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선택 시 지역의 중요성
필자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졸업반이 약 120명 남짓, 지금 생각해보면 훨씬 더 작은 학교들도 많이 있겠지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유학을 온 필자에게는 동네가 너무나 작게 느껴졌고, 미치도록 그 옥수수밭이 대부분인 지역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을 선택할 때 1순위는 무조건 대도시에 위치한 대학들이었고, 이것은 정말이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우둔한 생각이었다.
어디에 있는 대학을 갈까?
우선 미국 지도를 펼치고 대도시 몇 개를 추렸다. 뉴욕, 시카고, 엘에이가 당연히 눈에 들어왔고, 그 도시의 대학들을 우선순위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뉴욕시에는 공대가 강한 대학이 없었고 (물론 맨해튼에도 좋은 공과대학을 가지고 있는 대학이 있지만, 불행히도 필자가 그때 가지고 있던 미국 대학 랭킹을 나열한 자료들은 대부분 대형 종합대학들에게 유리한 점수를 반영한 빈약한 정보였다), 생활비가 너무 비싸 섣불리 엄두가 안 났고, 뉴욕의 치안에 대해서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패스!
시카고는 필자의 고등학교가 위치한 주에서 지근거리의 도시였기에 가능하면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고, 시카고 도심에 위치한 대학들은 순수학문이 강한 대학들이 많았다.
그럼 엘에이는? 공교롭게도 저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94년은 LA폭동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TV에서 접하던 엘에이는 별로 정이 안 갔다. 그리면 다음 도시들. 샌프란시스코, 클리블랜드, 보스턴 … 이렇게 도시들을 검색해 가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보스턴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보스턴'이라. 비록 <7막 8장>의 홍정욱 씨처럼 명문사립고등학교 출신도 아니고, 하버드에는 지원할 엄두도 못 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깜깜이 지원이라도 해볼걸 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떻게든 보스턴에 입성만 하고, 학부에서 2년 정도 성적을 올리면 MIT로 편입도 할 수도 있다는 근자감도 생겼다. 참고로 필자는 정작 대학 2학년을 마치고 다시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중부의 주립학교로 학사편입을 해서 돌아갔지만, 같은 전공의 한국 선배 중 하나는 MIT로 결국 편입해서 갔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원하는 수만큼의 대학에 중복지원이 가능하다. 물론 적지 않은 원서비, 시험성적과 증빙서류를 학교로 보내는 비용이 발생하고, 추천서를 그만큼 중복으로 써달라고 하는 것도 부담이 되지만, 이론적으로는 원하는 만큼의 다수의 학교에 지원할 수 있다. 참고로 지금은 모든 지원과 추천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부담은 줄었지만, 당시 필자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도 아니었고, 지금과는 다르게 추천서도 타자로 작성해서 보내고 그 학교에 추천인이 직접 우편으로 보내는 방법이었어서 저자가 부탁할 수 있는 추천서는 아무래도 제한적 일수밖에 없었기에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대학의 수를 제한해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이비리그 학교 한 곳, 내가 갈 수 있을만한 수준의 대학교 두세 곳, 그리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대학교 한 곳 정도로 추렸다.
이렇게 결정한 학교로는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비리그 중 이공계가 좋다고 소문난 대학 하나, 미 중부 도시 소재의 사립대학 하나, 미국 남부의 주립대 하나, 보스턴 소재 사립대학, 그리고 나름 '안전빵'이라고 판단한 중부지역 주립대학 한 곳에 지원서를 넣었다. 미국의 고등학교는 11학년 (한국에서 고 2) 중반쯤에 대학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해, 12학년 1학기가 끝날 때인 12월 말쯤에 입학 통보를 받는다. 그리고 다음 해 5월에 졸업을 하고, 대학 학기가 시작하는 9월이 되기 한두 달 전에만 입학 결정을 하면 되었다.
아들을 혼자 유학 보내고 3년의 세월이 지나 고등학교 졸업식 참석차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셨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부모님과 재회했을 때 사실 상당히 어색했다. 지금처럼 무제한으로 화상통화가 가능했던 때도 아니고 (국제전화가 1분에 1불 정도 했어서 가끔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대부분 짧은 안부만 묻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훈시를 듣고 끝내는 게 다였다), 또한 사춘기를 혼자서 거쳐낸 아들과, 그 기간에 옆에 있어주지 못한 부모님이 3년 만에 만났기에 당장 할 얘기가 그리 많이 생각나지 않았으리라. 어찌어찌 졸업식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은 짐을 차에 넣고 부모님과 함께 대학 캠퍼스 투어 동선을 짜서 여행을 시작했다. 자동차로 커버하기에는 상당히 멀고 긴 여정이었지만, 대학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외아들과의 긴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함께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것이 3년 만에 재회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이었으리라.
