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읽고
롱블랙 뉴스레터에서 조성익 건축가의 인생 공간에 대한 글을 읽고, 바로 '건축가의 공간 일기' 책을 샀다.
사람마다 자신과 어울리는, 마음이 편해지는, 좋은 에너지를 받는 공간이 있다. 공간이 사람의 잠재력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를 굳이 내가 살아갈 나라, 공간으로 선택한 데도 이 사시사철 여름인 글로벌 도시가 나에게 자기다움을 더 키워주는 환경이라고 믿어서였다.
시간의 자유를 갖기 위해 경제적 독립을 목표한다. 이와 더불어 공간 선택의 자유를 갖는 건 큰 행운이자 능력이다. 일상 속에서 내가 일할 공간, 휴식할 공간, 창의성을 키울 공간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자기다움이 꽃필 수 있지 않을까.
싱가포르살이 4년 차에 접어드는 동안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방문하고 또 방문하고 공간들이 있다.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지치고 힘든 날,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으로 도피한다.
일상 속 도피 공간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 좋다. 에너지가 없는 날 빠르게 도피할 수 있어야 힘을 얻고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 공간 안팎의 에너지까지 좋다면 (공원이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거나, 하늘을 볼 수 있다면) 도피 공간까지 가는 경험이 좋아 더 자주 방문하게 된다.
국립 미술관 혹은 국립 박물관은 어느 도시를 가나 나의 '인생 공간'이 되곤 한다. 한국에서는 대학생 시절 지하철을 타고 국립 중앙 박물관을 자주 갔다. 이촌역에 내려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나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정원가로 나오며 햇빛을 받을 때 마음이 정화되고 공간의 에너지를 받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고층 건물 숲을 나와 가로로 긴 박물관 건축물과 물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을 볼 때면 눈과 마음이 함께 시원해졌다.
그때부터 습관이 든 건지, 일 또는 사람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은 날이면 도시 속 시끄러움과 번잡함을 떠나 평화롭고 고요한 미술관으로 숨는다.
공간으로 인해 감정이 변하는 순간,
우리는 범속한 나의 일상을 넘어서 우주의 질서에 귀 기울이게 된다.
나를 넘어서는 절대자, 내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질서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 건축가의 공간일기, p.16
책에서 공간의 위로에 대한 구절이 참 좋았다. 좋은 공간에 나를 두면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그렇다. 때마침 내셔널 갤러리에서 새로 시작한 싱가포르계 영국 작가, Kim Lim의 전시는 갤러리를 더 좋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느린 속도로 머무는 공간이 치유의 역할을 한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미술관에서 공간에 흐르는 시간과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책에서 그리스인의 시간 인식을 크로노스 (시간의 양)와 카이로스 (시간의 질)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 부분이 신선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게 이 시대의 축복일만큼 우리는 자유로운 시간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에 얼마나 부단히 애쓰는가. 그러나 자주 우리는 어렵게 만들어낸 소중한 시간을 휴대폰 앞에서, 컴퓨터 앞에서, 혼잡한 도로 위 좁은 차 위에서 흘려보내곤 한다. 시간의 양을 확보했다면 그 가치를 알고, 시간의 질을 위해 공간을 선택해 보자.
절제된 양식, 조용한 공간, 변화하는 빛. 내 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공간에 머물고 천천히 걸어 다니며 몰랐던 감정과 고민까지 위로받는다. 카이로스, 시간의 질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공간에 나를 둔다.
공간뿐만 아니라 공간 안을 채우는 구성에도 퀄리티가 참 높다.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은 창의력의 보고이다. 항상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고 있다. 들리면 발견하고, 들리지 않으면 지나치고 마는 거다. 특정 전시를 보겠다는 목적 없이 30분-1시간 시간이 나면 내셔널 갤러리에 들리기를 4년, 놀랍게도 항상 새로운 전시가 머리와 마음을 울린다.
Painting grows with time; it should even be a step ahead of time.
- Cheong Soo Pieng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근대 화가 청수핑의 그림이 한 전시관에 모여있다. 그림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코너가 있고, 화가가 완성작을 내기까지 수정한 중간 작업을 추적해 화가의 의도를 설명하는 방식의 큐레이션이 준비되었다. 청수핑의 다양한 화풍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움인데 미술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됐다. 캔버스의 재료부터 물감, 밑작업까지 완성작 뒤에 가려진 (또는 보고자 하는 이에게만 보이는) 화가의 의도와 선택들을 발견하며 미술이 더 아름답고 심오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오늘 도피 공간, 미술관에 오게 만든 일상의 번뇌는 잦아들었다. 해결되는 건 없지만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게 창의성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고 간다.
STPI 갤러리
로버슨 키 강변에 작은 독립 미술관이 있다. 전시가 일 년에도 5-6번 자주 바뀐다. 주말 아침 브런치, 요가를 하기 위해 근처에 왔다가 단 5분이 주어지더라도 들리면 새로운 현대 미술을 만날 수 있다. 리버 밸리에 살 때, STPI 갤러리는 나의 주말 아침 '리프레쉬 공간'이었다.
STPI는 비영리재단이고, 아시아 현대 미술을 후원하는 싱가포르 정부의 지원을 받기에 싱가포르, 동남아시아 곳곳의 젊은 미술가의 전시를 많이 소개한다. 내가 이 공간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시의 수준이 높아서는 아니다. 작은 미술관이기에 30분 이상을 머물러 본 적이 없다. 하지만 STPI는 어떤 전시가 열리는지 알고 기대도 하게 만드는 내셔널 갤러리와 달리, 들어본 적 없는 동시대의 예술가들을 사전 지식 없이 전시를 통해 처음 만나게 해주는 장소다. 그야말로 기대하지 않고 예술을 일상 속에서 접하는 공간이 된다. 단 10분이라도 이 시간을 갖고 나면 그날은 하루가 달라진다. 미술관 밖 강가를 걸으며 햇빛을 느끼고,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느끼고, 버스를 타도 창밖의 풍경을 보며 기록을 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바쁜 삶 속에
인식하지 못하고 지냈던 대상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
공간이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다.
- 건축가의 공간일기, p.28
역사와 철학이 담긴 신중하게 설계된 건축물,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정교하게 배치한 전시, 예술을 매개로 새로움을 건네는 국립 미술관과 집 근처 독립 미술관은 나의 싱가포르 인생 공간이다.