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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 Aug 13. 2024

선택적 노이즈 캔슬링

[12일 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때로는 무리를 지어서 걷고 때로는 같이 걷는 것을 넘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때로는 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누구도 존재하지 않아 유유자적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걸음의 속도가 조금씩 다르고 가지고 있는 여유도 조금씩 모두 다르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그때그때마다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누군가를 지나쳤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종종 음악을 들었다. 무선 이어폰의 개발과 보급은 걸으며 음악을 듣는 행위를 훨씬 더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스마트폰에 꽂힌 유선이어폰 줄이 여러모로 거추장스러웠겠지만 그럴 일이 없어 걸음걸이가 자유로웠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은 안 그래도 고요한 환경을 더 고요하게 만들어주었다. 문명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시대의 문명이 주는 가장 보편적인 특혜 중 하나를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그 문명에 심취하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이 없을 때는 자유롭게 음악을 들었지만 누군가를 지나칠 때는 노이즈캔슬링을 풀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인사를 할 수도 있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면 무례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이즈캔슬링 상태와 상관없이 이어폰을 꽂고 있는 모습 자체가 대화를 차단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이동할 때는 그때그때 판단을 달리 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가능성이 크게 없는 상황에서는 사람들과 함께여도 맘 편히 음악을 듣었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때에는 그냥 이어폰을 빼버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음악을 듣지 않을 때 이어폰을 꽂고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노이즈캔슬링이나 스마트터치 등 무선이어폰의 세부 기능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시적으로 이어폰을 꽂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무선이어폰은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신체부위 귀의 기능을 전자 기술로 온오프 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듣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상시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이어폰을 빼지 않아도 상대방의 말을 듣는데 큰 문제가 없으니 때로는 자기 자신이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기도 한다.


양쪽이 따로 떨어져 있어 유선이어폰보다 훨씬 더 분실의 가능성이 높다는 측면도 이어폰을 굳이 귀에서 빼지 않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예전의 유선 이어폰에 비해 가격도 훨씬 더 비싸졌기 때문에 한쪽이라도 잃어버리는 날이면 울며 겨자 먹는 마음으로 다시금 큰 지출을 감행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요즘은 이어폰을 끼고 대화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무선이어폰이라는 새로운 문명이 만든 인간 사회의 새로운 행동양식이다.


중요한 것은 이어폰을 꽂고 있는 사람이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없는 상태인지를 상대방이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없는 상태인지는 이어폰을 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교차로의 신호등처럼 빨간불과 초록불로 그것을 구분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발생하는 정보의 비대칭성은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관계를 일방적이고 수직적으로 만든다. 이어폰을 낀 자는 순간적인 관계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 상대방에게 있어 이어폰을 낀 자는 하나의 불확실성이다. 이런저런 것을 상관하지 않고 그냥 말을 거는 방식으로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할 수 도 있지만 이렇든 저렇든 뭔가를 좀 더 신경 써야 하고 에너지를 더 써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야만 비로소 마음 편하게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누군가 지나쳐야 하는 사람이 있을 때면 노이즈 캔슬링을 해제하고 먼저 인사말을 건네며 내가 이어폰으로 인해 차단되어 있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부엔카미노'라는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기운을 복 돋고 동료를 응원하는 순례길의 고귀한 문화를 훼손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포함되어 있던 것 같다. 하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만든 하나의 행동이 어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명명은 이어폰에서 발생하는 것 외의 모든 소리를 '소음'으로 규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나에게 찾아오는 다양한 종류의 소리들을 단순한 '소음'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한 측면이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을 때야만 비로소 음악에 좀 더 심취하기 위해 '노이즈 캔슬링'을 사용했다. 사실 이번 글에서 그 고요함 속에서 듣는 음악의 생생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어폰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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