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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Sep 18. 2024

심리 화가, 뭉크

사람 뒤에 드리운 감정을 본다

오랜만에 천천히 걷고, 멈추고, 한 작품을 오래 쳐다보며 감상한 전시였다. 오랜만에 한 화가의 그림을 많이 모아서 본 전시였다. 오랜만에 내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다양한 화가의 그림들을 연결하고 기록해두고 싶은 전시였다. 


자화상으로 시작하는 전시 

자화상을 그린다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눈썹, 눈매, 코, 입술, 주름, 미소, 형태 하나하나 그려내고 마는 건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들어간 행위이다. 


자화상을 특히 많이 그린 화가는 대체로 인간 감정 묘사의 대가이다.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고흐, 프리다 칼로가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뭉크처럼 젊은 시절의 자신감 넘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노년의 자신까지 그리고 마는 화가는 스스로의 생에 이야기를 부여한다.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는 타인과 달리 자신이 갖는 '다름'을 드러낸다. 화가들은 타인을 묘사하기 전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뭉크는 중년, 말년까지 자화상을 남겼다. 팔 뼈가 있는 자화상. 화가인 그에게 중년의 자화상 밑 그려진 팔 뼈는 어떤 의미였을까. 여러 자화상을 보니 뭉크의 귀와 입술, 눈썹이 눈에 들어온다. 아래로 살짝 쳐진 얇은 입술, 눈과 가까운 얇은 눈썹, 좌우로 큰 귀, 좁은 어깨까지 뭉크다. 뭉크의 실제 사진을 보니 눈빛이 닮았다. 


청년, 중년, 말년의 뭉크 자화상


1944년에 타계한 뭉크의 1943년 작품으로 알려진 세 번째 그림은 뭉크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뭉크는 마지막 순간의 자신까지 그렸다. 흐트러진 시선의 노인 옆 드리운 그림자가 낯설지 않다. 나는 나의 말년을 어떤 모습으로 그리게 될까. 말년에 앞서 지금 나는 스스로를 (인내심과 애정을 갖고) 묘사해 낼 수 있을까. 자화상을 통해 타인과 달리 나 스스로가 갖는 '다름'을 드러낼 수 있을까. 


사람 뒤에 드리운 감정을 본다

자신에 대한 깊은 사색 이후 남들과 다른 길이 굳이 가고자 했던 겁 없던 이들이 거장으로 남는다. 거장들은 다름을 투지를 갖고 멈추지 않고 추구해 시간의 힘을 업고 경지에 오른다.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들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묘사하며 그림 연습을 했다. 


뭉크 또한 젊은 시절 크리스티아니아 (지금의 오슬로) 마을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자기 자신에서 출발한 내면 탐구의 여정이 일생이고, 애정 어린 시선과 함께 사람 뒤에 드리운 감정까지 보는 능력을 갖췄다. 자화상을 많이 그린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고흐 또한 주변 사람들과 후원자를 그린 초상화도 많이 그렸고, 이들의 그림 속 인물들의 성격과 감정이 그림 밖으로 전달된다. 뭉크의 피사체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당사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뭉크의 초상화 작품들


