 안도감이라는 가치는 얻을 수 있다. 보험회사들이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이 여러 형태의 광고를 통해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인 이유다. 우리는 보험회사가 제공하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보험회사가 판매하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불현듯 찾아오는 보험 상품 가입 권유 전화에서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없던 불안함도 절로 찾아주는 환상의 기술을 그들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 누구 기다리시나 봐요? "


채비를 다 마치고도 테이블에 앉아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뉘앙스가 느껴졌는지 같은 알베르게를 이용한 한 한국인 순례자분이 길을 떠나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아~ 아닙니다. 공립알베르게 위주로 이용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급해지더라고요. 오늘은 조금 여유 있게 걸어가 보려고 사립알베르게 찾아보고 있습니다. "


" 아 그렇구나. (테이블 위의 놓여잇는 식료품들을 가리키며) 누가 이거 놓고 갔나 보네~ 혹시 필요하면 챙겨요~ "


테이블에 앉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누군가 나눔 용으로 두고 간 큰 생수와 사과가 있었다. 생수 위에는 간단한 인사말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는데 그 문구 속에는 pilgrim이라는 단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단어를 접해 보지 않았던 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졌고 말을 걸었던 그 순례자분에게 단어의 뜻을 물어보았다.


" 근데 'Pilgrim'이 무슨 뜻인가요? "

" 아, '순례자'요~"


말을 걸어준 그 분 덕분에 순례길을 떠난 지 12일 돼서야 나는 Prilgrim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이가 남겨둔 두 가지의 식료품 중 생수는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래서 사과만을 챙긴 채 포르토마린 공립알베르게를 빠져 나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롭고 괴롭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