보스턴까지 가는 동선 상에서 우선 P대학교, C대학교, 아이비리그 대학 한 곳, 마지막으로 B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미 남부의 주립대에서도 입학허가는 받았지만 거리상 방문이 불가능해 우선 그쪽은 캠퍼스 투어를 하지 않기로 했고, 조건부 입학으로 답장이 온 아이비리그 대학 한 곳을 제외한 다른 대학에서는 이미 입학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보통의 미국 학생들이었다면 11학년 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해 이미 원하는 학교의 캠퍼스 투어를 마쳤겠지만, 필자는 경비도 없었고 혼자 여행을 갈 여건이 안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졸업 후 몇 주 안에 급하게 캠퍼스 투어를 끝내고, 최종 결정과 함께 현지에서 학비를 납입하고 그 대학에 짐을 풀 계획이었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하는 9월까지 남은 기간은 아르바이트를 하던지, 대학교 여름학기를 다니던지 할 생각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제일 처음 들린 중부의 P대학교는 이공계로는 더할 나위 없는 명문이지만, 그 주를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2년 후 다시 돌아와서 이후 4년을 보내게 된다) 클리블랜드는 미국에서 시카고 말고는 처음 가본 도시였는데, 캠퍼스가 위치한 지역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도시가 그랬지만, 범죄율이 높았고, 처음으로 경험해본 흑인 밀집지역 안에 위치한 캠퍼스에 심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리고 도착한 아이비리그의 한 대학교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말 아름답지만 산속에 유배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조건부 입학'이었기에 우선 보류해 두고, 마지막으로 보스턴으로 넘어갔다.
5월의 보스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한강과 비슷한 강폭과 느낌의 찰스 강변을 따라 백 년이 넘은 캠퍼스 건물들이 나열돼 있었고, 푸른 잔디밭에 남녀 학생들이 자유롭게 누워 햇볕을 쬐면서 웃고 있었고,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과하지 않게 섞여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정규학기는 이미 끝났었기에 이들 대부분은 랭귀지 코스 학생들 이였음) 캠퍼스를 가로질러서 다운타운까지 연결되는 전차가 다니고, 캠퍼스 바로 옆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프로야구팀) 구장이 보였으며, 대부분의 1학년이 묶게 될 기숙사는 캠퍼스 한가운데 대형 아파트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입학 후 이곳이 일 학년 대부분을 수용하는 ‘동물원’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미국 최고의 학원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내로라하는 대학들 (하버드, MIT, 보스턴칼리지, 보스턴대, 웰슬리여대, 버클리 음대 등)이 지근거리에 모여 있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학생들이 살고 있었기에 도시 자체가 굉장히 젊고 활기 넘쳤다. 고등학교 때 저자의 주변에는 백인들과 소수의 흑인 친구들뿐 이였다면, 보스턴 캠퍼스에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 여기다!
더 이상의 캠퍼스 투어는 의미가 없었다. 딱 필자가 꿈꾸는 대학 분위기에, 도시에 위치한 캠퍼스였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단순해서, 그렇게 결정해 놓고 나니 다른 것 들도 점점 더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 B 대는 미국에서 LA 소재의 USC와 함께 유학생 비율이 제일 높은 학교였고 (학생의 약 25%가 유학생이었다), 가장 비싼 학비를 필요로 하는 등 유학생들 에게는 비교적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다행히 한국에서도 상당히 명문대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부모님이 기꺼이 지원을 결정해 주셨고, 여행을 종료하고 보스턴에 짐을 풀기로 결정했다. 또한 대도시에 위치한 학교였기에 생활물가도 상당히 높았기에, 1학년 때부터 캠퍼스 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이라도 벌어야 친구들과 맥주라도 한잔 사 마실 수 있었고, 항상 은연중에 비씬 학비와 생활비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는 건 불편한 진실이다. 그리고, B 대는 실제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버드 캠퍼스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나름 편입에 대한 동기부여도 상당히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같은 과의 선배 중 하나는 수년간 MIT의 문을 두드린 결과, 3학년을 마치고 편입에 성공했는데 편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엄청난 학점관리를 했음은 물론이다.
현재로 돌아와서, 지금 해외에서 공부 중인 조기유학생, 또는 해외대학 진학을 원하는 많은 학생들은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결정에 대한 확신도 없는 선택지들을 앞에 놓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호주를 예로 들면, 국제적으로 ‘명문’이라고 알려진 대학의 수도 미국에 비해서 적지만, 학생의 성적에 맞춰 진학할 수 있는 대학과 학과가 대부분 정해진다. 물론 한국보다는 입시전쟁이 훨씬 덜 하겠지만, 요즘은 해외에서도 과외 및 선행학습도 나름 성행하고, 졸업한 대학의 타이틀이 추후의 직업시장과 사회생활하면서 영향을 미치고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이라면, 조금 더 선택지가 다양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선택이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학생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래서 대학을 우선 진학할지, 잠시 시간을 가지고 입학을 연기할지, 어떤 전공을 택할지 등을 어느 정도 결정한 상태라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많은 고민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유학원도 하나의 소스라고 생각하고) 주위에 최대한 많은 조언을 구하고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원하는 캠퍼스도 방문해 보고, 그 학교 출신들과 솔직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조기유학생들에게는 중고등학교 선택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호주로 처음 이주한 시기가 몇 년 후 아이가 중학교를 진학할 시기였기에 대다수의 부모들과 비슷하게 처음에는 명문 사립학교들을 위주로 알아보고, 몇몇 캠퍼스 투어도 신청해서 다녀보곤 했다. 대부분 학교 홈페이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 유리한 정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좋다’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단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추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한국 학생과 부모님을 소개받아 만나보는 방법이 있는데, 사실 이것도 그들 개개인의 다른 기준과 경험에서 나오는 편향적인 조언일 수 있으니 가능하면 여러 명을 만나 보는 것이 좋다.