사람들은 분석받는 느낌은 좋아하지 않는다. 인정받고자 하는 동시에 치부까지 평가받고 분석받는 느낌은 불편하다. 그 와중에 왼쪽 여성 초상화, '마리아 아가테 마이어' 그림은 오늘 본 뭉크의 초상화 중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 작품이었다. 좋은 풍채의 마리아는 푸른 나무 속 파란 옷을 입고 앉아있다. 살짝 기운 몸과 고개, 인자한 미소의 표정은 뭉크의 주홍빛, 연베이지빛 색채가 더해져 더 따듯하게 느껴진다. 원색이 가득한 그림에서 푸근함과 시원함, 밝은 감정이 느껴진다. 복잡하게 가려진 감정은 많지 않다. 따듯한 고흐의 탕기 영감의 초상, 우체부 조셉 롤랭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뭉크의 전시를 보는 내내 신기한 점은 자꾸 다른 거장들이 떠오른다. 마티스, 세잔, 고흐의 초상화들이 파편처럼 뭉크의 그림에서 보인다. 뭉크의 그림은 연결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뭉크의 '카바레'는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뭉크가 모더니즘에 미친 영향의 시작은 끊임없는 실험이었다. 석판화 위에 수채 물감으로 채색한다. 반복해 재생산되는 석판화에 색채주의 화가의 채색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이 그림에서 얼굴 표정과 시선, 고개 각도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림의 좌측 하단, 관객석에서 남자를 내려다보는 큰 여성의 손짓과 표정, 춤출 차례를 기다리는 무용수들의 제각기 조금씩 다른 얼굴 각도와 닫힌 몸에서 밝지 만은 않은 카바레의 심리가 보인다. 반면, 무대 위 무용수의 발짓은 색 없이도 운동 에너지를 전달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이끌어내고자 애쓴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른 채 웃지만 동시에 공허한 눈빛과 표정으로. 뭉크는 보이는 게 그림이 아니라고 말했고, 특정 장면에서 구성원들의 감정과 정신세계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뭉크의 실험과 변화를 꿰뚫는 키워드는 '감정 표현'이다. 


카바레, 뭉크, 1895


병든 아이

전시를 보기 전 뭉크의 생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가족들을 병으로 떠나보내고 자신 또한 말년까지 병으로 고생한 삶을 살았다. 막연히 뭉크의 절규와 병든 아이 같은 작품은 뭉크의 살려달라는 아우성이었을까 상상했다. 실제로 만난 병든 아이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뭉크는 병과 얽힌 고통 속 사람들을 따듯하게 바라본다. 고통스럽지만 뭉크의 시선은 따듯하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가운데, 창가의 아이가 커튼 뒤에 숨어 밖을 내다보는 그림이다.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창가에 비친 햇빛에 마저 다가서지 못하고 한 걸음 뒤에서 밖을 내다보는 아이에게서 나는 동정심과 동시에 어떤 순간 겁에 질린 작았던 내 자신을 발견했다. 햇빛에는 발을 딛고 온기를 느껴보도록 소녀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병든 아이의 침대 맡 좌절하는 부모를 통해 가혹한 상황을 탓하기보다 그 감정을 절절히 느껴지게 한다. 뭉크는 노년에 '병든 아이'의 무수한 변주를 시도했다. 삶의 주기를 주제로 시작부터 끝까지 탐구하는 '생의 프리즈', 그 시작에는 어려서부터 큰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 속 사람들의 심리를 남들보다 깊이 느끼고, 그들에게 드리운 감정을 그려내는 화가 뭉크가 있다. 이별, 우울, 절망, 죽음을 그린 뭉크는 살고자 했다. 어려서는 뭉크의 그림이 너무 어둡고 무서워 겁을 냈는데 어른이 돼서는 오히려 그림 뒤 뭉크가 현대인에게도 전하는 목소리가 들려 힘을 얻는다. 색채주의를 대표하기도 하는 뭉크이지만 그의 단색으로 표현한 그림, 구도, 묘사에 병든 아이,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와 감정이 가득 담겼다. 


뭉크의 병든 아이와 관련된 그림들


자연과 풍경은 도화지

뭉크에게 풍경은 인간의 기분과 감정을 투영하는 화면이었다고 한다. 특히 노르웨이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 나중에 노르웨이 여행을 가면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들러 18세기 노르웨이 풍경화를 찬찬히 둘러보고 싶다. 암스테르담에서 발견한 네덜란드 화풍처럼 노르웨이 화풍이 뭉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전 시대의 그림을 보고 깨닫고 싶다. 


