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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Apr 11. 2023

자리에 오르는 자와 자리에서 내려오는 자

# 2 그 의자에는 누가 앉아 있나



스물일곱의 은서는 엄마에게 전화할지 말지 한참을 망설였다. 어차피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들도 아닌데 시시콜콜 얘기를 늘어놓는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거 같아 괜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불필요한 정죄의 말을 들을까 지레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늘 엄마가 원하는 건 내 상황에 대한 판단이나 문제해결이 아니라 그저 나와 이야기하고, 안부를 궁금해하고, 내 삶 속에 엄마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게 전부였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서 은서는 마치 꽤나 큰 호의를 베풀어주기라도 하듯 헛기침을 한번 하고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딱 다섯 번만 가고 안 받으면 바로 끊어야지'라고 생각한 찰나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응, 은서야"

“어, 엄마… 안 바빠?”

“안 바쁘지~ 넌 잘 지내니? 우리 딸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요즘 회사 다니는 건 어때?

“뭐… 맨날 똑같지 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밝고 상냥하게 이야기도 잘하면서, 꼭 엄마랑만 통화할 때면 은서는 세상 다 산 사람의 목소리가 된다).

“그렇구나. 그때 그 상사랑은 좀 괜찮아졌니?”

지난번에 상사와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은 이후로 잘 극복했다고 얘기하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은서로서는 엄마가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행간에 숨겨진 모든 고민을 알아챈다는 게 왈칵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내 속내를 들킨 거 같아 살짝 짜증도 나면서, 바쁜 척 끊어버릴까도 했다가, 그래도 역시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숨을 가다듬었다.


“사실… 아직도 힘들어.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하루에도 마음이 열두 번씩 요동을 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상황과 관계들을 컨트롤하고 싶은 욕구가 가장 큰 문제인 거 같아. 마음을 비우고 그냥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이 상황들을 빨리 통제해버려야 한다는 조급함이 자꾸 내 진심 위에 가면을 쓰게 만들어. 이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에 맞추고, 저 사람에게 저렇게 맞추다 보면 어떻게든 이 상황이 끝날 거 같거든.  하루종일 이 가면, 저 가면 바꿔 쓰다 집에 돌아오면 내가 광대 같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원래 누구였는지도 모르겠어.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기만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제일 힘들어.”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히 거기 있는 거 같은데 왜 아무 말을 안 할까. 괜히 말했나? 하긴 엄마라고 무슨 뾰족한 답이 있겠어.’ 은서는 생각했다. 방금 전 쏘아 올렸던 은서의 말들이 ‘기다림’이라는 시간의 여백 속에 차근차근 내려앉았다. 엄마는 마치, 그 ‘기다림’이 주는 답을 길어 올리려고 일부러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듯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나한테 실망했어?’라고 말하려는 찰나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은서야 있잖아. 우리 마음은 빈 의자 같은 거야.”
“빈… 의자?”
“‘나’라는 자아는 늘 공석이란다. 내가 누가 될 것이냐는 결국 그 의자에 누가 와서 앉을 것인가에 달린 거지. 은서 네가 말한 ‘가면’이라는 것도 비슷한 얘기 같을 수도 있지만 실은 달라. 가면이라는 건 그것이 감추고자 하는 원래 존재가 있다는 건데, 그 원래 존재라는 것은 꼭 내가 도달할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굉장히 완벽하고 순결한 무언가처럼 느껴지거든. ‘나는 원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데, 지금 내 모습은 괴물 같다,’ ‘나는 원래는 좋은 사람인데 지금 내 상태는 쓰레기 같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계속 고발하고 자책하게 되지. 혹은 ‘나는 원래 끔찍한 인간인데 착한 사람의 웃는 가면을 쓴 지금 내 모습은 다 위선이야'라며 스스로를 가증스럽게 여기기도 해.