필자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후 아이가 호주에서 2년을 다니고 졸업한 공립초등학교 (나중에 알았지만 휴 잭맨도 여기 동문이라고 한다) 주변에 시드니에서 유명한 명문 사립학교가 많이 있기에 상당히 고민했다. 다들 좋은 학교라고 칭찬 일색이지만, 직접 학교를 방문해본 결과 생각보다 동양인 학생의 비중이 너무 높았다. 그중 한 학교는 여기가 '홍콩이나 중국에 있는 국제학교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나중에 좀 더 호주에서 지내면서 깨우친 바로는 호주에서도 명문학교라면 당연히 교육열이 높은 중국인과 인도인 학생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개인적으로 아이가 빠른 시일 내에 현지에 적응하고, 조금 더 현지화된 환경에서 학교생활을 시키고 싶었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개인적으로 알게 된 중국계 호주인 친구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가 고려하고 있는 명문 사립고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그 학교 다녀본 경험은 어때? 너 아이라면 거기 보낼 생각 있니?’라고 물어봤는데 의외로 ‘절대 아니다’라고 하는 답이 돌아왔다. 물론 극히 그 친구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 이유인즉슨, 그가 다닐 당시만 해도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으니 한 20년 전이라고 하자) 백인 학생들이 월등히 많았을 때였고, 본인은 bully와 인종차별도 많이 겪었기에 결국 친한 소수의 몇 명만 친구로 기억에 남고, 전반적으로 좋은 경험은 아녔다고 했다. 그 친구도 좋은 성적으로 법대 진학을 했고, 학교 테니스팀에서도 나름 에이스였다고 하는데도 그런 멘트를 하는 것이 놀라웠는데, 더 얘기해 보니 그 학교에서도 동양인들은 ‘주류’에 끼지 못했고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호주에서 ‘주류’에 끼려면 스포츠도 호주에서 인기 많은 종목을 해야 한다) 그 학교의 문화는 자신처럼 ‘조용한 성격’으로는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학교는 필수로 군사훈련까지 받아야 하는 남학교였고, '전인교육과 리더십 교육에 특화되어 있다'라고 자랑하는 학교였으니 내성적인 학생이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학생이 내성적이고, 여러 명이서 하는 그룹스터디 보다 혼자 하는 공부방법을 더 선호하는 경우라면 오히려 조금 더 규모가 작고 아카데믹으로 특화된 학교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
단순하게 '도시로 가고 싶다'라는 욕망으로 선택한 대학 캠퍼스에서 첫 1년은 너무 재밌었고, 정신없이 놀았다. 주위에는 고등학교 때 접하지 못했던 너무나도 다양한 친구들 (특히 고등학교 때 접하지 못했단 동양인 여학생들)이 넘쳤고, 캠퍼스 안팎에는 항상 필자를 유혹하는 파티가 열렸었는데, 불행히도 저자는 그런 환경을 이겨내고 공부에 전념할 만큼의 훈련은 되어있지 못했다. 다행히 노력에 비해 학점은 괜찮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렇기에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싼 수업료와 생활비를 감당하고 굳이 이 학교의 졸업장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주의 명문 주립대를 졸업하면 훨씬 더 명성 있는 졸업장을 반절도 안 되는 비용으로 얻을 수 있는데?'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내면에서 필자를 괴롭혔다.
그리고 1년 후 내린 결정은 '나는 대도시 학교가 맞지 않아, 다시 시골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라는 것이었고, 2학년을 시작하면서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3학년부터는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미 중부로 주립대학으로 컴백해서 학부를 마쳤다.
진즉 조금 더 냉철하게 고민하고 대학을 선택했더라면, 몇천만 원의 학비와 생활비를 아낄 수 있었다는 많은 후회가 든다. 그래서 누가 필자에게 '학교를 추천해 달라'라고 한다면 어느 전공이냐와 함께 제일 먼저 학생의 성향을 파악하고 조언을 하기 시작한다. 4년이라는, 그것도 인생의 황금기를, 시간을 보내야 하는 만큼 그 학교 주변의 환경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