그물을 고치는 남자, 뭉크, 1899


뭉크의 '그물을 고치는 남자'를 바라보면 하얀 베이지 톤의 배경은 뭉크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담는 공간이 되었다. 젊은 뭉크의 시선과 소박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젊은 뭉크는 소박하고, 조용하고, 외롭고, 우울하지만 하루를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쳐다봤다. '자연으로부터 그림을 얻는다'라고 말한 뭉크에게 다양한 환경 속 사람들의 일상과 그 안에 숨어있는 (뭉크에게 유독 잘 보이는) 감정은 무수히 많은 양의 그림을 그려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떠오른 화가들 - 호들러, 고흐, 클림트

뭉크의 그림을 보고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이 떠오른 건 내가 점점 더 많은 그림을 알아가기 때문일까, 뭉크가 동시대의 화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일까. 뭉크의 풍경화를 보자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연보라 빛 산 그림이 떠올랐다. 경쾌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연한 파스텔 톤 보라 빛의 색감은 눈도 하늘도 땅도 아닌 인간 마음의 색채이다. 


해안의 겨울 풍경, 뭉크 / 스위스 산, 페르디난드 호들러


'도시의 보헤미안들' 그림을 보고는 암스테르담 미술관에서 본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과 '물병과 압센트'가 떠올랐다. 두 화가는 자신의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또 자신을 발견한다. 시끌벅적한 공간에서 무리들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어떤 상념에 젖었을까. 혹은 외로이 혼자 않아 고독을 즐기며 그들은 그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카페에 앉아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우리가 올리는 인스타그램의 한 장면과 닮았다. 


도시의 보헤미안들, 뭉크 / 물병과 압셍트, 고흐


뭉크의 노년기 작품인 '벌목지'를 보고는 고흐의 유고작 '나무뿌리들'이 떠올랐다. 뭉크의 그림 속 눈 속의 거친 나무 기둥들이 초록과 갈색으로 아우성친다. 고흐의 그림 속 나무 줄기들은 퍼렇게 얽힌 세월을 보여준다. 노년의 화가들이 나무 기둥 그림을 많이 그리는 데 이유가 있을까. 산책이 하루의 낙이기 때문에 자주 걷는 길의 풍경 속 나무에 주목하는 걸까. 오래된 나무 줄기에서 세월을 느끼는 걸까. 갈색 나무 줄기 속 무늬가 사람의 얼굴 형상이자 뭉크처럼 보이는 듯하다. 


벌목지, 뭉크, 1912 / 나무 뿌리들, 고흐, 1890


화가의 그림 속 반복되는 요소들 

색채의 마술사 샤갈 못지않게 뭉크가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화가라는 걸 깨달았다. 노랑 파랑 초록 원색에 흰색을 섞어 파스텔톤을 내고 무엇보다 하얀색에 가까운 연보랏빛 색감을 그림 곳곳에 사용했다. 연보랏빛은 뭉크에게 하얀색보다는 더 현실에 가까운 배경색이지 않았을까. 여러 그림의 곳곳에 현실적인 맥락 없이 칠해진 붉은 갈색은 그림에서 외치고 싶은 뭉크의 감정이 아닐까. '키스'에서도 남자의 바지폭 주홍빛과 창 밖 외부의 사이프러스 나무 뒤 건물에서 비치는 붉은 빛은 시선을 끈다. 유독 다양한 그림에서 남자의 몸이 토양과 연결되어 갈색으로 칠해지거나, 갈색 옷을 입은 경우가 많고 특히 주변 혹은 여성과 대비되는 색으로 강조된다. 뭉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색채뿐만 아니라 샤갈의 염소와 바이올린처럼 뭉크의 그림에도 반복되는 요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창가. 병든 아이, 키스 등의 작품에서 뭉크는 사람을 창가 옆에 배치한다. 개인적으로 인물을 창가 옆에 배치한 그림들을 좋아하는데 창가 밖을 바라보는 행위가 스스로 많이 하는 행동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경험과 감정이 이입되어 상황을 상상하게 만든다. 창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또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키스, 뭉크 / 브로치 에바 무도치, 뭉크


뭉크의 '키스'는 구도가 재미있다. 키스를 하는 남녀를 실내 구석 오른편에 커튼 뒤 배치하고, 창가 너머 사이프러스 나무를 왼편에 배치해 좌우 대비를 만들어낸다. 풍경 군데군데 불타는 듯한 색감을 남자의 귀, 바지, 건물에 칠해뒀다. 뭉크의 그림 중 밝은 편에 속하는 이 그림은 인물의 감정을 강조하며 풍경을 압도하는 뭉크의 그림들과 달리 잔잔하게 상황과 감정이 풍경과 어우러졌다. 