하지만 엄마 생각에는 그래. 우리가 원래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는 빈 의자 같은 존재들인 거야. 누군가는, 무언가는 그 자리에 가 앉아야 해. 그럼, 그게 내가 되는 거야. 내 생각, 내 고집, 내 이상향, 내 편협함, 내 계획 - 이렇게 ‘나’로 가득 찬 생각이 그 의자에 앉으면 나는 그냥 나로 똘똘 뭉친 사람이 되고 말아. 세상은 그런 사람을 “똑똑한 사람", “자기 밥그릇 잘 챙기는 사람"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만큼 편향적인 삶도 사실 없단다.


엄마는 ‘나’라는 자아가 그 의자에서 내려올 때 진짜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해. 내 중심적인 자아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내 생각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헤아릴 수 있게 되고 분별할 수 있게 돼.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거지.”


은서는 이상하게 몸이 뒤틀리며 엄마의 말이 듣기 싫으면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진한 갈망이 일렁였다.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기도 싫었지만 그랬다. 왠지 자꾸 목이 메려는 걸 꾹꾹 참았다.


“엄마, 엄마 말이 지금 얼마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 줄 알아? 내가 지금 힘들어 죽겠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하루하루 정신 줄 붙들고 살기도 벅차. 내가 엄마한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렇게 물렁하게 살다가 밟힌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알지. 왜 아니겠어. 너 자신은 마냥 제쳐두고 희생하면서 남을 위해 살라는 그런 도덕 교과서 같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엄마가 하는 얘기는. 네 삶의 중심에, 그 의자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리고 그건 네 삶의 ‘품위’에 관한 선택이기도 해. 은서야, ‘품위’의 동의어가 뭔 줄 아니? 바로 ‘관대함’이야. 너는 엄마 딸이잖아. 너는 사랑을 받아 보았고, 사랑이 뭔지 알잖아. 너는 용서받아 보았고 받아들여져 보았잖아. 그럼 너는 살면서 관대함을 맛보았고 삶의 품위를 경험해 본 거야.

세상 사람들은 딱 자기 할 도리만 하고 끝내겠다고 하지. 손해 보기 싫고,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최소한만 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은서야. 엄마는 네가 엑스트라 마일(extra mile)을 가는 삶을 살길 바라. 너는 내 딸이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모든 유산은 - 그게 얼마가 되었든 - 전부 네가 물려받게 될 거야. 근데 나는 은서 네가 받게 될 유산 중 가장 귀중한 것이 엄마가 물려주는 관대함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관대함이란, 내가 최소한만 해도 되지만 최대치로 삶을 대하는 자세야.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게 함으로 네 삶에서 무언가 흘러넘쳐 나가는 게 있는 삶. 누가 5리를 함께 가달라고 했을 때 10리를 함께 가주는 삶 말이야.”


이번에는 은서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의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 온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은서 안의 무언가는 그걸 갈망하고 동의했다. 하지만 온전히 아름다운 것을 마주했을 때 드는 경외감과 그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때 드는 괴리의 깊이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자신 없었다. 갑자기 뭔가를 막 다 내려놔야 할 거 같았다.


“그럼… 도대체 나라는 자아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 빈 의자에는 나 대신 누가 앉아야 하는 거야?”


“‘이게 정답이야'라고 딱 말해주면 좋겠지만, 그 답은 은서 너 스스로 찾아야 해. 때로는 몸부림을 치고 처절한 실패도 하면서. 하지만 이거 하나는 얘기해 줄 수 있어. 엄마가 찾은 답은 말이야, 삶의 순간순간마다 그 의자에서 내려오기를 연습해야 한다는 거야. 그 자리에는 내 중심적인 자아뿐만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학습된 회피, 분노, 원망의 감정들도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거든. 내가 의식하지 못함으로 반복적이고 자동적으로 - 마치 잡초처럼 - 자리 잡은 사고들이야말로 내가 무엇의 통치를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거야.

그렇게 계속 자리에서 내려오다 보면, 결국에 남는 본질이 있어. 그걸 꼭 찾기 바라.”


엄마와 전화를 끊으며 은서는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없다'라는 절망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선물은 내 노력으로 받아내는 게 아니니까...'라는 아이같은 소망이 차올랐다.


• Soli Deo Gloria •



*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윤승 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레퍼

런서의 글>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원 제목은 <관계라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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