The fusion of man and woman in the moment of mutual surrender implies detachment from their identity and individualit

뱀파이어, 마돈나 등 여성이 심리적으로 위험하게 느껴지는 그림들과 달리, '브로치 에바 무도치'는 아름다웠다. 풍성한 에바의 머릿결과 매혹적인 큰 눈, 짙은 눈썹, 아래를 고혹적으로 내려다보는 분위기는 주얼리 광고에 딱 맞는 모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둠으로 가득 찼지만 빛나는 듯한 이 그림에 골드 귀걸이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올려두면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모델의 아이덴티티를 뭉크가 매력적으로 바라봤다는 느낌이 든다. 젊은 시절 내 분위기를 이런 자화상으로 하나씩 간직해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를 요한 거리의 저녁, 비슷한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들의 행렬과 그들과 멀찍이 반대 방향의 길을 걷는 이의 모습이 보인다. 뭉크가 이 그림을 그리고 100년이 지났지만 현대인의 삶과 닮았다. 비슷한 눈과 눈썹, 표정을 한 이들과 작게 그려진 멀찍이 도로를 걷는 사람, 나는 여기서 어디에 위치할까. 


카를 요한 거리의 저녁, 뭉크 / 이별, 뭉크 / 두 사람 외로운 이들, 뭉크


'이별'과 '두 사람, 외로운 이들' 그림의 배치 순서는 마치 같은 커플을 뒤와 앞에서 바라본 느낌이었다. 첫 작품은 1896년, 두 번째 작품은 1899년에 그려졌으니 같은 객체이기 어렵겠지만 남자의 얼굴은 자화상 속 뭉크를 닮았다. 색채가 남녀를 분리시킨다. 남자는 토지와 한 몸이 되고 여자는 떠나간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함께 해도, 머리를 맞대고 붙어있어도 참 외롭다. 


풍경을 압도하는 인간의 감정을 그린다

뭉크의 그림 속 인물들은 풍경을 흡수하고 감정을 증폭시킨다. 어떤 슬픔은 주변의 환경마저 우울과 슬픔의 색채로 물들인다. 뭉크의 그림은 이별을 한 이들에게 더 큰 슬픔이자 동시에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이별, 1986 / 멜랑꼴리, 1902


'이별'이라는 작품 속 여자의 마음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남자는 나무를 부여잡고 힘없이 땅을 디딛고 선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남자에 가 닿는다. 남자는 땅을 바라보고, 여자는 하늘을 바라본다. 여자는 자유를 갈망하고 남자는 좌절한다. 뭉크의 표현에 따르면, 여성에게 이별은 해방이지만 남자는 상처받은 채 남겨진다. 꼭 남녀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별이 두 사람에게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 공감이 된다.  


'멜랑꼴리' 그림을 두 번째 만났다. 처음 파리의 미술관에서 봤을 때도 눈이 갔다. 뭉크가 절규나 고통 외에도 멜랑꼴리함, 답답함, 외로움 등 다양한 감정을 묘사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짱구 눈썹의 남자, 손턱을 괴는 행동에서 표현되는 남자의 답답한 감정, 회색빛 하늘이 오히려 밝고 땅과 남자는 온통 암흑이다. 절규보다 요즘 세대의 고뇌를 더 잘 대표하는 그림이 아닐까. 


뱀파이어, 뭉크 / 병든 아이 I, 뭉크, 1896


전시에서 '절규' 바로 옆에 놓인 이 '병든 아이 I' 가 나는 절규보다 더 처절하게 느껴졌다. 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옆모습, 휘달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처진 눈썹, 숨을 내쉬는 콧구멍, 앙다문 입술, 흐트러진 머리 사이의 귀, 아프지만 곧게 놓인 얼굴, 나무 창가 옆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녀 뒤에 다른 형태로 그려진 사물은 칼일까. 실크스크린 작품들이 떠올랐고, 원작 판이 좋은 작품이면 판화는 새로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절규 이전의 뭉크는 깊은 감정을 무수히 많은 반복을 통해 판화를 찍어내고 그렸다. 거장으로서 인정과 그 뒤에야 찾아왔다. '존경과 사랑은 함께 갈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여행을 많이 다닌 뭉크 

1889-1892년에는 니스, 1892-1895년에는 베를린, 1896-1897년은 파리, 1909년에는 오슬로로 뭉크는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고 이동했다. 뭉크는 보헤미안이자 노마드였다. 베를린과 파리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 느낀 설렘과 벅참은 아직도 생생하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역사와 미술이 채워진 도시는 아름다웠고 풍요로웠다. 이 도시에 오래 머문다면 점차 다른 모습을 보았겠지만 여행자의 눈으로 걸어다닌 도시에서는 내가 원하는 새로움과 예술성이 포착됬다. 뭉크는 새로운 도시에서 어떤 걸 보고 배우고 그림에 녹여냈을까. 도시나 풍경을 많이 그린 다른 화가들보다 여전히 인물과 감정을 더 많이 그린 것 같다. 정신 세계를 대변하기로 마음 먹은 뭉크에게는 보이는 걸 그리는게 그림이 아니다. 


더는 남자가 책을 읽고 여자가 뜨개질하는 장면을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숨 쉬고, 느끼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릴 것이다.
- 뭉크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오늘 가장 좋았던 그림을 떠올리기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 디지털 사이니지로 뭉크의 여러 그림이 펼쳐졌고, 가장 좋았던 그림과 특징들을 한번 더 회고할 수 있었다. 나는 '피오르의 빨간 모자를 쓴 여인'이 떠올랐다. '태양' 이후 종종 떠올릴 뭉크의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 여성의 뒤에 작게 드리운 어둠의 막이 이 그림이 좋았던 이유다. 빨간 모자를 쓴 여인은 긴장했지만 위축되지는 않았다. 힘이 들어갔지만 어둡지 않다. 갈색 형태로 표현된 불안감은 여인의 옆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 정도 불안감은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 작은 불안감을 여인을 감당할 수 있다. 손을 꽉 쥐고 여인은 모델이 된다. 새빨간 모자와 파란 드레스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다와 여인은 하나가 되는 동시에 구분된다. 여인의 표정, 눈썹과 입, 얼굴 각도,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손짓, 발모양에서 여성의 긴장과 의지가 전해진다. 


상징주의와 색채주의 

전시 내내 뭉크가 심리를 그림에 드러내는 방식에 감탄했다. 감정이 색으로 표현된다. 불안을 그림자와 같이 표현해 분명 존재하나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표현해낸다. 연베이지 색의 하늘, 연보라 파스텔톤의 바다, 녹색 들판, 고흐가 떠오르는 수평 붓질에 흔들리는 심리가 느껴진다. 


'예술은 현실을 재현 또는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을 넘어) 상징을 통해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상징주의를 좋아한다. 상징주의를 화폭에 넣은 앙리 루소, 마크 샤갈, 뭉크의 그림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언제 어떤 그림을 보든지 내 감정에 따라 다른 감상이 일어난다. 


'자연의 재현을 거부하고 내면에 잠재된 강렬한 표현 욕구, 즉 감정과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표현주의와 '눈에 보이는 색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화가 내면에 요동치는 색채가 그림에 투영된다.'는 색채주의의 화가 뭉크의 그림들을 보며 오랜만에 참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되살렸다. 


피오르의 빨간 모자를 쓴 여인, 뭉크


뭉크는 절규로 알려졌지만 절규보다 다양한 감정과 인간의 생애 주기를 꾸준히 연구하고 그린 전문가이자 심리 화가다. 누구에게나 가장 외롭고 우울한 시기가 찾아올 수 있다. 긴 터널에 들어갔을 때 뭉크의 그림은 동반자이자 상담가가 된다들어주는 시간 그 자체가 위로가 되는 심리 상담처럼 그림은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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